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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지 않는 가마의 어제 우리나라의 가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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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5월 첫발을 내디딘 '꿈꾸는 과학'은 과학의 대중적 글쓰기와 일러스트레이션을 함께 고민하고 생각하는 글쓰기 공동체입니다. 꿈꾸는 과학은 모두가 즐거운 과학을 이야기하는 세상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꿈꾸는 과학은 다양한 과학책들을 읽고 토론함으로써 비판적 사고와 과학적 상상력을 키우고 있습니다. 또한 꾸준히 과학 글쓰기를 연습함으로써 자신만의 글쓰기 스타일을 구축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을 향해 퍼져나가는 꿈꾸는 과학의 소망이 다양한 계층의 독자들에게 과학의 즐거움을 전하고 이러한 즐거움들이 모여 건전한 과학문화를 만들어 나아가길 희망합니다!

[편집자 註]

24시 불가마 찜질방. 내가 무척 좋아하는 곳이다. 살얼음이 사각거리는 식혜를 한 통 사들고 찜질방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더운 공기가 훅 하며 코와 입을 틀어막는다. ‘절절 끓는 바닥’을 가장 먼저 맛보는 것은 나의 발바닥이다. 반바지 반팔 찜질복 차림의 사람들 틈에 자리를 잡고 드러누우면 곧이어 온몸으로 가마의 열기를 느낄 수 있다. 섭씨 70℃의 불가마 찜질방 안에서 우리들은 땀을 흘리며 벌겋게 익어간다.


새벽 3시, 이곳의 가마도 무척이나 뜨겁다. 문경 하늘재 가마터의 ‘망댕이 사기요(窯)’에 불이 지펴졌다. “넣어~” 가마 앞에 앉아 불꽃을 지켜보던, 백산 김정옥(67) 사기장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대를 잇고 있는 외아들 김경식 명인은 적당히 잘라놓은 소나무를 불구멍에 밀어 넣는다. 소나무를 집어삼킨 불은 뜨거운 입김을 내며 기지개를 켠다. 앞으로 열네 시간은 족히 더 불을 때며 1300℃를 유지해야 반질반질한 사기그릇을 얻을 수 있다.


가마는 부엌에서는 솥을 걸어 불을 때는 곳이나, 도자기를 제작할 때에는 그릇을 굽기 위해 만든 장치를 일컫는 우리말이며 한자로는 ‘요(窯)’로 나타낸다. 즉 ‘가마’는 불을 때는 큰 장치라는 뜻이다. 그래서 기와를 구우면 기와가마요, 옹기를 구우면 옹기가마요, 벽돌을 구우면 벽돌가마요, 숯을 구우면 숯가마가 된다. 일본에서도 그대로 ‘가마(かま)’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이는 임진왜란 때 납치되어 간 우리나라 도공들이 일본 땅에서 자기를 만들며 우리말로 ‘가마’라고 한 것이 일본어로 자리 잡은 것이다.


왕년에 잘나가던 도공들의 무대였던 한국에는 가마터가 많다. 여기서 말하는 가마터란 그릇을 굽던 자리로 지금은 폐허가 된 곳을 가리킨다. 폐허가 된 자리는 나무숲이 되거나 잡초로 덮여 있기도 하고 밭으로 개간되기도 했으며 때로는 그 위에 길을 내고 아파트를 지어놓아 애써 찾아보지 않으면 그 흔적을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폐허가 된 옛 가마자리에서는 깨진 그릇 조각, 가마 벽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 가마 안에서 사용했던 도구들이 발견된다. 흩어진 그릇 조각들은 제작 당시에는 실패하여 도공이 깨버린 것이지만 많은 학술 정보를 담고 있기 때문에 도자사 연구에 기초 자료로 활용된다. 누군가 일부러 깨진 그릇들을 모아 그곳에 버려두지 않았다면 가마터에서 수습한 도편은 모두 진실한 그 당시의 제품이므로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는 명품의 진위를 가리는 데 중요한 비교자료가 되는 것이다.


가마 짓기는 대략 1만5천-1만3천년 전에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기록으로 남겨진 가마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이집트에 있는 베니 하산(Beni Hasan) 동굴벽화에 그려진 원통형 가마이다.


1만5천년 전의 사람들은 모닥불에 음식을 구워먹던 중 모닥불 옆에 있던 흙으로 빚은 그릇이 우연히 불에 익어 단단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학자들은 이것이 ‘노천요’의 초기 형태일 것이라 생각한다. 하남 미사동과 경북 금릉군 송죽리 유적이 노천요로 추정되는 곳이다.


노천요는 공기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500~700℃ 이상으로 화력을 올릴 수 없다. 이처럼 낮은 온도에서 구운 그릇은 물을 흡수하기 때문에 액체보다는 낱알이나 물기가 없는 음식을 저장하는 데 보다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국사책에서 자주 보던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 토기를 떠올려보자). 당시 토기의 표면 색상이 붉은 색을 띠는 이유도 태토(바탕흙)에 포함되어 있는 철이 공기 중의 산소와 만나 산화제이철이 되기 때문이다.


