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멘델레예프의 삶은 원소 주기율표의 경계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 물리학, 기술학, 경제학, 측지학, 석유의 채굴과 정제, 음악, 사진 등에 이르기까지 멘델레예프의 관심 영역은 다양했다. 멘델레예프가 끊임없이 연구하고 실험했으며 그 결과를 내보였던 곳은 좁은 화학 실험실을 벗어난 삶 전체였다.
현실 속의 학문은 멘델레예프가 평생 추구했던 과제였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멘델레예프의 삶을 역동적이고 다양하게 만들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학자로서의 생명을 위협하는 독이 되기도 하였다. 1880년 러시아의 과학 아카데미에서는 멘델레예프에게 학자 최고의 영예를 줄 것인가의 여부를 결정하는 선거가 열렸다. 불행히도 반대표는 찬성표를 압도했다. 원소 주기율표의 발견이라는 위대한 업적도 충분하지 못했다.
1882년 멘델레예프가 ‘러시아에는 어떤 과학 아카데미가 필요한가?’라는 글에서 밝혔듯이 당시 과학 아카데미는 ‘러시아’가 아니라 ‘황실’ 과학 아카데미였다. 아카데미는 당대 혁명적 분위기를 두려워한 나머지 진보적인 인사보다는 전제주의에 순응하는 학자, 그리고 러시아의 삶과 무관한 외국인, 특히 독일인 학자들로 채워져 있었다. 학문의 순수성 추구라는 아카데미의 방향은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연구 분위기와 삶 속의 학문을 주장했던 멘델레예프를 선택하지 않았던 것이다.
멘델레예프가 완전히 학계를 떠났던 사건도 이와 같은 역사적 맥락과 관계가 있었다. 1861년 농노제의 폐지 이후 러시아에서는 급격한 변화를 요구하는 운동가들의 활동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대학은 사회 변혁 운동의 아지트였다. 사회주의운동을 막기 위해 경찰 병력은 교내에 자주 투입되었고 학생들은 부당한 대우를 받기 일쑤였으며 대학의 자율권은 그만큼 위협을 받았다. 학내 자유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시위는 더욱 빈번해졌다. 화학과 교수였던 멘델레예프는 자유주의 노선을 따르고 있지는 않았으나 학교 문제에 관해서는 학생들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1879년 헌병 대장은 알렉산드르 2세에게 학내 시위가 발생할 경우 평소 학내 조사에 비협조적인 멘델레예프와 멘수트킨 교수가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한다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학생들의 시위가 가장 빈번하게 일어났던 1890년, 학생들은 요구 사항을 멘델레예프를 통해서 당국에 전달했으나 이 요구서는 아예 검토조차 되지 않았다. 멘델레예프는 이에 저항하는 표시로 사표를 던졌다. 주변 동료들도 그의 결심을 철회하지는 못했다. 이로써 멘델레예프는 대학 강단을 완전히 떠났다. 교수직을 사임하면서 현실과 경제 문제에 대한 멘델레예프의 관심은 더욱 증폭되었다.
멘델레예프는 경제학 관련 논문을 총 100여편 남겼는데 그중 상당 부분은 산업화와 보호무역주의, 관세 정책 등을 다루고 있다. 러시아의 산업 발전에 대한 역사적 필연성을 역설하면서 멘델레예프는 국내 산업 육성책의 하나로 관세에 기반한 보호 무역주의를 주장했다. 그의 경제개혁안은 실제 러시아 경제에 상당 정도 반영이 되었다. 1890년대 러시아의 수입 관세는 33%에 달했는데 이는 1869-1876년 사이의 관세율 13%에 비해 두 배 이상 늘어난 수치였다. 당시에는 높은 관세율을 ‘멘델레예프’ 관세라고 부르기도 했다.
멘델레예프의 관세 정책 및 경제 정책은 그와 생각이 통했던 재무장관 비테에게 영향을 미쳤지만 동시에 비난의 화살을 피하지는 못했다. 중상주의와 보호무역주의의 결합은 국민의 희생에 기반한 국가의 수입 증대를 유도한다는 비판이 자유주의, 혹은 사회주의 경제를 지향하는 양측에서 쏟아져 나왔다. 경제학자로서의 멘델레예프가 잘 알려지지 않았던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러시아에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면서 멘델레예프의 경제 이론은 시대성을 상실했던 것이다.
1887년 8월 7일에는 개기 일식이 일어났다. 러시아에서는 기구를 타고 태양에 좀더 가까이 날아가 일식을 관찰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조종사와 멘델레예프는 함께 탑승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부력이 약해 기구 비행을 중단해야 할 상황에 처했다. 멘델레예프는 조종사와 기타 무거운 짐들을 기구 밖으로 던져 버리고 혼자 하늘로 날아갔다. 구름과 안개를 뚫고 약 600미터 상공으로 날아가 멘델레예프는 태양에 더 가까이서 일식을 관찰할 수 있었다. 착륙해야 할 시간이 왔을 때 조종끈이 기구 안으로 들어가 버렸지만 53살의 대화학자는 풍선 안으로 올라가 조종끈을 다시 꺼내 무사히 땅에 내려앉는 묘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멘델레예프는 사진에도 관심이 깊어 1878년 러시아 최초의 사진 동아리를 조직하기도 했다. 화학자이자 작곡가였던 알렉산드르 보로딘과 평생 친구로 지내며 보로딘의 음악을 항상 곁에 두고 들었다. 자신의 옷을 지어 입거나 여행용 수트케이스 및 각종 상자를 만드는 일은 멘델레예프의 취미이기도 했다. 멘델레예프의 본업을 가방 제작업자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을 정도로 그의 솜씨는 뛰어났다.
위대한 화학자, 경제학자, 석유 채굴과 정제에 관심이 있었던 유전 전문가,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의 러시아 부스 제작에 참여했던 기획자이자 예술에 조예가 깊었던 사람, 그리고 마흔을 훌쩍 넘은 나이에 진실한 사랑을 위해 이혼을 감행하기도 했던 그는 꿈을 현실로 만드는 천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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