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리버 여행기하면 항해 도중 난파한 걸리버가 소인들에게 밧줄로 꽁꽁 묶인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소인국에 이어 거인국에서는 반대로 소인으로 간주되는 걸리버의 여행기는 얼핏 모험, 어드벤처 영화로 생각하기 쉽다.
걸리버 여행기, 4개국 걸친 풍자소설
하지만 원작자인 조나단 스위프트가 그리려했던 걸리버 여행기는 모험 소설이 아니라 통렬한 풍자 소설이다. 걸리버의 모험담은 소인국과 거인국에 그치지 않는다. 걸리버는 작은 사람들의 나라인 릴리퍼트, 큰 사람들의 나라인 브롭딩낵, 하늘을 나는 섬의 나라 라퓨타, 말들의 나라 휴이넘 등 4개국에 걸쳐 험난한 여정을 한다.
18세기 아일랜드 작가인 스위프트는 각 나라를 통해 당시 영국의 관습과 정치, 귀족문화 등을 은유적으로 풍자했다. 작은 사람들의 나라인 릴리퍼트의 귀족들은 150cm에도 못 미치는 작은 몸으로 정치 투쟁에 여념이 없다. 이들의 주요 논쟁거리 가운데 하나가 구두의 높이이다.
릴리퍼트의 귀족들은 구두 높이가 높은 것을 신는 트라멕산파와 낮은 것을 싣는 슬라멕산 파로 나뉘어 각각 자기네 구두를 신어야 한다고 싸운다. 구두 높이의 차이는 불과 2mm. 스위프는 트라멕산파와 슬라멕산파의 싸움을 당시 영국 정계의 휘그당(자유당)과 토리당(보수당)의 붕당 정치로 묘사해 풍자했다.
큰 사람들의 나라인 브롭딩낵의 사람들은 소인국에 비해서는 평화로운 삶은 영위한다. 이들은 걸리버가 들려주는 영국의 정치현실과 영국이 타국과 벌이는 전쟁에 대해서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브롭딩낵의 국왕은 영국 사람들이 세상의 표면에 기어 다니는 생물 가운데 가장 유해하고 얄미운 존재라고 결론짓는다. 그 이유는 걸리버가 비웃었던 소인국의 이해할 수 없는 인재등용 정책을 영국 역시 그대로 답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3번째 여행지인 하늘을 나는 섬의 나라 라퓨타에서는 과학자들의 탁상이론이 도마에 올랐다. 라퓨타의 사람들은 공기에서 수분을 없애 손으로 만질 수 있게 하는 방법 등 실현 불가능한 이론에만 골몰한다. 이들은 별다른 성과도 없는 이론으로 자신의 이론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에 대해서는 배격과 멸시하는 아집을 보인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하늘을 나는 섬 라퓨타를 모티브로 ‘라퓨타’라는 장편만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하야오 감독의 라퓨타는 섬을 하늘에 띄우는 라퓨타의 첨단 기술을 군사적으로 악용하려는 악당 일당과 이에 맞선 주인공 일행의 대결을 만화적 상상으로 그렸다.
말들의 나라 휴이넘은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말들이 인간을 동물처럼 지배하는 나라이다. 휴이넘에서 인간은 ‘야후’라는 야만 동물로 그려지며 갖가지 사회 문제를 야기하는 골치 아픈 존재이다. 스위프트의 풍자는 휴이넘에서 절정을 이루는데 휴이넘 자체가 그가 생각하는 이상 세계이기 때문이다.
18세기의 걸리버가 21세기 현대사회에 표류해 온다면 그는 어떤 이질적 문화를 경험할까. 걸리버가 만난 거인국의 거인은 현대 과학의 발달로 일정 수준 가능해졌다. 인간 성장호르몬이다.
성장 호르몬 붐의 배경은
인간 성장호르몬은 대뇌 밑에 위치한 뇌하수체 전엽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이다. 체내에서 뼈, 연골 등의 성장과 지방분해, 단백질 합성을 촉진시킨다. 청소년기와 성장기에 뼈의 길이 성장과 근육의 증가 등 성장을 촉진하며 성인기에는 인대, 콜라켄 등을 증가시키고 지방분해를 촉진한다.
성장호르몬은 선천성 심장병, 만성폐질환, 만성신장질환, 만성소모성질환 등으로 인한 왜소증 또는 성장호르몬 결핍증이나 호르몬 분비 이상으로 인한 왜소증, 선천성 질환인 터너증후군 치료 등에 사용된다. 과도하게 투약할 경우 당뇨병 등 부작용을 초래하기도 한다.
성장호르몬은 키가 다 자란 이후에도 우리 몸에서 정상적으로 분비돼 여러 생리현상에 관여한다. 운동, 식생활, 스트레스, 수면 등 환경조건이 분비량에 영향을 미친다. 성장호르몬은 성장호르몬 결핍증 이외에도 비만치료, 노화방지 목적 등으로 시장이 확대되면서 약 3조원의 시장을 형성하고 있는 세계적인 블록버스터 의약품 가운데 하나이다.
국내에서도 인간 성장호르몬을 분비하는 형질전환 복제돼지의 개발, 매일 투약하는 것이 아니라 한 번 투약하면 2개월 정도 서서히 인체에서 분비되는 약물전달 기술의 개발, 주사가 아닌 먹는 경구용 성장호르몬제의 개발 등 관련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성장호르몬 시장에 유수의 제약회사들이 너도나도 뛰어들고 있는 이유는 한 마디로 성장호르몬이 돈이 되기 때문이다. 선천적으로 키가 작아 사회생활에 지장이 있는 사람들에게 성장호르몬은 축복이 될 수 있다. 한편 걸리버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외모지상주의인 현 세태 역시 성장호르몬 붐의 한 몫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 역시 부인할 수는 없어 보인다.
성장호르몬은 인간이 아닌 가축에게도 사용된다. 이른바 공장식 축산업의 발달 때문이다. 소비가 급증하면서 가축을 생명이 아니라 공장에서 마구 찍어내듯이 사육하는 것이 공장식 축산업이다.
공장식 축산업, 역설적 상황 초래
미국의 공장형 축사에서 자라는 가축은 100% 성장호르몬을 맞는 것으로 알려졌다. 성장촉진을 위해 성장호르몬을 투여하면 우유를 정상적으로 사육했을 때보다 훨씬 많이 뽑을 수 있다.
문제는 이렇게 성장호르몬과 각종 항생제를 맞으며 비좁은 축사에서 공산품처럼 사육되는 가축들은 정상적으로 사육되는 가축들에 비해 질병 취약 등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점이다. 더 빨리 더 많이 생산하려는 인간의 과도한 욕심이 오히려 인간에게 해가 될 수 있는 역설적인 상황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셈이다.
- 이성규 객원기자
- henry95@daum.net
- 저작권자 2011-01-28 ⓒ ScienceTimes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