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환상문학 작가 미국 작가 조지 마틴(George R. R. Martin)은 1996년부터 ‘얼음과 불의 노래(A song of ice and fire)’라는 시리즈물 판타지 소설을 펴내고 있다. 지금까지 5부작에 걸쳐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으며 앞으로 제7권에서 완결될 예정이다.
이 작품은 우리나라에서는 ‘얼불노’라는 줄임말로 불리고 있으며 오래 전부터 초대형 베스트셀러의 지위에 올랐다. 20여개 언어로 번역되어 1천500만 부가 넘게 판매되었다. 얼불노의 제1권 제목은 ‘왕좌의 게임(A Game of Thrones)’이다. 2011년 미국 방송사 HBO는 얼불노 시리즈를 TV 드라마로 제작하면서 ‘왕좌의 게임’을 전체 제목으로 선택했다.
드라마 ‘왕좌의 게임’은 매년 4월이면 각 10편으로 구성된 새로운 시즌이 등장해 애호가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데 지금은 소설 제4권에 해당하는 부분이 방영되고 있다. 영문판 기준 600페이지가 넘는 각 권을 속도감 있게 각색하고 컴퓨터그래픽과 세트 촬영을 적절히 섞어 사실적인 공간 배경을 구성한 덕분에 큰 호응을 얻는다.
그런데 최신 과학기술로 완성된 ‘왕좌의 게임’의 원저자는 정작 도스(DOS) 운영체제에서 글을 쓰고 있다는 소식이다. 해외 IT 언론과 블로그는 마틴이 기술혐오론자 ‘테크노포브(technophobe)’인지 기술예찬론자 ‘테크노파일(technophile)’인지에 대한 논쟁으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판타지 소설 ‘얼불노’의 작가는 공상과학소설가 출신
판타지 소설의 금자탑으로 불리는 ‘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s)’ 시리즈는 영국 문학가 존 톨킨(J. R. R. Tolkien)의 작품이다. 마틴은 톨킨의 계보를 잇는 정통 후계자로 지목되곤 하지만 원래는 공상과학(SF) 소설가로 출발했다. 공상과학과 환상문학 분야의 최고 영예인 휴고 상(Hugo Award)을 받기도 했다. 그러다 갑자기 판타지 소설로 돌아서서 얼불노 시리즈를 내놓았다.
판타지 장르는 중세적인 배경에서 마법을 펼치거나 요정과 괴물이 뒤섞인 세계를 보여준다. 반면에 SF 장르는 미래를 배경으로 우주선을 타고 다니며 첨단 과학기술의 도움을 받아 외계인 또는 컴퓨터와 얽히는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첨단 테크놀로지에 대한 태도에 따라 구분하자면 판타지 장르는 과학기술을 혐오하고 멀리하는 ‘테크노포비아(technophobia)’라 부를 만하다. SF 장르는 과학기술의 장점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는 ‘테크노필리아(technophilia)’에 가깝다.
양쪽 장르를 오가며 작가 생활을 해온 마틴은 테크노포브일까 테크노파일일까. 최근 그 단서를 얻을 만한 사실이 밝혀졌다. 이제는 사라지다시피 한 도스(DOS) 기반의 문서작성 프로그램 ‘워드스타(WordStar)’로 글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도스는 키보드를 이용해 텍스트를 직접 입력함으로써 컴퓨터를 제어하는 운영체제(OS)다. 도스 기반의 워드스타는 시장 점유율이 50퍼센트에 달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지만 마우스 사용도 되지 않고 그림 삽입도 어려운 것이 단점이다.
마이크로소프트가 그래픽 기반 운영체제 윈도(Windows)를 내놓으면서 도스의 위세는 급격히 줄어들었고 워드스타의 시대도 막을 내렸다. 이제는 마우스로 몇 번 클릭하기만 하면 화려한 색깔과 모양이 자동으로 삽입되는 워드프로세서가 보편화되었다.
그런데도 마틴은 20년 전에나 쓰이던 프로그램을 아직도 열심히 사용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세계 각국의 독자들을 들었다놨다 하는 놀라운 필력을 자랑한다. 이런 상황을 빗댄 격언은 동양과 서양 모두에 있다.
한자 문화권에는 ‘능서불택필(能書不擇筆)’ 즉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쟁기질 못하는 놈이 소 탓한다’고 하고 인도네시아에서는 ‘춤 못 추는 사람이 바닥 탓한다(Tak bisa menari dikatakan lantai yang berjungkit)’고 한다.
영어권에서는 ‘서툰 일꾼은 언제나 연장을 탓하는 법(A bad workman always blames his tools)’이라는 표현이 있다. 불어권은 ‘못난 일꾼은 언제나 나쁜 연장을 쥔다(Un mauvais ouvrier a toujours de mauvais outils)’는 속담을 사용한다.
도구의 역할은 결국 사람의 능력과 실력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이를 살짝 뒤집어보면 ‘도구의 신체화’로 표현할 수 있다. 자기 팔다리를 쓰듯 도구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다면 최상의 실력을 내게 된다. 마음대로 조종이 되지 않으니 붓과 바닥과 쟁기를 탓할 수밖에 없다.
키보드로 타이핑 치는 속도가 느린 사람은 ‘컴퓨터는 글쓰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불평할 테지만, 태블릿 입력장치에 능숙한 사람은 붓 대신에 전자펜을 쥐어도 ‘이제서야 원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됐다’고 감탄할 것이다.
첨단 과학기술, 받아들일 것인가 내칠 것인가
테크놀로지 자체는 인간의 팔다리 역할을 하는 ‘도구’임이 분명하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규정하는 여러 명칭 중에서 ‘도구의 인간’을 뜻하는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가 있다. 맨손과 맨몸으로 부딛힐 때와 도구를 사용해 살아갈 때의 효율은 몇 배나 달라진다.
도스 기반의 구식 프로그램으로 작성한 소설 ‘얼불노’가 큰 성공을 거둔 것은 사실이지만, 컴퓨터그래픽을 이용한 최신 영상물 ‘왕좌의 게임’이 더 많은 소비자층을 끌어들인 점도 부인할 수 없다. 드라마 덕분에 소설의 판매량이 올라가는 현상도 벌어진다.
첨단 과학기술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외면해도 되는지 곳곳에서 논쟁이 치열하지만, 분명한 것은 테크놀로지를 익숙하게 사용할수록 생활이 편리해지고 활동이 자유로워진다는 점이다.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도 저서 ‘그들이 알려주지 않은 자본주의의 23가지 진실’에서 식기세척기라는 신문물이 주부의 노동량을 덜어준 덕분에 여성의 사회 활동이 혁명적으로 늘어났다고 소개한 바 있다.
마틴이 사용하는 구식 프로그램은 테크놀로지는 인간 본연의 예술성을 훼손한 뿐이라는 테크노포비아적 태도와 테크놀로지를 마냥 회피하기보다 유용성을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테크노필리아적 태도 간의 공방전에 불을 붙였다.
- 임동욱 객원편집위원
- im.dong.uk@gmail.com
- 저작권자 2014-06-03 ⓒ ScienceTimes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