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장춘 박사가 국내에서 씨 없는 수박의 시연회를 연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일본에서 귀국한 후 우 박사는 한국 농민들을 위해 무, 배추 등의 우량 종자를 개발해 보급했다. 그러나 농민들은 국내에서 개발된 종자들을 사용했다가 농사를 망칠 수도 있다는 염려에서 일본의 종자만을 고집했다. 당시만 해도 국내 기술에 대한 믿음이 없었던 것이다.
농민들에게 뿌리박힌 이 같은 불신을 없애기 위해 우 박사가 아이디어를 낸 것이 바로 씨 없는 수박이었다. 우 박사의 예상대로 씨 없는 수박에 대한 소식이 알려지자 농민들의 국내 육종 기술에 대한 고정 관념이 바뀌어, 이후부터는 국내산 종자를 파종하기 시작했다. 즉, 우 박사가 씨 없는 수박을 만들어 보인 것은 농민들을 위한 이벤트였던 셈이다.
하지만 정작 씨 없는 수박은 그리 인기를 끌지 못했다. 씨가 없어 먹기는 편했지만 당도가 낮아 맛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수확기도 늦고 값이 비싸 소비자들이 찾지 않았다. 값이 비싼 이유는 종묘장에서 유전자 처리법에 의해 교배시킨 수박 묘를 농민들이 구입해야 했으며, 씨앗이 기형이라 바로 심으면 실패율도 높았던 것이다.
씨 없는 수박이 만들어지는 과학적 원리를 알면 더 자세히 이해할 수 있다. 보통 생물의 염색체는 항상 쌍으로 존재하는 2배체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세포 분열 단계에서 콜히친이라는 약품 처리를 하면 염색체 수가 배로 증가해 4배체 식물을 얻을 수 있다.
이 4배체 식물을 정상적인 2배체 식물과 교배시키면 홀수 염색체를 가진 3배체 식물이 탄생한다. 이처럼 3배체로 만들어진 식물에서 씨앗을 얻어 2배체의 수박꽃과 다시 교배시키면 씨 없는 수박이 열리게 된다.
이 같은 3배체 식물을 처음으로 만든 사람은 1936년 미국의 유전학자 블레이크슬리와 애버리다. 그들은 세포 분열 단계에서 콜히친을 이용해 염색체 간의 분열을 억제함으로써 자유롭게 식물의 배수체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들은 왜 그런 결과가 일어나는지에 대한 과학적 원리는 밝혀내지 못했다.
현존하는 종을 실험을 통해 최초로 합성
그 이유에 대해 이론적으로 규명한 이가 바로 우장춘 박사다. 도쿄제국대학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은 ‘종의 합성’이라는 논문에서 그는 현존하는 종을 재료로 하여 또 다른 종을 실험적으로 합성할 수 있음을 입증한 것.
배추와 양배추의 교잡을 통해 이미 존재하는 유채를 인위적으로 만들고 그 과정을 유전학적으로 규명함으로써 종간잡종과 종의 합성이 실제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이를 보다 쉽게 설명하면 염색체 수가 10개인 일본 재래종 배추와 염색체 9개의 양배추를 교배해서 염색체 19개의 고유 유채를 만드는 방식이다.
이는 현존하는 식물을 실험을 통해 합성한 최초의 예로 알려져 있으며, 이 과정에서 제시한 배추, 양배추, 유채의 게놈 구성의 상호 관계를 ‘우장춘의 트라이앵글’이라 부른다. 종의 합성을 실증한 그의 이론은 세계 육종학 교과서에서도 인용될 정도였다.
씨 없는 수박을 최초로 만든 사람은 기하라 히토시 박사이지만, 그 과정에서 우장춘 박사의 ‘종의 합성’이론을 참고했으므로 엄밀히 말하자면 우 박사도 씨 없는 수박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초기 연구 과제였던 나팔꽃이나 페튜니아에 연구도 세계적으로 주목을 끌었다. 1927년 ‘일본유전학’ 잡지에 게재된 ‘종자로서 감별할 수 있는 나팔꽃 품종의 특성에 대해’라는 논문은 그의 첫 번째 연구논문이었다. 이후 우 박사는 나팔꽃의 변이, 자가불온성, 돌연변이 등 화훼의 유전연구에 골몰했다.
특히 100% 겹꽃이 피는 페튜니아 종자는 그가 가장 먼저 개발한 것으로 유명하다. 정원용이나 장식용으로 많이 재배되던 페튜니아의 홑꽃은 포기가 작고 볼품이 별로 없다. 이에 비해 겹꽃은 크게 화려하며 색깔이 다양하지만 단점이 하나 있었다. 페튜니아의 절반 정도에서만 겹꽃이 핀다는 것이다.
우 박사는 교잡채종의 원리를 도입해 모든 페튜니아에서 겹꽃을 피게 하는 데 성공했는데, 그의 신종 씨앗을 취급한 사카다라는 종자회사는 큰 수익을 올린 것으로 전해진다.
육종학 분야에서 수많은 후학을 양성해
이렇게 볼 때 우 박사의 과학적 업적은 크게 두 단계의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일본에서 유전육종학에 대해 학문적으로 세계적인 성과를 거둔 시기다. 두 번째는 우리나라에서 육종기술의 기반을 마련하고 이를 통해 우량종자의 확보 및 보급을 위해 노력한 시기다.
일본 종묘회사에서의 근무 및 개인 농장을 경영하던 시절은 이 두 단계의 중간에 해당하는 전환기와 준비기의 성격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일본에서 귀국한 후 그가 연구 활동을 계속 이어가지 못했다는 점은 약간 아쉬운 부분이지만, 우리나라에서 그의 활동은 육종학을 시작하고 그 기반을 세우는 일에 중요한 기여를 한 개척자로서의 가치와 의미를 지닌다.
그가 남긴 또 하나의 공헌은 육종학 분야에서 수많은 후학을 양성했다는 점이다. 그는 종자 개량 및 육종 연구를 담당할 원예시험장을 창설했는데, 당시 그의 지도 아래 활동했던 사람만 해도 40명 정도였다. 이처럼 우수한 젊은이들이 그에게 최신의 유전육종 및 종자개량에 대해 배우며 학문적 기초를 다졌으며, 국가연구소 및 민간 종묘회사에 진출해 우리나라 원예학과 육종기술의 급속한 발전을 이루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우 박사는 벼의 품종 개량에 대한 독창적인 연구를 막 시작한 1959년 여름 갑자기 앓아누웠다. 병명은 위십이지장궤양이었는데, 조국에 돌아온 지 9년 5개월 만인 그해 8월 10일 눈을 감았다. 장례는 윤일선을 위원장으로 하는 사회장으로 치러졌으며, 유해는 농촌진흥청 구내의 여기산에 안장됐다. 그의 묘비에는 시조작가 노산 이은상의 추모시가 새겨졌다.
일본인 이름을 얻었음에도 한국식 이름을 버리지 않았던 그는 한국을 ‘아버지의 나라’라고 부르며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려고 누구보다 노력한 것으로 전해진다. 결국 죽기 직전 병석에서 그는 정부로부터 문화포장을 받고 “조국은 나를 인정했다”며 눈물을 흘렸다. 지금도 그의 기일인 매년 8월 10일이 되면 후학들과 전국의 원예인들이 모여 그를 추모하는 행사를 올리고 있다.
- 이성규 객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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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 2014-07-02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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