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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7개월이 지난 2006년 7월 28일에도 똑같은 광경이 벌어졌다. 아리랑 1호의 발사를 지켜보던 눈들이 다시 아리랑 2호의 발사를 지켜봤다. 그러나 발사장은 러시아 플레세츠크로, 발사 시간은 낮으로 바뀌었다. 참관단들도 달라졌다. 항우연 최동환 원장은 백홍열 원장으로, 조건호 차관은 임상규 과학기술혁신본부장으로, 이상희 의원 자리는 홍창선 의원(열린우리당)이 대신했다. 필자 또한 5년차 초임 기자에서 12년차 중견기자로 바뀌었다.
아리랑 1호가 발사될 때 현장에 근무했던 연구진들은 이제 세월이 흘러 연구 현장을 총지휘하고 있었다. 당시 시험총괄실장이던 이주진 박사가 사업단장으로 아리랑 2호 제작과 발사를 총지휘했다. 이주진 박사 아래의 그룹장이던 이상률 박사는 현재 아리랑 3호 사업단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해상도 40배 높아져=가장 중요한 변화는 위성 자체의 질적 변화다. 아리랑 1호의 경우 해상도가 6.6m로 지구를 관측하는 데 아주 초보적인 수준이었다. 그러나 아리랑 2호는 흑백해상도 1m로 40배 향상됐다. 컬러의 경우 아리랑 1호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한데 반해 아리랑 2호는 컬러영상도 찍을 수 있다(컬러영상의 경우 해상도는 4m로 낮아진다).
아리랑 1호를 만들 때는 한국이 위성을 만들 기술이 거의 없어 해외기관과 공동개발했다. 미국의 위성제작업체로부터 기술을 전수받는 과정에서 어려움도 많이 겪었다. 아리랑 2호는 6년 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위성 본체를 국내 연구진이 주도해 만들었다.
#발사장은 왜 러시아로 갔을까=1호 발사는 미국 반덴버그 공군기지에서 실시했다. 아리랑 1호는 무게가 460㎏으로 작은 규모라 할 수 있다. 미국의 로켓 토러스에 실렸다. 아리랑 1호만 단독으로 실은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 위성이 먼저 실리고 우리 위성은 옆쪽에 함께 탑재됐다. 발사 비용은 약 250억원이었다.
아리랑 2호는 무게가 800kg으로 늘어났다. 그러므로 이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발사체를 골라야 하며 비용과 발사일정 등을 맞추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의 `로콧'이 가장 적절한 발사체로 손꼽혔다. 발사비용도 약 125억원으로 아리랑 1호의 절반에 불과하다. 러시아의 추운 기후나 플레세츠크 발사장의 보안 감시로 연구원들이 겪는 불편을 감수할 만했다.
아리랑 2호 때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4군데의 기지국을 열어두었다. 북극의 스발바도 군도, 아프리카의 말린디와 마스탈로마스, 남극의 세종기지 등이다. 이번에는 발사 후 1시간 20분 후 아프리카 말린디와 첫 교신이 가능했고 항우연 지상국과는 발사 후 6시간 55분 뒤인 밤 11시쯤 성공적으로 신호를 잡았다.
#개발 주역의 죽음=아리랑 2호 개발 주역의 한 사람인 이상설 박사가 지난 2002년 40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 박사는 아리랑 1호, 무궁화 위성의 개발과정을 전부 거쳤던 인물로 위성연구부 우주시험연구그룹장을 맡아 이주진 단장과 함께 아리랑 2호 개발을 이끌었다. 그는 1991년 9월 항우연에 입사해 창립 5주년 공로상(1994년), 아리랑 발사성공 대통령 표창(2000년) 등을 수상하며 11년간 연구원 발전에 공헌했다.
#아리랑 2호 첫 영상도착=지난 8월 29일 드디어 아리랑 2호가 보낸 첫 번째 영상이 도착했다. 항우연 백홍열 원장은 2006년 8월 29일 말끔히 면도한 모습으로 과학기술부 기자실을 찾았다. 아리랑 2호의 임무가 완수됐으니 `약속대로' 수염을 깎았다는 것. 이 영상을 보면 6년 7개월 동안 발전한 한국의 항공우주기술 수준을 한눈에 알 수 있다.
- 이은정 경향신문 과학전문기자
- 저작권자 2006-08-31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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