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된 이공계 대학원의 시발점

[되돌아본 과학기술 50년] 과학기술 50년 (5) 카이스트의 설립

카이스트(KAIST)는 우리나라 이공계 대학원 교육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키는데 가장 선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고 많은 사람들이 평가한다.

1969년 초 미국 리처드 닉슨 대통령 시절, 존 한나(John A. Hannah) 미시건주립대 총장은 국무성 국제개발처(USAID)처장으로 부임했다. 그는 친분이 있는 정근모 박사(당시 뉴욕공과대학 교수)를 불러 “개발도상국들에 대해 무상원조를 지양하고 교육기관 육성투자로 바꾸겠으니 아이디어가 있으면 달라”고 요청했다.

정 박사는 “한국 실정에 맞는 특수 이공계 대학원 건립이 필요하다”고 말하자, 한나 박사는 바로 보고서를 작성할 것을 요구했다. 이 보고서는 귀국하는 이경서 박사를 통해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초대 소장이었던 최형섭 박사와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 연두계획에 ‘이공계 특수대학원 설립’에 관한 건을 발표했다. 그리고 4월 8일 특수대학원 설립안은 경제동향 보고회의에서 박 대통령에게 최종 보고됐다.

‘이공계 특수 대학원’ 필요성 절감 

그러나 당시 문교부 장관이었던 홍종철 씨가 강력하게 반대를 하는 바람에 박정희 대통령은 이 일을 과기처 소관사업으로 이관해버렸다. 1970년 7월16일에 “한국과학원 설립법”이 국회에서 통과됐으니, 얼마나 빠르게 진행됐는지 알 수 있다. 존 한나는 우리 정부가 카이스트 설립에 필요한 교육차관 450만 달러를 요청하자, 600만 달러로 고쳐 제출하라고 할 만큼 정성을 기울였다.

1975년 열린 1회 석사학위수여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축사를 하고 있다. ⓒ카이스트

1975년 열린 1회 석사학위수여식 ⓒ카이스트

초대 원장으로 이상수 박사가 임명되고, 부원장으로 31세인 정근모 박사가 임명돼 귀국했다. 그리고 마침내 카이스트는 1973년에 첫 학생을 선발해서, 1975년 8월 20일에 92명의 석사를 배출했다.

카이스트가 단시간에 우리나라 최고의 이공계 대학원으로 우뚝 선 것은 미국의 교육 지원 못지 않게, 우리나라 정부의 정책적인 인센티브가 매우 강력하게 작용했다.

카이스트 1회 입학생으로 들어와 카이스트 교수로 정년퇴직한 최병규 박사는 “카이스트 입학은 모든 이공계 대학생의 일치된 목표였다”고 회상했다. 1970년대 들어 대학가는 박정희 대통령의 강력한 통치에 대한 시위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1년 10월 위수령을 발동하고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성균관대 경희대 서강대 외국어대에 군대를 진주시켰다. 이와 동시에 서울상대 전남대에 무기한 휴업령이 내려지자, 다른 대학들도 자체 휴강에 들어가 서울 대학가는 거의 문을 닫아버렸다.

유신통치 시절 ‘군대면제’ 특혜로 우수인력 끌어모아

바로 이때 숨통을 틔워준 것이 바로 카이스트 대학원 신입생 모집이었다. 당시 대학생은 예외없이 군대를 가야 하는 시절이었다. 카이스트 대학원은 우수한 학생을 끌어 모으기 위해 ‘군대면제’라는, 당시로서는 거의 상상도 하기 어려운 강력한 특혜조치를 발휘했다. 군대를 가지 않는 학교라는 소문이 나면서 전국에서 실력이 매우 뛰어난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최 교수는 “독재정권에서 군대를 면제받는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서울대 69학번인 최 교수는 2달 동안 집중 공부해서 73년에 산업공학과 1회 입학생으로 들어왔다. 당시는 한국과학원(KAIS)라는 이름의 대학원 과정으로 7개 학과가 설립됐다.

대덕연구단지에서 기공식을 갖는 카이스트 ⓒ 카이스트

1987년 열린 대덕연구단지 카이스트 캠퍼스 기공식  ⓒ 카이스트

서울 홍릉의 한국과학원 캠퍼스는 제대로 된 건물도 없어서 기숙사 건물에 사무실을 만들고 학사업무를 진행했다. 첫 학기는 놀고 73년 가을부터 수업이 시작됐다.

최 교수는 “당시 우리나라에 석사과정 학생을 양성하기 위해 학생들을 모아놓고 수업하기는 과학원이 처음이었다. 우리나라 대학교육에 엄청난 충격을 준 대학원 교육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카이스트에 이어 서울대를 비롯한 다른 대학들도 제대로 된 대학원 교육프로그램을 경쟁적으로 도입했으니, 카이스트가 우리나라 이공계 대학에 가져온 충격은 대단한 것이었다.

제대로 된 대학원 교육에 대한 소식은 고 이휘소 박사도 움직이게 했다. 정근모 박사와 친분이 있는 이 박사는 카이스트에 합류하기 위해 귀국하려다가, 1972년 10월 유신이 발표되면서 포기했다. 유신에 반대한 이휘소 박사가 귀국하지 못한 것은 지금도 안타까운 일이다.

