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인즈를 탄생시킨 것은 대공황
존 메이너드 케인즈(John Maynard Keynes)는 기존의 경제이론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낸 인물이다. 아주 매력적인 인물이다. 이튼(Eton) 스쿨과 캠브리지(Cambridge) 대학을 졸업하고 영국 재무성 출신으로 블룸스베리 그룹(Bloomsbury Group:1906년부터 1930년경까지 런던과 케임브리지를 중심으로 활동한 영국의 지식인·예술가들의 모임으로서 이 그룹의 중심 인물들이 런던 중심가 근처 블룸스베리에서 살고 있었던 데서 명칭이 유래 되었다)의 멤버였다. 이 모임은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lf)나 포스터(E.M. Forster)를 포함해서 런던의 유명작가, 예술가, 지식인들로 이루어진 영향력 있는 집단이었다.
학구적이며 공공정책에 대해 토론하기를 좋아했던 그는 보험회사를 운영해서 많은 돈을 벌기도 했다. 철학자 버트랜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케인즈를 자기가 만났던 사람들 중 가장 명석한 두뇌를 가진 영리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와 논쟁할 때면 내 자신이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된 것 같고, 바보가 된 느낌이 들지 않을 때가 별로 없었다” 고 말한 적이 있다.
경제에서 정부의 역할을 완전히 변화시켜
그러나 케인즈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 오르는 것은 경제적 혁신가라는 점이다. 케인즈는 경제학자들이 경기순환, 가격, 노동시장, 경제성장 등을 연구하는 방법을 바꾸게 만들었다. 그의 뛰어난 식견은 대공황에 접어들 무렵부터 지난 반 세기 동안 경기순환의 하강기 때마다 전반적으로 적용되었다. “케인즈의 업적이 지속적인 효력을 가지는 것은 그가 거시경제학을 창안한 점이다.” 시카고 일리노이 대학(University of Illinois)의 역사경제학 교수인 데이드르 맥클로스키(Deidre McCloskey) 박사의 말이다.
진정 케인즈는 자본주의 경제를, 어쩌면 대공황이 기승을 부리는 동안 인류문명을 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산업화된 국가에서 수 백만 명의 실직자들이 넘쳐 나는데도 불구하고 정통파 경제학은 정부가 아무 조치도 취해서는 안 된다고 하거나 심지어는 돈줄을 더 졸라매야 한다고 요구하기까지 한 것이다.
파시즘과 전체주의 이론을 이겨내
케인즈는 이러한 가혹한 발언에 대항해 싸웠다. 1936년 “고용, 이자, 통화에 관한 일반 이론”이라는 획기적인 저서에서 ‘균형재정’을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이론가들을 설득했다. 그는 이 저서에서 경제가 침체 또는 불황에 빠지는 메커니즘을 보여주었고 정부가 적자 재정을 편성해서 공공소비부문에 재정 지출을 늘림으로써 소비행위와 사업에 대한 신뢰를 회복시켜 나선형 불황의 고리를 깰 수 있다고 주장했다.
자유방임의 위험성을 증명해 내
그의 생각은 전후 황금의 성장시대를 여는데 기여했다. 1940년대 설립된 국제통화기금(IMF)이나 세계은행(World Bank)같이 지금도 전세계적 규모로 운영되고 있는 금융기구 창설을 주장했다.
케인즈는 현대 혼합경제에서 이론적으로 권좌에 올라있는 인물이다. 현재 ‘자유방임’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것은 그의 영향이라는 증거다. 우리 모두는 지금 케인즈학파 내지는 케인즈 이론 신봉자들인 셈이다. 경기가 하강국면일 때 정부가 적자재정을 편성하여 전반적인 수요를 늘리고 그에 따라 고용을 증대하는 것이 일상화된 경제정책이 되었다.
많은 경제학자들이 1990년부터 장기간에 걸친 일본의 불경기가 대체로 재정과 통화 정책이라는 수단을 과감하게 사용하지 않은 소심한 정책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경제는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데 기여해야
케인즈는 이전의 아담 스미드와 칼 마르크스처럼 경제학이 자원분배의 효율성만을 연구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있어서 좋은 삶이란 문명을 특징짓는 것으로서 아름다움, 예술, 사랑, 덕행에 대한 열정을 의미했다. 경제학의 가치는 우리의 그러한 열정이 꽃 필 수 있도록 안정된 부를 추구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케인즈는 학문을 통해 세계를 변화시킨 위대한 혁신가다.
- 김형근 객원편집위원
- 저작권자 2005-04-06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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