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는 전 세계적으로 연간 약 4억 7천만 톤의 규모로 생산되고 있다. 국내만 해도 연간 4백만 톤 이상의 규모가 생산된다. 벼는 도정을 거치는 과정 중에 부산물로 왕겨가 생긴다. 왕겨(Rice husk, 일부는 쌀겨라고도 함)는 현미를 도정해 정백미를 만들 때 발생하는 과피와 종피, 호분층 등의 분쇄혼합물이다.
벼의 외피를 감싸고 있는 것으로 벼 곡식 낱알의 겉부분에 위치함으로써 곡식을 비와 바람 등 외부 환경으로부터 보호하며, 해충으로부터도 지켜줘 여러모로 유익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왕겨는 어느새 우리 생활에 매우 밀접한 자원으로 다가와 있다. 유기물과 무기물의 복합체로 구성돼 있는 만큼 다양한 에너지원으로 사용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 많은 연구자들에게 매력적인 대상으로 떠오른 것이다.
▲ 최장욱 카이스트 EEWS 교수 ⓒ황정은
왕겨를 이용한 이차전지
최근 과학기술분야에서 떠오르는 내용 중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지속가능한 기술을 언급할 수 있다. 이는 기술발전의 구호에 묻혀 있던 자연환경에 대한 입체적인 접근으로, 자연과 함께 성장하는 기술의 발전을 의미한다.
때문에 청정에너지에 대한 연구도 계속 심화되고 있으며, 이러한 내용의 일환으로 이차전지에 대한 연구 역시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왕겨를 사용한 고용량 이차전지 기술이 국내 연구진에 의해 개발돼 주목을 받고 있다.
최장욱 카이스트 EEWS 교수팀과 생명화학공학과 박승빈 교수팀이 공동연구를 진행해 왕겨를 이용한 고용량 이차전지를 개발한 것이다.
연구팀은 왕겨 내부에 존재하는 다공성 천연 실리카 물질을 분리·정제해 고용량 리튬이온 이차전지 음극소재인 3차원 다공성 실리콘 물질을 개발했다. 해당 연구 결과는 그 성과를 인정받아 자연과학분야의 세계적 권위지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 온라인 판에 게재됐다.
“전 세계적으로 벼는 많은 양이 생산되는 상태고, 벼의 도정 부산물인 왕겨 역시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그 양이 매우 많은 편입니다. 보통 무게비로 벼의 약 20%를 차지하고 있으며, 2012년 기준으로는 국내에서만 약 80만 톤의 왕겨가 도정과정에서 부산물로 생산됐죠.
국내의 경우 벼 저장과 활용성을 위해 전국적으로 미곡종합처리장에서 지속적인 도정작업이 진행되기 때문에 부산물로 발생하는 왕겨는 연간 일정하게 발생하고 있습니다. 처리과정에서의 오염이 적어 상업적으로 가치가 높은 바이오매스라고 할 수 있죠.”
왕겨의 활용은 다양한 분야에서 일어났지만, 외피가 규소로 치밀하게 피복돼 있어 부식이 어렵고 마모성이 높으며, 부피가 크다는 점 때문에 이송과 가공이 어려워지면서 고부가 가치 용도로 사용하는 데 여러 어려움이 있었다. 가능성은 있으나 실질적인 가공 기술이 한계로 작용해 산업화와 상용화에 걸림돌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때문에 대부분 부가가치가 낮은 축산시설 깔개와 퇴비, 혹은 상토와 보온재 등의 활용이 그간 왕겨 활용의 전부였다.
하지만 최 교수는 연구 활동을 진행하며 만난 파트너 박승빈 교수와 여러 이야기를 나누던 차에, 왕겨가 훌륭한 고부가가치 재료가 될 수 있다는 힌트를 얻었다.
“왕겨에는 실리카라는 물질이 포함돼 있습니다. 벼의 뿌리에서 생물학적으로 실리카를 선택적 흡수하거나 정착하는 과정을 통해 20wt%의 높은 순도의 실리카를 포함하고 있죠. 또한 왕겨 내부에 존재하는 쌀을 외부 바이러스나 해충으로부터 보호하고, 저장이 용이하도록 다공성 형태의 구조로 이뤄져 있어요. 우리 팀은 왕겨 표피에 존재하는 다공성 실리카로부터 3차원 구조의 다공성 실리콘 입자를 추출·합성했습니다.”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친환경 전기자동차의 경우 이차전지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전지이기 때문에 음극과 양극이 존재하는데, 음극의 재료로는 주로 흑연이 사용된다. 그동안은 흑연에서 무게당 용량이 높은, 즉 한 번 충전하면 사용량이 높은 실리콘을 사용하려고 했는데 실리콘의 사용은 용량적 측면에서는 장점을 지니고 있으나 수명의 측면에서는 단점을 안고 있었다.
