고열에도 기생충이 죽지 않는 비결은?

말라리아원충, 고열에서 PI(3)P 지질 분자 생산해

말라리아의 병원체는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아니라 기생충과 비슷한 생활사를 보이는 말라리아원충이다. 말라리아에 걸린 사람은 고열로 인해 모든 것이 제 기능을 못하지만, 특이하게도 이 기생충은 숙주의 적혈구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면서 끊임없이 번성한다.

그런데 이 기생충은 어떻게 그 같은 고열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지를 밝힌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미국 듀크대학 화학과의 에밀리 더비셔 조교수와 매사추세츠공과대학 생물공학과 잭킨 나일스 교수 등이 참여한 공동 연구진이 말라리아원충의 내장을 고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작용하는 지질 단백질을 발견한 것이다.

말라리아는 매년 수억 명의 인구에 감염돼 약 40만 명의 사망자를 발생시키는데, 그중 대부분은 어린이들이다. 말라리아의 흉포한 고열은 약 5000년 전에 만들어진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점토판에서도 언급될 만큼 오래전부터 익히 알려져 있었다.

왼쪽은 정상 체온, 오른쪽은 고열에서의 현미경 관찰 사진. 말라리아원충은 고열이 되면 내장을 보호하기 위해 특정 물질을 갑옷처럼 두른다. © Kuan-Yi Lu(Duke University)

말라리아원충은 중간 숙주인 모기 암컷을 거쳐 인체 내로 들어온다. 따라서 이 기생충의 주변 온도는 모기의 체온인 20℃ 초반에서 갑자기 사람의 체온인 37℃까지 상승하게 된다.

더구나 고열이 발생하게 되면 인간 숙주의 체온은 40.5℃ 이상까지 치솟다가 2~6시간 후 정상이 되는데, 이 같은 롤러코스터 패턴은 사나흘 주기로 반복된다. 말라리아원충의 입장에서 보면 냉탕에 있다가 갑자기 온탕으로 오가는 셈이 된다.

연구진은 이와 비슷한 상황을 재현하기 위해 말라리아에 감염된 적혈구를 6시간 동안 40℃의 인큐베이터에 넣은 뒤 다시 인간의 정상 체온인 37℃로 끌어내리기를 반복했다. 이 같은 온도 변화가 나타날 때 이 기생충 내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내기 위해 연구진은 현미경으로 수백 시간 이상 관찰했다.

냉탕에서 갑자기 온탕으로 오가는 기생충

그 결과 온도가 상승하면 말라리아원충들이 포스파티딜이노시톨 3-인산(PI(3)P)이라고 불리는 지질 분자를 더 많이 생산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물질은 기생충의 세포 내부에 있는 작은 주머니의 외벽에 쌓이는데, 그 주머니가 바로 ‘식포(食胞)’라고 불리는 내장의 일종이다.

그곳에서 포스파티딜이노시톨 3-인산은 또 다른 분자인 ‘Hsp70’이라는 열충격 단백질을 모집해 결합함으로써 식포의 외벽을 강화시키는 것으로 밝혀졌다.

연구진은 만약 이 같은 지질 단백질의 작용이 없다면 고열이 발생할 때 식포에 빈 공간이 만들어져서 산성 물질이 분출돼 말라리아원충이 소멸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 연구 결과는 유럽분자생물학회가 발행하는 국제학술지 ‘이라이프(eLife)’ 최신호에 게재됐다.

말라리아원충이 고열 등으로부터 어떻게 자신의 세포를 보호하는지 이해하는 것은 기존 치료제에 대해 내성을 가진 변종을 퇴치하는 새로운 방법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의미가 크다.

기존 연구들에 의하면 포스파티딜이노시톨 3-인산 수치가 높은 말라리아원충들은 대표적인 말라리아 치료 약물인 아르테미시닌에 대한 내성이 높다는 사실이 밝혀진 바 있다.

실제로 아르테미시닌이 1970년대에 처음 도입된 이래 동남아시아 일부 지역에서는 이 약물에 대해 부분적인 저항성을 지닌 말라리아원충의 사례가 보고되고 있어 우려를 낳고 있다. 말라리아는 백신이 없으므로 가능한 한 모기에 물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 최선의 예방책이다.

내성 가진 말라리아원충 변종 퇴치에 도움

그러나 이번 연구로 인해 아르테미시닌에다 말라리아원충의 포스파티딜이노시톨 3-인산 수치를 감소시키고 식포의 막을 파괴하는 다른 약물을 결합할 경우 아르테미시닌에 내성을 지니게 된 기생충들도 문제없이 치료할 수 있게 됐다.

이번 연구를 주도한 에밀리 더비셔 조교수는 “아직까지 말라리아원충의 행동 방식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연구가 더 필요하다. 하지만 아르테미시닌의 수명과 효과를 연장하기 위해 새로운 결합 치료법을 설계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주장했다.

이 연구는 미국 국립보건원(NIH)과 빌 앤 멜린다 게이츠 재단의 지원에 의해 진행된 것으로 알려졌다.

말라리아는 원충의 종에 따라 삼일열, 사일열, 열대열, 난형열, 원숭이열 등 5종으로 구분된다. 전 세계적으로 삼일열과 열대열에 감염되는 비율이 가장 높으며, 국내의 경우 삼일열 말라리아가 발생한다.

한편 질병관리본부의 2018년 자료에 의하면 말라리아는 국내 기생충 감염질환 중 간흡충증에 이어 두 번째로 발병 건수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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