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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응용과학
꿈꾸는 과학 이솔희
2006-06-22

시간을 만들다! 해시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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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말고사 마지막 날, 시험을 보러 학교에 도착한 다음에야 나는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교롭게도 손목시계를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이다. 하는 수 없다. 나름대로 쓸 만하다고(?) 여겨온 내 감각을 또 믿어보기로 했다. 주어진 시간은 약 1시간 15분, 주어진 문제는 모두 4문제. 천천히 1번부터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내가 한 문제당 배분한 시간은 약 15분 정도. 그리고 1번을 겨우 풀었을 때였다. 갑자기 나는 시간이 궁금해졌다. 손을 들고 남은 시간을 여쭈어보았다.


“30분 남았습니다.”


괴롭다. 그 후의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묻지 말아주길. 굳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적인 시간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시간이 사람에 따라 다르게 흘러간다는 사실을 이미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1시간 15분이라는 시간은 시험을 감독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충분한 시간이었지만, 시계 없이 연필을 움직인 내 입장에서는 짧은 시간이었다.


그런데 만약 내가 그 날 시계를 가지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시험 감독관의 시간과 내 시간이 큰 차이가 나지는 않을 만큼 시간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고, 따라서 보다 계획성 있게 시간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사용될 수 있는 표준 시간 개념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잠자리에 들었을 옛날 사람들도 아마 이와 같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그들에게도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표준시간의 개념이 필요했다. 그리고 만질 수도 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나누기 위해서는 무언가 절대적인 기준이 필요했다. 무엇이 좋을까? 고대인들은 태양을 선택했다. 그것은 누구라도 인정할 수 있는 기준이었다. 태양은 날마다 매우 규칙적으로 하늘을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늘에 있는 태양을 보기 쉽게 할 수는 없을까? 그렇군. 태양의 움직임을 지표면에 투영시키자. 태양을 이용하여 시간을 알려주는 장치를 만드는 거야! 바로 해시계(일구:日晷)의 시작이다.


해시계는 기원전 3500년경 중국과 페르시아만의 고대왕국 칼데아에서 처음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곳의 사람들은 땅 위에 세워진 수직막대에 생기는 태양의 그림자를 이용해 태양의 움직임을 지표에 투영하였다. 그리고 그 움직임을 나누어 눈금으로 표시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해시계를 사용했을까? 우리나라는 삼국시대에 이미 해시계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리고 이 해시계는 조선 세종 때에 이르러 그 찬란한 빛을 발한다.


특히 우리는 세종 때 만들어진 앙부일구(仰釜日晷)라는 이름을 매우 친숙하게 들어 알고 있다. 한자어로 된 이름 때문에 괜히 어렵게 느껴지는가? 요즈음에는 앙부일구를 오목 해시계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진을 통해 잘 알려져 있지만 이 앙부일구의 모습은 마치 반구로 된 큰 대야와 같다. 안의 시반에는 여러 개의 세로줄(시각선)과 가로줄(절기선, 계절선)이 그어져 있으며 한쪽 가에는 그림자를 형성할 바늘(영침)이 달려 있다.


그렇다면 앙부일구를 통해 우리는 어떻게 시간을 알 수 있을까? 동쪽에서 사선으로 뜬 태양은 우리 머리 위를 통과하여 사선으로 진다. 이때 바늘이 정북쪽을 향하도록 앙부일구를 설치한다. 태양 빛은 수직으로 바늘을 지나며 그림자를 형성한다. 즉, 동쪽에서 뜬 태양의 그림자는 그 반대쪽, 서쪽에 생길 것이다. 따라서 그림자는 태양이 뜬 이후 서쪽에서 형성되어 태양이 지구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움직임에 따라 서서히 서쪽에서 동쪽으로 움직일 것이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야기하는 시계방향이다. 바늘의 그림자가 지나는 곳에 새겨진 세로선, 즉 시각선을 읽으면 그때의 시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시각선의 간격이 문제이다. 앙부일구에서의 이 간격은 어떻게 이루어져 있을까? 자료를 참고하면 조선 후기의 앙부일구의 시각선은 15분 단위로 새겨져 있다. 이것은 조선이 그 당시 하루를 96각으로 정했기 때문이란다. 96각에서 8각씩 묶은 것이 조상들이 쓰던 하나의 시 개념이다. 즉 우리 조상들에게 하루는 12개의 시로 이뤄져 있었다. 지금 우리가 하루를 24시간으로 나누니 조상들에게 하나의 시는 지금의 두 개의 시와 같은 셈이다. 한편 하루(지금 우리가 쓰는 시간 개념대로라면) 24시간이 96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하나의 각은 지금의 15분인 것 또한 알 수 있다.



각과 태양의 운동을 연결하여 살펴보자. 지구가 자전함에 따라 태양은 마치 하루에 1바퀴씩 지구를 도는 것처럼 보인다. 1바퀴는 365도이므로 이를 하루 24시간으로 나누어주면 1시간에 태양은 약 15도를 움직이고 15분 동안에는 약 4도를 움직인다. 그러므로 태양이 움직이는 4도가 지면에 투영되어 하나의 각을 이루었을 것이다. 멋진 해시계의 완성이다.


그런데 조선의 해시계는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갔다. 태양은 하루 동안 동에서 떠서 일정한 경로를 통해 서로 진다. 그러나 이 경로는 날마다 달라진다. 이를 살펴보기 위하여 한 해를 이루는 24절기 중 동지, 춘분, 하지, 추분을 기준점으로 삼자. 각 절기의 태양 경로에는 큰 차이가 있다. 동지의 경우 태양이 떠있는 시간도 짧고 태양의 남중고도 또한 낮다. 반대로 하지의 경우에는 태양이 떠있는 시간이 가장 길고 태양의 남중고도는 최대를 이룬다.


