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문화예술의 전당은 지난 14일부터 17일까지 개관 1주년을 맞이하여 전당과 대전광역시연극협회가 공동 제작한 브레히트의 연극 <갈릴레오 갈릴레이>(원제 : 갈릴레이의 생애)를 무대에 올렸다.
이번 작품은 ‘과학의 도시’를 표방하고 있는 대전시의 이미지를 더욱더 발전시키고, 대전지역 연극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려는 목적으로 기획되었다.
대전시와 전당은 이번 공연을 시작으로 대전시를 대표하는 연극으로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발전시킬 계획이라고 한다.
세계적 문호인 베르롤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1956)는 독일 바이에른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한 제지공장 직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16세부터 시와 평론을 써 오던 그는 1918년 처녀작 <바알 신 Baal>을 발표했으며, 반전적이며 비사회적 경향을 보이는 많은 글들을 출판했다.
그 후 그는 제대군인의 혁명 체험의 좌절을 묘사한 <밤의 북소리 Trommeln in der Nacht>(1922)로 클라이스트상(賞)을 수상했다.
브레히트는 1920년대 후반부터 마르크스주의를 가까이하면서 교화(敎化)를 목적으로 하는 교육극과 고리키의 작품을 각색한 <어머니 Die Mutter>(1930) 등 다수의 작품을 쓰는 등 자신의 작품세계를 발전시켰다.
그리고 인류 최초로 원자핵 분열이 이루어진 해인 1938년에 이번에 공연된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생애 Das Leben des Galileo Galilei>(1943)가 세상에 나왔다.
브레히트는 기존의 세계를 부정하는 표현주의 기법을 발전시켜 자신만의 독자적인 이론인 ‘서사극’과 ‘소외효과’를 도입하면서, 현대 연극이론과 연극사에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했다.
이번 작품의 연출을 맡은 한남대학교 유럽어문학부 송전 교수는 앞선 브레히트의 특징과 더불어 관람객에게 재미와 교훈을 함께 선사하는 ‘노래와 율동’을 새롭게 도입했다.
먼저 송전 교수는 연극 전체의 결말보다 각 장면의 긴장감을 높이는 서사극 형식을 도입했고, 관객이 연극의 장면들에 몰입하기보다 일정한 거리를 두어 관객의 객관적 판단을 높이는 소외효과를 이용했다.
마지막으로 원전의 많은 부분이 대폭 줄여져서 발생하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이번 공연에 음악과 율동이 최대한 이용되었다. 관람객은 음악과 율동을 함께 하면서, 극의 재미와 교훈뿐만 아니라 관람객의 과학적 상상력을 통하여 미쳐 극화되지 못한 원전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
이번 작품은 크게 13장으로 구성되었다. 먼저 제1장, 이탈리아 파두아의 누추한 서재에서 중년의 갈릴레이(Galilei, Galileo, 1564~1642)가 가정부의 열살 난 아들 안드레아를 상대로 지동설을 설명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갈릴레이는 이 곳에서 ‘연구의 자유가 보장된 베니스지만, 연구지원이 거의 없는 자신의 연구 환경을 바꾸려는 생각’으로 가득하다.
갈릴레이는 홀란드 산 망원경을 개량하여 자신의 발명품인 것처럼 베니스 공화국에 증정하여 봉급인상 소망을 이룬다. 그는 권력자를 속여먹은 고소한 마음으로 망원경을 가지고 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사이에, 이사장이 찾아와 망원경 사건에 대해서 갈릴레이에게 분노를 터뜨린다.
갈릴레이는 보다 나은 환경을 위해서 종교권력이 지배하는 플로렌스 행을 결심하고, 그 곳에서 메디치 가문과 관계를 맺게 된다. 플로렌스로 옮겨간 갈릴레이는 왕의 일행을 집으로 초대하여 자신의 천문학적 발견을 소개하지만, 이들은 기존의 학설에 집착하여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온 도시가 페스트 공포로 창궐한 곳에서 갈릴레이는 가족만을 대피시킨 채 지동설 연구에 필사의 노력을 다한다.
1616년 로마 바티칸 내 콜레기움 로마눔 연구소는 지동설에 입각한 갈릴레이 학설의 진위 판정을 시도한다. 결국 천문학자 신부 클라비우스가 ‘갈릴레이의 주장이 옮다’고 인정하여, 갈릴레이는 ‘이성의 승리’라고 환호한다. 그러나 교회의 강경 보수세력들은 갈릴레이를 위험인물로 겨냥한다.
