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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응용과학
임동욱 객원편집위원
2015-03-24

‘돈키호테’ 작가 유골 발견되다 내년 서거 400주년 맞춰 공개 논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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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근대 소설로 평가받는 ‘돈키호테’의 작가 세르반테스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 시내에 위치한 프라도 미술관에서 500m도 떨어져 있지 않은 수녀원을 발굴하던 과정에서 총상을 맞은 가슴뼈와 이름이 새겨진 관 조각이 드러났다.

1547년에 태어난 세르반테스는 에스파냐 왕국의 군인으로 활약하다 1575년 해적에게 납치되었다. 마드리드의 삼위일체 수도원이 몸값의 일부를 내주면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기 때문에 1616년 사망 당시 유언에 따라 이 수도원에 묻혔다.

이후 1673년에 건물을 개축하면서 묘소의 행방이 묘연했다. 지난해 4월 시작된 발굴작업에서 다량의 유물과 유골이 발견되었고 적외선 카메라와 3D 스캐너를 이용한 분석에서 그 중 일부가 세르반테스의 것임이 밝혀졌다. 내년에 맞이하게 될 서거 400주년에 맞춰 일반에 개방한다는 계획도 세우는 중이다.

스페인 마드리드의 수녀원 지하에서 '돈키호테'의 작가 세르반테스의 유해와 이름이 새겨진 관 조각이 발견되었다.
스페인 마드리드의 수녀원 지하에서 '돈키호테'의 작가 세르반테스의 유해와 이름이 새겨진 관 조각이 발견되었다. ⓒ Sociedad Aranzadi

최초의 근대 소설 ‘재치있는 귀족 돈키호테 데 라만차’

이베리아 반도의 중심부에 위치한 마드리드에서 동남쪽으로 150km 가량 달려가면 ‘라만차(La Mancha)’라 불리는 비옥한 고원지대가 펼쳐진다. 바람이 많이 불어 옛날 방식의 풍차들이 아직도 곳곳에 세워져 있다. 소설 ‘돈키호테’ 속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된다.

몰락한 시골 귀족 알론소 키하노(Alonso Quijano)는 딱히 하는 일이 없어 책을 읽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이 취미다. 특히 기사를 다룬 소설을 좋아해서 집안일을 제쳐두고 물건을 팔아서 잔뜩 사들이고 읽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오십 줄에 접어든 그 시골 귀족은 기사소설에 대한 호기심과 광기가 지나치다 못해 급기야는 광활한 논밭을 팔기에 이르렀다. 덕분에 집안 가득 기사소설을 빼곡이 들여놓을 수 있었다. 그는 책을 읽는 데 너무나 열중한 나머지 결국은 이성을 잃어버리기에 이르렀다.”

소설 속 기사들처럼 자신도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적들의 목을 베고 사랑을 쟁취하는 도전적인 삶을 살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대대로 내려오던 낡은 무기들을 꺼내고 방금 모험길에서 돌아온 것처럼 깡마른 말을 한 마리 사서 ‘로시난테(Rocinante)’라 이름 붙인다. 스페인어로 ‘로신(rocin)’은 바싹 여위었다는 뜻이다.

기사에게는 그럴 듯한 이름도 필요했다. 자신의 성 ‘키하노’에 멋을 부려서 ‘키호테(Quixote)’라 고치고 존칭을 뜻하는 ‘돈(Don)’을 앞에 붙였다. 유랑 기사처럼 고향을 성 뒤에 붙여서 ‘돈키호테 데 라만차’라 불렀다.

기사에게는 지고지순의 사랑을 바칠 여인도 필요하다. 농사일을 하는 아리따운 동네 처녀 알돈사 로렌소(Aldonza Lorenzo)가 생각났다. 귀족은 감미롭다, 순수하다는 뜻을 가진 ‘둘시네아’라는 이름을 마음대로 정하고 동네 이름을 붙여서 ‘둘시네아 델 토보소(Dulcinea del Toboso)’라 부르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고향을 떠나 모험의 길에 나서게 된 귀족은 정신이상에 가까운 착각, 타협을 모르는 고집, 사랑과 명예에 대한 갈망 때문에 별 것 아닌 일에도 과도하게 반응하며 사건을 만들어냈다. 이것이 최초의 근대 소설이라 불리는 ‘재치있는 귀족 돈키호테 데 라만차(El Ingenioso Hidalgo Don Quijote de la Mancha)’다.

돈키호테는 중세 시대가 저물면서 낭만주의가 함께 사라져가는 시대적 배경을 그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상과 현실의 갈등 속에서 고민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린 것도 인기의 비결이다. 다른 작가의 책을 번역한 것이라는 작가의 고백을 소설 중간에 집어넣거나 등장인물들이 소설에 대해 논하는 장면이 들어가는 등 파격적인 형식도 당시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생계 위해 글 쓰다가 소설 ‘돈키호테’ 탄생

소설을 지은 사람은 마드리드 인근 태생의 미겔 데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다. 귀족 출신의 의사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가난 때문에 몇 차례나 이사를 다녀야 했다. 가족 중에 문학적 소양에 영향을 준 사람을 찾기는 어렵다.