카이스트 도서관 앞에 세워진 장영실 동상 ⓒ 심재율 / ScienceTimes

카이스트 도서관 앞에 세워진 장영실 동상 ⓒ 심재율 / ScienceTimes

그 뒤로 카이스트는 나날이 발전했다. 현재 캠퍼스는 대전 유성구 대학로를 비롯해서 서울캠퍼스(서울 동대문구 회기로 85), 문지캠퍼스(대전시 유성구 문지로 193) 도곡캠퍼스(서울시 강남구 논현로 28길 25)등이 있다. 학생 수는 학부 4,047명 (2013) 대학원생 6,202명 (2013) 교수 1,140명(2013)으로 늘어났다. 달리 미래창조과학부 산하 기타공공기관으로 지정되어 있는 특수대학교이다.

카이스트는 한국과학기술원법에 따라 교육부와는 독립적으로 운영된다. 전공을 선택하지 않은 채 입학해, 1년차 2학기 말에 학과를 결정한다. 조기졸업제도를 둬서, 일정 학점 이상 이수하면 빨리 졸업도 가능하다. 박사과정으로 국비장학생 또는 카이스트 장학생으로 입학하면 별도의 시험이 없이 전문연구요원으로 편입되어 박사과정을 하면서 병역해결이 가능하다.

‘국가에 무슨 도움이 될까’ 항상 고민 

카이스트는 대한민국 정부의 특혜와 관심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교직원들은 끊임없이 국가에 도움이 되는 일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면서 새로운 시도를 한다. 기존 관행에서 크게 탈피해서 국제화를 이루려는 노력으로 로버트 러플린 총장(2004~2006년 재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연달아 3번에 걸쳐 외국 국적자를 총장으로 임명한 것도 이같은 노력의 하나이다.

그런 고민에 대해 외부에서도 공감을 표시해서 미래산업을 창업한 정문술 회장은 “우리나라가 발전하는데 필요한 미래전략을 연구해 달라”면서 카이스트에 조건없이 515억원을 기부해서 미래전략대학원을 설립하는 등 많은 후원자들이 카이스트 대학에 힘을 보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이스트는 해결할 과제가 남아 있다. 주인없는 대학, 주인의식이 희박한 대학이라는 약점을 극복해야 한다.

카이스트는 설립이후 약 20년 동안 이공계 교육을 발전시키는 기관차 역할을 했지만, 병역면제 조치가 다양한 분야로 확대되면서 최고 인재를 영입하는 유일한 기관의 역할은 크게 줄었다. 게다가 대덕캠퍼스로 이전한 것은 학생 및 교수 모집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포기하는 효과를 냈다.

카이스트 정문 ⓒ 심재율 / ScienceTimes

카이스트 정문 ⓒ 심재율 / ScienceTimes

2002년 히딩크 감독이 우리나라 축구를 월드컵 4강으로 올려놓으면서 시작된 외국인 총장 임명도 이제는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카이스트 내부에서는 외국인 총장에 대한 평가가 호의적이지만은 않다.

책임의식은 없으면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이사회 구성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총장 선임 등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리는 이사회는 대학운영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다가, 호텔에 잠깐 모여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기본적으로 정부의 입김이 강하게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는 구조이다.

<카이스트 연표>

▲ 1971년 2월, 한국과학원법에 따라 홍릉에 한국과학원(Korea Advanced Institute of Science, KAIS)이 설립, 석박사 과정만 개설▲1973년 3월, 제1회 석사과정 입학식. 6개 학과(기계공학, 산업공학, 수학 및 물리, 재료공학, 전기 및 전자공학, 화학 및 화학공학) 106명 선발
▲1975년 9월, 제1회 박사과정 입학식
▲1978년 첫 박사학위자를 배출
▲1980년 12월, 제5공화국에 의해 한국과학원법 및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육성법이 폐지되어 ‘한국과학기술원법’이 제정. 1981년 1월 15일에 한국과학원이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와 통합되어, 한국과학기술원(KAIST)이 설립
▲1984년 12월, 대덕연구단지 내에 학사과정인 한국과학기술대학(Korea Institute of Technology, KIT) 설립
▲1986년 3월, 제1회 한국과학기술대학 학사과정 입학식
▲1989년 6월, 제6공화국에 의해 한국과학기술원에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분리 독립
▲1989년 7월, 한국과학기술대학 통합, 서울 홍릉에서 대덕연구단지 대덕 캠퍼스로 이전
▲1990년 2월, 제1회 학사학위 수여식
▲2009년 2월, 한국과학영재학교가 카이스트 부설 한국과학영재학교로 바뀜
▲2009년 3월, 한국정보통신대학교 흡수통합
▲2015년 2월, 1만 번 째 박사학위자를 배출

<국제대학평가>
▲2014-2015년 영국 더 타임스 세계대학평가 종합순위 52위
▲2014-2015년 QS 세계대학평가 종합순위 51위, 아시아 2위
▲2013년 QS 세계대학평가 종합순위 60위, 기계항공공학분야 19위
▲2012년 QS 세계대학평가 종합순위 63위
▲2009년 영국 더 타임스 세계대학평가 종합순위 세계 69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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