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고립 다큐멘터리’. 최근 방영되기 시작한 모 방송국 프로그램의 컨셉이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오지에서 출연자가 홀로 자연과 벗하며 단순하면서도 느린 삶을 살아보는 내용을 담고 있다.
얼핏 보면 심심하고 지루할 것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그 이유에 대해 다양한 의견들이 있지만, 출연자의 소박한 삶이 보는 이들로 하여금 편안함을 선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이 같은 의견에 대해 방송 평론가들은 “요즘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자율감각쾌락반응(ASMR)’을 소재로 다룬 프로그램”이라고 평가하며 “조용한 숲속에서 들리는 물이 흐르는 소리나 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 나는 삐걱거리는 소리 등 현대인들이 한동안 잊고 있었던 추억의 소리를 시청자들에게 제공하면서 동시에 힐링을 전달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ASMR은 일상에서 들을 수 있는 소음
ASMR이 유행하고 있다. ‘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의 약자인 ASMR은 직역하면 자율감각의 쾌감작용 또는 쾌락반응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ASMR이라고 표기하면 뭔가 거창해 보이지만 사실은 ‘일상에서 들을 수 있는 소음’을 가리킨다. 물론 소음이라고 해서 시끄러운 자동차 경적 소리나 휴대폰 벨소리 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듣고 있으면 심적으로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조용한 소음을 의미한다.
가령 연필로 종이에 글씨를 쓸 때 사각사각 거리는 소리나 바람이 나무를 스칠 때 잎들이 부딪히며 나는 바스락 거리는 소리 등이 해당된다. 이런 소리를 들을 때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얼굴을 찌푸리거나 외면하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소음 외에도 사람이 인위적으로 말소리를 작게 하여 귀가 간지러울 정도로 나지막하게 전하는 속삭임이나 일부러 뇌를 자극하여 심리적 안정을 유도하는 여러 가지 소리들이 ASMR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ASMR이 팍팍한 삶을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위로를 전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보니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ASMR이 다양한 형태로 제공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예능 프로그램 외에도 인터넷이나 라디오 등을 통해 ASMR이 전해지고 있는 것.
실제로 유튜브에 ASMR을 입력하면 해당 영상만 해도 1천 200만 개라는 엄청난 양이 검색된다. 해외의 모 라디오 방송국에서는 하루 종일 자연의 소리만을 들려주는 프로그램도 존재한다.
이 뿐만이 아니다. 노르웨이의 한 공영방송은 ASMR을 소재로 한 방송 프로그램으로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는데, 프로그램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기획이 눈에 띈다.
7시간이라는 긴 시간동안 기차가 철길을 달리고 유람선이 물위를 헤쳐 나가면서 촬영한 주변의 경치와 소리만을 전해주는 단순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ASMR과 비슷한 개념인 백색소음
ASMR과 비슷한 개념으로는 ‘백색소음’이 있다. ASMR은 생소하지만 백색소음이라고 하면 고개를 끄떡거릴 사람이 있을 정도로 꽤 알려져 있는 개념인데, 반복적인 소리 형태와 동일한 주파수 스펙트럼을 갖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백색소음이 유명세를 타게 된 이유는 ‘집중력을 높일 수 있는 소음’이라고 알려지면서부터이다. 일반적으로 소음은 듣는 사람에게 거슬리게 느껴지지만, 백색소음은 오히려 거슬리게 들리는 소음을 덮어주는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근 들어서는 백색소음을 활용한 전자제품이나 어플리케이션들이 하나둘씩 등장하고 있는 추세다. 이를 이용해 학생들은 학업에 대한 집중력을 높이고, 직장인들은 업무 효율성을 높일수 있다는 것이 개발사 측의 설명이다.
얼마 전 백색소음을 활용하여 아기들의 정서 안정에 도움을 주는 제품을 출시한 기업의 관계자는 “ASMR도 백색소음의 일종이라 볼 수 있다”라고 강조하며 “차이점이라면 ASMR은 수많은 백색소음 중에서도 주로 어릴 적 추억을 떠올리게 하거나, 기분을 전환해주는 용도의 소음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ASMR을 포함한 백색소음을 반복적으로 듣다보면 어째서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편안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그 비밀은 사람이 수면하는 동안 나타나는 뇌파에 숨어 있다.
잠을 자는 동안 사람의 뇌는 주파수대에 따라 크게 세타파와 델타파로 나뉘어진다. 그 중 세타파는 얕은 수면상태에서 활발해지고, 델타파는 깊은 수면에 빠졌을 때 나타난다.
이때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음이 어느 주파수와 비슷하냐에 따라 사람이 느끼는 정도가 달라지게 되는데, 백색소음의 잔잔하고 반복적인 소리는 델타파에 가깝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전문가들의 의견을 고려하면 백색소음을 듣는 것은 차를 탔을 때 졸음이 더 잘 오는 이유와 비슷하다. 차가 움직일 때 발생하는 진동에 신체가 적응하면서, 쉽게 잠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 중 한 전문가는 “ASMR은 현대인들을 위한 일종의 ‘듣는 수면제’일지도 모른다”라고 전제하며 “다만 ASMR에 대한 의존성이 커져서 소음 없이는 수면에 들지 못하는, 또 다른 장애가 나타나지 않도록 의도적으로 줄이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 김준래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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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 2018-04-19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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