1616년 3월 5일 사회적 저명인사가 된 갈릴레이는 추기경 벨라르민 저택의 가면무도회에 초대받는다. 이 자리에서 추기경은 교황청 최고회의에서 코페르니쿠스 지동설 연구금지조치가 내려졌다고 통고하고 갈릴레이에게 경고한다. 이후 지동설은 종교재판소의 금서목록에 등재된다.
거리의 악사들이 ‘갈릴레이의 지동설’을 노래로 부르고, 그 사이에 새로운 학설은 세상에 널리 퍼져있음이 드러난다. 그리고 종교권력의 와해 징조가 나타나고 있음이 카니발 축제행렬로 재현된다.
또한 종교재판소에서 종교재판관 추기경과 교황의 논쟁은 이중무대를 통해서 극의 묘미를 더해준다. 교황은 갈릴레이의 학설을 인정하고 그를 최고의 과학자라고 칭송하지만, 종교재판장은 신앙의 약화와 교회권위의 실추를 이유로 학설인정을 거부한다.
1633년 6월 22일 초췌해진 갈릴레이는 결국 종교권력에 굴복하여 종교재판정에서 “피렌체의 수학 및 물리학 교수인 나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태양이 세계의 중심으로 한 지점에 붙박혀 있으며, 지구는 중심도 아니고 붙박이도 아니라는 본인의 지금까지 학설을 맹세코 부인합니다.
본인은 진심으로 이 모든 오류와 이단 행위를, 요컨대 교회를 거역하는 일체의 다른 오류와 다른 의견을 부인하고 저주합니다”고 자신의 지동설을 철회한다.
갈릴레이는 지동설을 부인함으로 써 한 개인의 저항이 커다란 역사적 격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게 된다. 이에 대해서 그는 자신의 제자 안드레이에게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만약 저항했더라면 자연과학자들도 의사들의 히포크라테스 선서 같은 것을 발전시킬 수 있었을 테지. 자신들의 지식을 오로지 인류의 복지를 위해서만 적용한다는 맹세 말일세!” 그러나 갈릴레이는 자신의 의견을 강력하게 주장하기보다 편안한 환경에서 더욱더 많은 연구를 위한 발판을 추구했다.
이후 갈릴레이의 종교재판은 세계의 진실을 알리는 학문이 세상과 사람을 지배하는 권위에 굴복한 상징적 사건으로 인식되었다.
이번 공연의 무대미술을 맡은 상명대학교 오윤균 교수는 13장이나 되는 많은 장면들을 회전무대와 이중무대를 통하여 큰 무리 없이 진행했고, 영상과 소품 등을 이용하여 17세기 이탈리아의 모습을 단순하면서 간결하게 선보였다.
또한 갈릴레이가 망원경을 통하여 바라본 우주의 모습들이 영상을 이용하여 무대에 재연되어서 관람객이 우주의 한복판에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브레히트는 미국 망명생활 중 원자핵 발견 사건과 일본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참상을 접한 후에 이 글을 썼다. 마지막 장면에서 갈릴레이가 그의 제자 안드레이에게 유폐 기간 중 그의 모든 지식을 담은 <대화>를 건네주면서 과학자의 사회적 소명과 존재이유에 대해서 깊은 대화를 나눈 것처럼, 이 극은 과학자의 직업윤리와 존재의의에 대해서 완강하게 말하고 있다.
이번 공연에 정치, 경제, 과학계의 주요인사들이 ‘카메오’로 출연하는 등 각계의 관심이 높았다. 이와 같은 관심과 함께 앞으로 예술인들이 모든 것을 하기보다 예술인과 과학인이 함께 하는 장을 만들었으면 한다
. 과학인이 공연을 관람한 후 극에 대한 비판만을 하기보다 과학적 내용들을 쉽고 재미있게 구성하는 역할을 함께 한다면, 예술인은 이를 바탕으로 예술적으로 승화시키는데 더욱더 많은 노력을 기울일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 초연되는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계기로 앞으로 많은 과학극 등이 공연되어서, 청소년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과학과 과학자의 위상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예술과 과학이 함께 하는 기회를 맛보았으면 한다.
- 공채영 객원기자
- 저작권자 2004-10-25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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