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푸조 자동차 회사에 근무하던 엔지니어 루이 레아르는 아르바이트로 수영복 디자인을 하고 있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수영복을 디자인한 후 전문 모델을 구했으나 모두에게 거절당했다. 수영복이 너무 야하다는 이유에서다. 할 수 없이 클럽에서 춤을 추는 쇼걸을 섭외해 파리의 한 수영장에서 열린 수영복대회에 참가시켰다.
대회장을 가득 메운 1만여 명의 관객들은 그 수영복을 보고 경악했다. 당시만 해도 여성이 입는 수영복은 긴 소매와 무릎 밑으로 내려오는 바지 등 외출복과 거의 비슷한 모양새였다. 약간 과감하게 입는 여성들의 경우 몸매의 곡선이 드러나도록 딱 맞게 입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그날 대회에 등장한 수영복은 가슴을 가리는 곳과 팬티가 분리되어 배와 등이 훤히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로마교황청에서는 그 수영복을 두고 ‘부도덕한 옷’이라고 비난했고,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는 한때 그 수영복의 착용이 금지되기도 했다. 세계 최고의 미인을 뽑는 미스월드 콘테스트에서도 그 수영복의 착용이 1951년까지 금지됐다. 심사위원들의 정신을 산만하게 할 뿐 아니라 그 수영복을 입은 참가자들이 더 유리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그 수영복은 영화 등을 통해 서서히 알려졌고, 젊은이들 사이에서 열풍이 일기 시작했다. 무명의 아마추어 디자이너였던 루이 레아르는 패션계에서 유명인사가 되었으며, 그 수영복을 입었던 쇼걸 역시 수만여 통의 팬레터를 받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여기까지가 바로 1946년 7월 5일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비키니 수영복의 탄생 비화다.
그런데 루이 레아르는 왜 이 파격적인 수영복에 ‘비키니’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비키니는 남태평양의 조그만 섬나라인 마셜제도에 있는 환초 중 하나다. 환초란 산호초로 둘러싸인 섬이 해수면 아래로 완전히 침강하면서 산호초만으로 이루어진 둥근 고리 모양의 산호섬을 말한다.
초호 속에 가라앉은 20척의 미국 함정
비키니 환초 가운데에는 길이 34㎞, 너비 17㎞에 이르는 초호(산호초로 둘러싸인 호수)가 있다. 가장 깊은 곳이 60m에 불과한 이 초호는 전 세계 스쿠버 다이버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명소다. 에메랄드빛을 내뿜는 바다와 환상적인 해변, 그리고 환초 속을 헤엄쳐 다니는 열대어와 바다거북은 가히 장관이라 할 만하다. 낙원 같은 휴양관광지인 이곳의 이름을 루이 레이르가 자신의 파격적인 수영복에 차용한 이유는 지금도 초호 속에 가라앉아 있는 20척의 미국 함정에 숨어 있다.
열대어의 집으로 사용되고 있는 이 함정들은 미국이 핵폭탄의 영향을 실험하기 위해 사용한 후 침몰시킨 것들이다. 미국은 1946년부터 1958년까지 비키니 섬에서만 23차례의 핵실험을 했다. 루이 레아르가 파리에서 비키니 수영복을 처음 선보이기 나흘 전이었던 1946년 7월 1일 미국은 일본 나가사키에 투하했던 것과 같은 급의 원자폭탄을 기자단이 보는 앞에서 투하하는 공개 핵실험을 했다.
이로 인해 전 세계 언론의 관심을 온통 비키니 섬에 쏠려 있었고, 언론의 관심을 끌기 위해 뭔가가 필요했던 루이 레아르는 고민 끝에 자신의 수영복에다 ‘비키니’라는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그 후 1949년 구 소련에서도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하자, 미국은 더 강력한 수소폭탄 개발에 착수해 1952년 비키니 섬에서 세계 최초로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그리고 1954년 3월 1일 미국은 이곳에서 ‘브라보 실험’이라고 명명된 강력한 수소폭탄 실험을 다시 했다. 이 수소폭탄의 위력은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1천 배에 달하는 15Mt이었다. 얼마나 위력이 강했던지 비키니 섬의 환초 중 1개가 아예 증발해버렸으며, 9천여 ㎞ 떨어진 미국 테네시주에까지 방사성 낙진이 날아갔다.
또한 주변 섬들의 거주민에게서 사산아와 선천성 기형을 지닌 아이들이 태어나기 시작했으며, 암 및 불임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방사능 낙진을 직접 맞았던 사람들에게서는 극심한 구토와 피부 염증, 탈모 현상이 나타났으며, 멀리 떨어져 무사했던 사람들도 이후 방사능이 함유된 생선 및 과일 등의 섭취로 인해 빈혈, 수막염 등의 질환에 시달려야 했다.
인구 7만명의 작은 섬나라, 마셜제도
당시 비키니섬으로부터 약 130㎞ 떨어진 곳에서 참치 조업을 하던 어선 ‘제5후쿠류마로’의 선원 23명 전원이 방사능 피폭을 당했으며, 그중 무선기장이었던 선원은 약 6개월 후 사망했다. 그때 마셜제도 인근에서 잡은 수산물에서 강력한 방사능이 검출돼 도쿄의 도매시장이 거래 중지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때문에 일본에서는 해마다 3월 1일을 ‘비키니 데이’라고 칭하며 반핵운동을 벌이고 있다.
비키니섬이 있는 마셜제도는 하와이에서 남서쪽으로 약 2천100㎞ 떨어진 지역에 5개의 산호섬과 29개의 환초, 그리고 1천200개 이상의 작은 섬들로 이루어진 인구 약 7만 명의 작은 섬나라다. 비키니섬뿐만 아니라 에니위톡 섬에서도 핵실험이 많이 행해져 1946년부터 1958년까지 12년간 마셜제도에서만 총 67번의 핵실험이 시행됐다.
그런데 최근 이 조그만 섬나라가 핵무기를 보유한 9개국을 상대로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소송을 제기해 화제다. 소송 대상은 미국, 러시아, 중국, 프랑스, 영국,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 북한 등 9개국이며, 소송 이유는 이들 핵무기 보유 9개국이 핵확산금지조약(NPT)을 위반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전해졌다.
1970년대에 호주 및 뉴질랜드가 프랑스를 상대로 남태평양에서 핵실험을 했다는 이유로 ICJ에 소송을 제기한 적은 있지만, 핵보유국 전체를 상대로 군축의무를 위반했다며 ICJ에 소송을 제기한 국가는 마셜제도가 최초다. 또한 이와 별도로 마셜제도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연방법원에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국방부장관, 에너지부 등에 대해서도 소송을 제기했다.
이 같은 소식이 전해지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데스몬드 투투 주교를 비롯해 인권 운동가들로부터의 지지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으로 비유된 이 소송에 이 같은 관심이 쏠리자 미국도 적잖이 당황한 기색인 것으로 전해진다.
비키니 수영복이 핵폭탄과 같은 전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킨 것처럼 마셜제도의 작은 반란이 핵보유국들에 대한 핵군축 노력에 얼마만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 이성규 객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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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 2014-05-08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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