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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4-12

종이만들기 38년 ... 중성초지 자체 개발 강 홍 한국펄프종이공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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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봉 객원기자] 인간 생활에 필수적인 종이를 한국이 엄청나게 많이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한국제지공업연합회에 따르면 한국은 2002년 981만2천톤의 종이를 생산했다. 미국, 중국, 일본, 캐나다, 독일, 핀란드, 스웨덴에 이어 세계 8위의 종이 생산국이다.


지난해에는 1,015만9천톤의 종이를 생산해 이중 약 4분의 1을 수출했는데 해마다 수출량이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펄프 원료가 전혀 안 나는 나라에서 기적을 이룬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던 것일까.


이에 대해 원로기술인(STL) 클럽 회원인 강 홍 한국펄프종이공학회장(63, 한국제지 前부회장)은 기술력 때문이라고 말한다. “한국인의 매운 손맛이 세계 최고수준의 제지 기술을 성취했다”는 것이다. 60년대 그야말로 아무 것도 없는 상황에서 알려지지 않은 기술자들이 각고의 노력을 통해 한국을 제지 선진국으로 올려놓았다는 설명이다.



60년대 한국 제지기술은 기능공의 수준

신입사원 교육 없이 기술개발 업무 맡아


강 씨가 제지업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66년 봄 서울공대 화공과를 졸업한 직후였다. 친구의 권유로 무림제지서 일을 하게 되는데 입사해보니 공장 상황은 기대 이하였다. 무림제지는 한국전쟁 이후 UN 원조자금으로 이탈리아 코메리오(Comerio)사에서 장망초지기 1대를 가지고 연 9,000톤의 모조지를 생산하고 있었는데 일제시대로부터 물려받은 단순한 기계 작동방식 외에는 기술 축적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회사에서는 강 씨에게 품질관리와 기술개발 업무를 맡기고 크게 기대하는 눈치였으나 어느 누구로부터 체계적인 교육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모든 것을 스스로 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던 중 1972년 강 씨에게 모처럼 새로운 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UN이 개발도상국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UNDP/SIDA 연수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취득한 것이다.


스웨덴에서 6주간의 이론교육과 6주간의 현장실습으로 3개월간 진행된 이 연수 프로그램은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강 씨에게 귀중한 시간을 부여한다. 일류 교수진들이 동원돼 제지공학에 대한 첨단 기술을 체계적으로 가르친 결과였다. 강 씨는 이 교육을 통해 제지기술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된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 한국 제지산업에 있어 기록될 획기적인 일들을 하나하나 수행하게 된다.



78년 동양 최초의 플라스틱 초지기 개발

일본에서는 실패부담으로 기술개발 못해


강 씨가 제지 기술 개발에 성과를 거두기 시작한 것은 한국제지로 일터을 옮기고 나서부터였다. 당시 제지업계 기술 선도업체라고 할 수 있었던 한국제지는 작고한 단사천 회장의 방침에 따라 기술개발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아낌없는 투자를 시도하고 있었다. 강 씨는 이 같은 회사 풍토에 따라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었다.


여러 가지 일을 했지만 그 중에서 가장 획기적인 일은 국내 순수 기술만을 가지고 당시 세계적인 첨단 장비였던 플라스틱 초지기를 개발한 일이다. 초지기란 종이재료를 걸러내 압착, 건조시키는 장비를 말한다. 70년대 중반까지 국내에서는 이전부터 사용해오던 황동선 초지기(Bronze Wire)만을 갖고 종이를 생산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초지기는 제조공정상 문제가 많아 좋은 품질의 종이를 생산할 수 없었다.


그러나 외국에서 플라스틱 초지기(Plastic Wire)를 갖고 고품질 종이를 생산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강 씨는 회사의 허락을 받고 1976년부터 기술개발에 착수, 3년만인 1978년 한국 은 물론 동양 최초로 선진국 형 플라스틱 초지기를 완성하는 성과를 거두게 된다.


신기술 개발의 성과는 놀라웠다. 이 초지기로 인해 한국제지의 생산성이 급격히 높아진 것이다. 좋은 품질의 종이를 싼 값에 생산하면서 또한 다양한 특수용지를 생산할 수 있었다. 한국제지는 1호 초지기에 이어 곧 2호 초지기를 설치하고 생산량을 확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한국제지가 한동안 국내 제지업계 선두의 자리를 이어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당시 이 기술은 실패 부담 때문에 일본조차 엄두를 못 내던 것이었다. 그 기술을 자신의 기술전수국인 한국이 개발했으니 일본 제지업계가 충격을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마디로 한국 제지업계가 자존심을 갖추고 세계 시장에 뛰어든 획기적인 기술개발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국내 최초로 ‘중성초지’ 자체 개발해 품질 혁신

“진정한 엔지니어는 도전정신 창의력 겸비해야”


플라스틱 초지기 개발로 시작된 강 씨의 기술개발은 이어서 중성초지 생산기술로 이어진다. 당시 안양에 공장이 있었던 한국제지는 공장폐수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제지공장에서 안양천으로 흘러드는 폐수가 펄프 사용량에 100배에 달해 주변으로부터 환경오염의 주범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었다.


때문에 공장 책임을 맡은 강 씨는 폐수를 줄이는 방법으로 중성초지 개발에 나선다. 중성초지를 생산할 경우 폐수를 5분의 1로 줄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초지 생산과정에서 여러 가지 원료를 투입, 거의 4년간 초지를 중성화하는 실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1982년 마침내 국내 최초로 중성초지 생산에 성공한다.


이 때까지 국내 제지업계에서는 산성초지만을 생산하고 있었다. 그러나 산성초지는 엄청난 폐수를 배출하는데다 종이를 생산해도 오래 동안 보존할 수 없는 결점을 안고 있었다. 강 씨가 중성초지를 개발함으로써 한국제지는 수돗물 사용료와 폐수 처리 비용을 5분의 1로 줄이는 것은 물론 시장에서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는 종이를 생산하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중성초지 개발은 다른 국내 기업들이 90년 들어 도입할 수 있을 정도로 첨단 기술이었다.


강 씨는 이후 두 번째 중성초지기에 양면 코팅 방식을 적용, 경량 아트지 생산에 성공한다. 그리고 1987년 한국제지 온산공장 건설단장으로 임명돼 1년만에 연산 12만톤의 자동제어 고속 쌍망초지기 설치함으로써 한국 제지기술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올려놓는 일을 수행한다. 특히 이 기술은 기본 설계서부터 상세 설계에 이르기까지 모든 엔지니어링을 자체 기술로 소화해냄으로써 90년대 이후 한국 제지업계의 독자 엔지니어링 선례가 되었다.


후배들에 대한 조언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강 씨는 자신의 지난 성공이 하루 아침에 운이 좋아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면서 “진정한 엔지니어는 항상 도전정신과 창의력을 겸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무엇보다 엔지니어는 문제 해결능력을 갖추어야 한다”며 끊임없이 연구하는 자세를 갖추도록 충고했다.


1941년 대구에서 출생한 강 씨는 경북대 사대부고, 서울대 화공과를 졸업한 후 무림제지 가공부장, 한국제지 부회장, JJ엔지니어링 대표이사, 용인 송담대학교 제지공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펄프종이공학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원로기술인(STL) 클럽 회원으로 기업을 대상으로 활발한 자문활동을 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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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자 2004-04-12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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