앙부일구는 이러한 절기에 따른 태양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앙부일구 시반에 그려진 가로선(절기선)이 바로 그것을 반영한 결과이다. 하지 때에는 태양의 고도가 가장 높은 대신 그림자의 길이가 매우 짧다. 그러나 동지로 갈수록 그림자의 길이는 점점 길어진다. 다시 동지를 넘어서 하지로 올수록 다시 짧아진다. 이제 각 절기에 따라 태양 그림자 끝이 오는 곳에 절기선을 긋자. 앙부일구에는 이러한 절기선이 가로로 13개 그어져 있으며 사람들은 각각의 선에 12개씩 절기의 이름을 적어두었다. 아마 일 년 중 태양의 그림자는 절기선을 넘나들며 길다가 짧아지는 동작을 반복할 것이다. 하루의 시간과 날짜를 동시에 알 수 있다니! 요즘의 시계와 다를 바 없는 해시계의 자세함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실제로 절기선과 시간선이 동시에 나타나는 것은 우리나라 해시계만의 특징이라고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해시계는 다양한 모습으로 사용되었다. 앙부일구 외에도 조상들은 현주일구, 천평일구, 정남일구 등의 해시계를 만들었다. 그 중 특이한 것은 적도식 해시계인 현주일구와 천평일구이다. 적도식 해시계란 무엇일까? 위도에 따라 시계판이 기울어져 있는 해시계를 말한다. 그림자를 받는 면이 지표와 평행한 앙부일구를 보면 쉽게 그 차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현주일구와 천평일구는 전장과 같은 곳에서 사용하는 이동성 시계였기 때문에 이들 해시계에는 나침반이 함께 달려 있는 경우가 많았다.


정남일구는 이들보다 더욱 정밀한 시계이다. 나침반을 이용하여 방위를 알아야 설치하는 다른 해시계와 달리 정남일구는 나침반 없이도 남쪽을 정할 수 있는 시계였다. 정남일구는 니담(J. Needham)이 복원한 설계도를 통해 그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그 모습은 천문시계인 혼의와 비슷하다.


이렇게 우리 조상들의 해시계는 비교적 과학적으로 만들어졌지만 이 시계에도 문제점이 있었다. 날씨가 흐릴 때와 밤에 사용할 수 없다는 일반적인 불편함은 쉽게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외에도 옛날의 해시계는 제작자에 따라 시간이 조금씩 다르다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서양 속담에는 사람들마다 정오가 다르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점은 이 해시계가 진태양시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진태양시는 말 그대로 진짜 태양시이다. 이때의 하루는 태양의 움직임에 따른 정오에서 다음날 정오까지이다. 이것은 지구의 자전만을 염두에 둔 시간이다. 그러나 실제 지구는 자전함과 동시에 태양주위를 공전하기도 한다. 따라서 실제 정오가 되기 위해서는 지구가 하루에 공전하는 1도 정도를 더 자전해야 하는데 이 각도도 또한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진태양시는 매우 부정확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에는 진태양시가 아닌 평균태양시를 사용한다. 평균태양시는 이러한 지구 공전의 문제점을 보정한 가짜 태양시이다. 현대에 해시계를 사랑하여 실제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이러한 진태양시와 평균태양시의 문제를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평균태양시와 진태양시의 시간차인 균시차를 보정하여 만든 새로운 해시계를 사용한다. 이로써 현대인들은 조상들의 해시계보다 더 정확한 시계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우리 조상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아왔던 해시계.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에는 모양도 천차만별이고, 그 재료도 다양한 수많은 해시계 유물이 남아 있다. 소매에 넣고 다니는 해시계, 정원에 두는 고급 해시계, 부채 끝에 달린 장신구로서의 해시계 등등.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이렇게 시계를 사랑한 민족이 또 있을까? 점잖은 선비들이 소매에서 작은 해시계를 꺼내어 태양 그림자를 살폈을 것을 상상하면 생각보다 재미있다. 서양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시계를 찬 바쁜 토끼와 ‘에헴’ 큰기침하며 점잖게 시계를 보았을 우리 조상들이 비교되어 떠오르기도 한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지금 우리가 다시 해시계를 사용한다면 어떨까? 우선 시계에 밥 줄 필요가 없을 것이다. 또 과학 공부도 저절로 할 수 있겠다. 그저 묵묵히 태양 빛을 받아 그의 움직임만을 나타내고 있는 해시계를 통해 자연에 순응하는 법을 자연스레 배울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사람들의 마음도 더욱 여유롭고 넉넉해지겠지.

거기에 덧붙여 이기적인 생각 하나. 시험도 해시계로 치른다면? 내가 답안을 작성하기에 더 시간이 여유롭고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행여나 비 오는 날의 시험은 미뤄질 수도 있다는 것은 해시계가 주는 또 하나의 보너스일지도.



참고 자료



자영실과 자격루-조선시대 시간측정역사복원/남문현/서울대학교 출판부

한국의 물시계-자격루와 제어계측공학의 역사/남문현/건국대학교 출판부

한국 과학사/전상운/사이언스북스

조선의 과학문화재/서울역사박물관

세계 역사를 바꾼 100대 발명/Yenne, Bill/사민사

사진출처 서울문화재/© encyber.com

꿈꾸는 과학 이솔희
sll3ll@hanmail.net
저작권자 2006-06-22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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