성인이 되어서도 문필가가 아닌 군인의 직업을 가졌다. 22세가 되던 1569년에 추기경의 비서로 이탈리아까지 따라갔다가 자원 입대한 것이다. 1571년에는 스페인과 이탈리아 연합군이 투르크와 지중해에서 맞붙은 ‘레판토 해전(Battle of Lepanto)’에 참전했다가 3발의 총상을 당했다. 그 중 가슴에 맞은 두 발의 총알 때문에 평생 왼팔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

1575년 군대에서 퇴역해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돌아오는 배를 탔다. 그러나 지중해에서 해적의 습격을 받아 알제리로 끌려갔다. 이후 노예로 지내면서 탈출을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전부 실패해 고문과 형벌에 시달렸다. 마드리드의 부모와 삼위일체 수도회(Trinitarians)가 몸값을 지불한 덕분에 5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왼팔을 쓰지 못해 노동이 불가능하자 생계를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소설 ‘돈키호테’다. 1604년 12월 20일 왕실로부터 판매 허가증을 받아서 1605년 제1권이 출간되었고 1612년에는 영어로도 번역되었다. 1615년에는 제2권을 펴내 소설이 완성되었다.

엉뚱하고도 순수한 주인공의 매력 때문에 삽시간에 스페인 전역에서 인기를 누렸다. 국왕 펠리페 3세(Felipe III)는 수업시간 중에 시끄럽게 웃어대는 학생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 학생은 정신이 나갔거나 아니면 돈키호테 이야기를 읽고 있었을 것(Aquel estudiante, o esta fuera de si, o lee la historia de Don Quijote)”이라 말하기도 했다.

세르반테스는 셰익스피어보다 하루 이른 1616년 4월 22일에 사망했고 다음날 유언에 따라 마드리드에 위치한 ‘맨발의 삼위일체 수녀원(Convento de las Monjas Trinitarias Descalzas)’ 내 산 일데폰소(San Ildefonso) 교회에 안치되었다. 프라도 국립미술관에서 500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다.

그러나 1673년 수녀원을 증축하는 과정에서 묘소가 사라졌다. 일부 시신이 새로 지어진 교회로 옮겨졌지만 그 중에서 세르반테스의 유해가 포함되었는지 불분명했기 때문이다.

이후 마드리드 시에서는 시내의 에스파냐 광장(Plaza de España)에 1834년 세르반테스의 동상을 세웠다. 2009년 말 광장 개선 공사 중 동상 아래에서 소설 ‘돈키호테’의 1819년 판본 다섯 권이 발견되어 ‘세르반테스의 타임 캡슐’이라 불렸다.

세르반테스의 묘소 위치가 불분명해 1834년 마드리드 시는 에스파냐 광장의 돈키호테 동상 아래에 타임캡슐을 묻었다.  ⓒ ScienceTimes
세르반테스의 묘소 위치가 불분명해 1834년 마드리드 시는 에스파냐 광장의 돈키호테 동상 아래에 타임캡슐을 묻었다. ⓒ Wikipedia

지난 4월 발굴 시작해 1년만에 유해 발견

관심이 집중되자 마드리드 시는 지난해 4월 세르반테스의 묘소를 찾기 위한 발굴 자금을 지원했다. 첫 해에만 1만2000 유로(약 1500만 원)가 투입되었으며 향후 4년 동안 총 10만 유로(약 1억2000만 원)을 지원할 예정이었다.

문화재로 지정된 수녀원 건물에 손상을 입히지 않으면서 세르반테스의 유해를 구별해내려면 과학적인 조사기법을 동원해야 했다. 30여 명의 연구원으로 구성된 조사팀은 적외선 카메라, 지표투과레이더(GPR), 3D 스캐너, 방사능 측정기 등을 동원해 교회 터 아래를 살펴보았고 숨겨진 지하묘지를 찾아냈다.

지하묘지는 총 3개 지층에 240구의 시신이 매장되어 있었다. 대부분 18~19세기에 사망한 아이들이었다. 발굴이 시작된지 8개월이 지난 1월, 그보다 더 파내려간 지하 1.4미터의 지층에서 벽을 파들어가며 만든 33개의 관 자리가 발견되었다. 함께 출토된 17세기 로마가톨릭 방식의 관 조각에는 ‘M.C.’라는 쇠장식이 붙어 있었다.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약자로 추정되는 부분이다.

발굴 1주년이 다 되어가는 이달에는 주변 토양에서 여러 구의 유해를 발견했다. 그 중에는 총에 맞은 듯한 자국이 있는 가슴뼈와 정상적이지 않은 왼팔 뼈도 있었다. 레판토 해전에 참전했다가 부상을 당한 세르반테스의 신체 조건과 일치하는 증거들이다.

조사팀은 지난 17일 세르반테스의 유해를 발견한 것으로 공식 발표했다. 유전자 감식을 추가로 진행할 예정이지만 살아 있는 후손이 없어 성공은 불투명하다. 서거 400주년 기념식이 열리는 내년에 유해와 묘소를 일반에 공개하려는 움직임이 있지만 마드리드 시 의회와 수녀원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임동욱 객원편집위원
im.dong.uk@gmail.com
저작권자 2015-03-24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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