“전지의 수명은 충·방전의 주기를 얼마나 반복할 수 있느냐의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기존 흑연계통의 재료를 사용할 경우 수백 주기 정도를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일반적으로 2년 정도 사용한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실리콘은 그만큼의 수명이 나오지 않아요. 이것은 실리콘이 갖고 있는 여러 가지 재료상 문제 때문입니다.”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충·방전 과정에서 부피가 커지기 때문이다. 많은 연구자들이 연구를 진행한 결과, 부피가 팽창함으로써 다양한 문제를 도출하고 있으며 이러한 문제는 아주 작은 실리콘을 만듦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 나노미터 규모의 작은 실리콘 기술이 필요한 이유다.
“그렇다면 실리콘 나노기술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가 다음 이슈가 되겠죠. 여러 가지 합성방법이 있겠지만 저와 박승빈 교수는 왕겨의 껍질에서 해답을 찾았습니다. 벼에는 실리콘 옥사이드라는 물질이 있어요. 나노미터 수준의 기공을 이미 만들고 있는 거죠. 아마 자연 상태의 물질이기 때문에 왕겨 안에 있는 내용물을 박테리아나 벌레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구조가 아닌가 싶어요.
이러한 왕겨의 구조가 2차전지의 전극재료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실제로 연구실에서 실험을 진행한 결과 다른 실리콘 구조보다 수명특성이 좋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죠.”
▲ 벼의 도정 부산물로 발생된 왕겨로 부터 고용량 리튬 이차전지용 3차원 다공성 실리콘 음극소재 개발. (오른쪽 아래 이미지는 왕겨의 외피에 존재하는 실리카의 존재를 나타낸다.) ⓒ카이스트
효과까지 좋아… 전지로서 사용 ‘이상 無’
왕겨의 표피에 존재하는 다공성 실리카에서 3차원 구조의 다공성 실리콘 입자를 추출·합성한 연구팀은 기존 실리콘 기반의 음극소재가 갖고 있는 고질적 문제점이 효과적으로 개선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충·방전 시 부피가 팽창하거나 수축하면서 발생하는 박리화 및 계면 불안정성 문제가 개선된 것이다.
“우리가 개발한 연구가 성능측면에서 기존 실리콘 재료보다 우수한 것을 확인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큰 이점은 사용할 수 있는 재료의 양이 매우 많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물질이라 해도 재료가 고갈된다면 무용지물이죠.
하지만 왕겨는 2차전지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최고 100~1000배는 양이 많습니다. 게다가 왕겨의 고부가가치 이용사례는 거의 없기 때문에 앞으로 해당 기술은 더욱 큰 이점을 갖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최 교수는 “개발한 연구결과를 현재 사용하고 있는 전지와 비교하자면, 흑연대비 왕겨에서 유래된 실리콘은 한 번 충전했을 때 그 밀도가 세 배에서 다섯 배까지 용량이 많다”며 “이것을 사용시간으로 계산하면 약 1.5~2배 정도 효능이 증가했다고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약 2년에 걸쳐 진행된 이번 연구는 재료의 이점과 연구결과의 성능으로 인해 많은 국가로부터 관심을 받고 있다. 특히 쌀을 주식으로 삼는 국가의 관심이 더욱 높은 상태다.
“인도나 중국, 태국 등의 국가에서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어요. 무엇보다 이번 연구는 자연에서 존재하는 유용한 자원을 실제 과학기술분야에 사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여서 더욱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보통의 경우에는 자연 속 자원들을 놓치는 경우가 많잖아요. 더불어 앞서 언급했듯, 융합 연구의 시너지를 보여준 사례라고나 할까요.”
최 교수는 “왕겨 표피로부터 만들어진 상호 연결된 다공 구조에 의해 실리콘의 부피 팽창을 효과적으로 제어해 우수한 용량을 유지하고 출력특성을 갖는 전지로 개선할 수 있었다”며 “이에 따라 기존 실리콘 기반의 리튬 이차전지가 갖고 있던 한계와 용량·사이클 불안정성 등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며 연구의 의의를 밝혔다.
앞으로 농가 혹은 농업관련 정부부처와 협업을 통해 연구를 진행하겠다는 최장욱 교수.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연구로 대중과 현직 종사자들에게 다가가겠다는 포부를 밝히며 심도 있는 연구로 기술발전을 이끌어 갈 것이라고 이야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