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 주고 약 준다’는 속담이 있다. 피해를 입힌 후에 어루만지거나 도와준다는 말이다. 완전히 반대되는 행동이기 때문에 ‘그런 경우가 정말로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지만, 우리 주위를 돌아보면 의외로 속담과 비슷한 사례가 있음을 볼 수 있다.
대표적 사례로는 요즘 한창 전 세계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 바이러스를 꼽을 수 있다. 바이러스는 대부분 사람이나 가축에게 질병을 퍼뜨려 해로움을 안겨주지만, 때로는 암 같은 불치의 병을 치료하는 데 있어 도움을 주기도 한다.

바이러스에서 추출한 펩타이드를 췌장암 치료에 활용
‘구제역(Foot and Mouth Disease)’ 은 소나 사슴, 또는 양처럼 발굽이 있는 동물에게서 주로 발생하는 바이러스성 법정 전염병이다. 하지만 사람도 감염될 수 있는 인수 공통 감염병으로서, 특히 어린이는 감염될 가능성이 높다.
구제역에 가축이 감염되면 입술과 혀, 그리고 콧구멍 등에서 물집이 생기며 다리를 절고 침을 흘리게 된다. 동시에 식욕을 잃고 젖이 나오지 않게 되는데, 이후 24시간 안에 수포가 파열되며 궤양이 생기기도 한다. 치사율이 높게는 75%까지 나오는 치명적인 전염병이다.
이처럼 치명적 질병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를 췌장암 치료에 활용하고 있는 곳은 영국의 퀸메리 대학(Queen Mary University) 연구진이다. 췌장암은 5년 생존율이 10%에도 미치지 못하는 치명적인 암이다.
췌장암이 치명적인 이유는 우선 조기 진단이 어렵고, 주변 장기로 전이되는 경우가 많아서 완전 절제가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효과적인 항암제도 별로 없어서 췌장암은 여러 암들 중에서도 가장 치료가 어려운 암으로 알려져 있다.
퀸메리대에서 췌장암을 연구하던 ‘존 마셜(John Marshall)’ 교수와 연구진은 구제역 바이러스의 단백질에서 뽑아낸 펩타이드가 췌장암 세포를 집중적으로 찾아간다는 사실을 여러 실험을 통해 발견했다.

마셜 교수는 “췌장암 세포를 쫓아가는 펩타이드는 αvβ6이라는 이름의 단백질을 찾아가 결합하는 성질을 지녔는데, 이 단백질은 정상적인 췌장에는 거의 없는 단백질”이라고 언급하며 “반면에 αvβ6 단백질은 췌장암 세포 중에서 84% 정도에 존재할 정도로 널리 퍼져있다”라고 밝혔다.
연구진은 구제역 바이러스에서 추출한 펩타이드가 항암제를 전달하는 운반체로 사용할 수 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테스트를 진행했다. 연구진은 펩타이드에 함암제인 테시린(tesirine)을 탑재한 후 암이 발생한 췌장 부위에 주입했다.
그 결과 avβ6 단백질이 퍼져있는 췌장의 암세포가 효과적으로 파괴되는 것을 확인했다. 동물 실험에서 펩타이드를 주 3회 투여하자 암세포 성장이 멈추는 것을 확인했고, 항암제의 용량을 늘려 주 2회 투여하자 암세포가 사멸되는 것을 파악했다.
이 같은 결과에 대해 마셜 교수는 “αvβ6 단백질은 췌장에 문제가 없는 건강한 사람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이번 펩타이드 치료의 장점은 췌장암만 공격할 수 있다는 점”이라고 강조하면서 “좀 더 연구를 진행해야겠지만, 구제역 바이러스에서 추출한 펩타이드를 이용한 방법이 앞으로 췌장암 치료에 새로운 길을 제시해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뇌세포 감염하는 지카 바이러스는 뇌종양 치료에 활용
영국의 과학자들이 구제역 바이러스로 췌장암 치료 방법을 개발하고 있다면, 미국의 과학자들은 ‘지카(zika)’ 바이러스를 활용하여 뇌종양 치료와 관련된 프로젝트를 연구하고 있다.
지카 바이러스는 지난 2016년에 소두증을 가진 아기를 탄생시키는 원인으로 밝혀져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병원체다. 뇌세포에 감염을 일으켜 뇌가 정상적 기능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기 때문에 태어난 아기는 평생 장애를 갖고 살아야만 한다.
그런데 이 같은 지카 바이러스의 유해한 성능을 워싱턴 의대의 연구진은 전혀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았다. 자신들이 연구하고 있는 뇌종양 치료 방법 개발에 뇌세포를 감염시킬 수 있는 지카 바이러스의 능력을 주목한 것이다.
프로젝트 책임자인 워싱턴 의대의 ‘마이클 다이아몬드(Michael Diamond)’ 교수는 그동안 자신과 동료들이 연구하던 뇌종양 중에서도 가장 악성이라 할 수 있는 교모세포종(glioblastoma) 치료에 지카 바이러스를 이용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지금까지 교모세포종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외과적으로 종양을 최대로 제거한 후에 방사선 및 항암 치료를 진행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문제는 뇌라는 부위가 워낙 민감해서 외과적으로 절제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점이었다.
이에 대해 다이아몬드 교수는 “약물이나 방사선으로 대부분의 종양세포를 제거한다고 해도 남은 악성 종양세포가 증식하여 다시 재발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 문제였다”라고 밝히며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지카 바이러스를 활용하기로 결정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다이아몬드의 이 같은 발언은 연구진이 사전에 진행했던 테스트에서 바람직한 결과를 얻었기 때문이다. 지카 바이러스가 정상적인 뇌세포는 공격하지 않고 주로 악성 종양세포만 공격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
이에 따라 연구진은 항암 방사선 치료와 함께 지카 바이러스 요법을 사용하면 치료 효과를 더 높일 수 있다고 기대하고 있다. 실제로 뇌종양을 앓고 있는 쥐를 이용한 동물실험에서 식염수만 주사한 쥐보다 지카 바이러스 균주를 주입한 쥐의 생존 기간이 더 길고 종양의 크기도 더 작아지는 것을 확인했다.
- 김준래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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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 2020-03-10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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