물이 새지 않는 그릇을 만들고 싶었던 옛 사람들의 생각이 닿은 곳은 ‘땅속’이었다. 평지의 노천보다는 구덩이를 약간 파고 그릇과 나무를 지그재그로 잰 후 불을 때는 방법으로 열을 좀 더 집중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구덩이 위에 건조된 동물의 배설물이나 나무를 덮어 흑색 토기를 만드는 방법도 터득하였다. 우리나라 청동기 유적에서 발견되는 가마가 대체로 이에 속하는데, 이러한 방식의 가마를 ‘수혈요’라 한다.


수혈요 다음에 등장한 가마는 ‘지하식 요’이다. 구덩이를 덮는 것보다는 땅속에 가마를 만드는 것이 밀폐된 공간을 만들기에 더욱 효과적이라는 것을 발견한 사람들은 완전히 지하로 들어간 가마에 연료를 공급하는 부분과 그릇을 익히는 공간 그리고 연기가 빠지는 부분을 고안해 냈다. 상향하는 불꽃은 천장을 향해 위로 올라가 반대편의 굴뚝을 통해 빠져나간다.

따라서 바닥은 뒷부분의 각도가 약간 높아지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이때 그릇은 완전히 밀폐된 환원염의 상태에서 익기 때문에 회색의 경질 토기가 된다. 가마 안에서 불꽃은 옆으로 흐르기 때문에 이와 같은 가마를 횡염식 가마로 분류하기도 한다.


훌륭한 도자기를 구워내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높은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이다. 가마의 형태는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발전하기 시작하는데, 고려시대 이후의 자기 가마 구조는 불을 때는 방의 수와 구조를 변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단실요’는 아궁이의 열이 경사진 등요를 따라 옆으로 흐르면서 그릇을 익힌 후에 굴뚝으로 빠져나가는 구조로 고려시대 청자 가마와 15~16세기 조선시대 분청사기 가마 · 백자 가마가 이에 속한다. 그런데 가마의 길이가 약 10m 이상이 되면 뒤로 갈수록 온도가 떨어지므로 고려시대에는 천장에 있는 창구멍을 통해 창불을 넣음으로써 일정하게 높은 온도를 유지시켰고, 조선시대 이후에는 측면 출입구로 보조 땔감을 공급하는 기지(?)를 발휘하기도 했다.


이후 단실요의 내부에 같은 간격으로 불기둥(정염주: 흐르는 불을 잡아 머물게 한다는 뜻이다)을 세우는 경우도 있었는데, 진흙으로 만든 이 불기둥은 천장까지 닿지 않아 옆으로 흐르는 불꽃을 상, 좌, 우로 골고루 갈라지게 하거나 기둥 주변에서 맴돌게 하여 더욱 효율적으로 불꽃을 유도하고 열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불기둥 때문에 갇힌 열기는 가마 안의 온도를 오래도록 은은히 유지시켜 가마 안의 그릇을 서서히 익히고, 불기둥 바로 뒤에 측면 출입구가 있어 보조 장작을 보충하거나 그릇을 넣고 빼는 일도 함께 이루어진다. 이런 구조의 가마는 ‘단실 불기둥요’라 부른다.


17세기 이후에 유행한 ‘분실요’는 이름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여러 개의 불창기둥(기존 불기둥에 작은 창문을 낸 것)을 설치한 뒤 곧바로 연결되는 불창기둥 위에 확실한 격벽시설을 갖춰 번조실을 몇 개의 방으로 나눈 구조이다. 그 때문에 단실요에서 나타난 불기둥의 능력이 분실요에서 더욱 강해졌다고 볼 수 있는데, 아궁이에서 올라온 열이 첫째 칸부터 차례로 직진하다 벽에 막히면 하향하여 빙글빙글 돌아 그릇을 익히면서 불기둥 사이를 통과해 다음 칸으로 이동하며, 측면 출입구로 땔감을 공급받아 매 칸마다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분실요는 번조실 바닥의 형태에도 변화를 꾀하기 시작한다. 바닥의 격벽이 있는 위치에 계단식 단을 만들어 불창기둥을 보다 효과적으로 세우면서 번조실 내부 공간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려 한 것이리라. 이처럼 계단 위에 격벽이 설치되는 가마를 ‘분실 계단식 요’라고 하여 계단이 없는 분실요와 구별한다.


진흙으로 짓고 장작으로 불을 땐 예전의 방식은 말 그대로 ‘재래식’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오늘날의 가마는 기계식으로 바뀌고 대량생산이 가능하며 연료도 중유를 사용하여 적은 노력으로 편리하게 도자기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문경의 도공들은 여전히 전통방식의 장작가마를 고집한다. '왜?'라는 사람들의 질문에 김 사기장의 대답은 명쾌하다. 선조들의 작품을 재현, 전승하려면 그때 그 방식 그대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 또 왜 옛날 작품을 하느냐고 물어. 그럼 또 대답허제. 그건 나만이 할 수 있는 기라고. 일본이나 영국이나 독일은 할 수 없는 우리만의 작품이라고. 일본 사람이 좋아하든 말든 그건 내가 신경 쓸 바가 아닌 기라."



《 참고 》

·한국 도자기 가마터 연구, 2005, 강경숙, 시공사

·우리나라 도자기와 가마터, 2003, 송재선, 동문선

·‘새재’를 넘어 세상으로 나선 문경 도공의 운명(기사), 코리아플러스, 신동섭

꿈꾸는과학 4기 김민지 deadend116@empal.com
저작권자 2006-12-28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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