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려 박사는 사회적 약자를 위해 봉사하는 선행뿐만 아니라 의사로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는 1943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간암 환자의 간암 덩어리를 간에서 떼어내는 데 성공했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 의학계에서도 성공하지 못했던 수술을 최초로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1959년 2월 24일 우리나라 최초로 대량 간 절제 수술에 성공했다. 50대 여성 간암 환자의 간을 70% 정도 절제하는 데 성공한 것. 비결은 출혈과 간의 손상을 최소화하면서 간 기능 회복을 앞당기기 위해 간엽을 8구역으로 구분한 수술법 덕분이었다. 그는 이후 4건의 대량 간 절제 수술에 성공했으며 그 결과를 대학의학회 학술대회에서 발표했다.
이에 대한 연구 업적으로 그는 1961년 대한의학회 학술상(대통령상)을 수상했다. 1974년에는 한국간연구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직을 맡아 간 외과학 분야의 학문적 발전에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 대한의학회에서는 이 공적을 기려 ‘간의 날’을 제정하기도 했다.
쓸개즙을 생성하고 양분을 저장하며 해독 작용을 하는 간은 우리 몸에서 가장 큰 장기로 무게가 1.2~1.5킬로그램이다. 하지만 손을 쓰기 힘들 만큼 망가지기 전까지는 뚜렷한 증상이 없어 ‘침묵의 장기’로 불린다.
또한 간은 무수히 많은 혈관이 모여 있는 기관이라 수술하기도 매우 까다롭다. 따라서 그 당시에는 간에 암이 생겨도 그 부분만 떼어내는 절제수술을 시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수술기구나 진단 기술 등이 열악했던 탓에 자칫 잘못되기라도 하면 미세한 혈관들을 건드려 환자가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루어진 장기려 박사의 수술 성공은 우리나라 외과 역사에 큰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우리나라 간 연구의 선구자
이후 그는 간의 혈관 및 미세구조 등에 대한 연구업적으로 많은 간질환 환자들의 고통을 덜어주었으며, 우리나라 외과학에서 미개척 분야였던 간장외과의 발전과 의료 인재 양성에 크게 공헌했다. 그의 간 수술에 대한 노하우는 그 후로도 계속 이어져 2014년 5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고신대복음병원은 간암 치료에 있어서 전국 1위로 선정되었다.
특히 북한의 김일성은 죽기 직전까지 장기려 박사를 찾은 것으로 전해진다. 김일성의 목에 혹이 났을 때와 신장결석에 걸렸을 때 그는 러시아와 동유럽의 명의들도 외면한 채 무조건 장기려 박사를 데려오라고 명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김일성은 “내가 장기려를 놓인 것이 평생 한이다. 정말 분하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실제로 북한은 1992년 장기려를 송환하라고 요구하면서 남북 고향방문단 교환 합의를 무산시키기도 했다. 또한 지난 2009년 EBS가 전국의 전문의 800여 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국내 역대 명의 1위로 장기려 박사가 꼽혔다.
하지만 그는 대한민국에서 눈코 뜰새없이 바쁜 의료활동을 하는 와중에도 북한에 두고온 가족을 평생 그리워했다. 북에 두고온 아내 생각에 재혼을 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독신으로 지냈으며, 창밖에 무슨 소리만 나도 혹시 가족인가 싶어 문을 열어볼 정도였다.
1980년대 중반 지인과 함께 유럽 여행을 하던 장 박사는 독일에 들렀을 때 선교사에게 동베를린에 가보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적이 있다. 그때만 하더라도 독일은 서독과 동독으로 나뉘어져 동베를린은 공산주의 정권이 장악하고 있던 동독의 영토였다. 지인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장 박사는 선교사의 안내로 철조망 사이로 열린 문을 따라 동베를린으로 들어서서 흙을 손으로 만지며 끝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가 그 같은 행동을 한 이유는 바로 그 직전에 동베를린에서 열렸던 국제학술회의 참석자 명단에서 장택용이라는 이름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장택용은 북에 두고 온 그의 첫째 아들로서 약학자가 되어 가끔 국제회의에 참석하곤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장기려 박사는 혹시 그 흙이 장남인 장택용이 밟았던 흙이 아닐까 싶어 굳이 동베를린까지 가서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자기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부산시민
1990년대 초 장 박사는 북에 있는 가족의 생사를 확인한 뒤 몇 차례에 걸쳐 편지를 교환했다. 그런데 정부에서 남북으로 가족이 헤어져 있는 저명인사들에게 방북을 허용하겠다는 제안을 해왔을 때 장 박사는 단호히 거절했다. 가족을 보고 싶어하는 이산가족들이 많은데 혼자만 특권을 누릴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 후 몇 차례 북의 가족을 만날 기회가 찾아왔으나, 남북 방문단 교환에 대한 합의가 깨지는 등의 이유로 장 박사는 결국 가족을 만나지 못한 채 눈을 감고 말았다. 세 번째 찾아온 뇌졸중 발작 이후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 장 박사는 함께 월남했던 둘째 아들 장가용 서울대 의대 교수를 불러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내가 하늘나라로 떠나거든 장례식은 치르지 말고 내 몸은 태워서 부산 앞바다에 뿌려주기 바란다.”
그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은 1995년 12월 24일 장기려 박사는 만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장가용 교수는 차마 아버지의 유언대로 처리할 수 없어 장례식을 치른 후 그를 부산 앞바다가 아닌 경기도 마석의 모란공원에 안치했다. 그의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새겨졌다.
“의학박사 장기려. 그는 모든 것을 가난한 이웃에게 베풀고 자기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남기지 않은 선량한 부산시민, 의사, 크리스천.”
장기려 박사가 생전에 그토록 원했던 가족과의 상봉은 그가 죽은 지 5년 후인 2000년 8월 둘째 아들 장가용 교수에 의해 이루어졌다. 8.15 이산가족방문단에서 의료지원 특별수행원을 맡은 장 교수는 평양 보통강호텔에서 어머니 김봉숙 씨를 만났다. 그 자리엔 신용 씨와 성용 씨, 인용 씨 등 장기려 박사의 자녀들도 함께 나왔다.
장기려 박사는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훈장 동백장, 호암상 사회봉사부문.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 인도주의 실천 의사상 등을 받았다. 또 사후인 1996년에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2006년 임상의사로는 허준에 이어 두 번째로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었다.
지난 2013년 4월에는 장기려 박사를 기념하는 ‘더 나눔센터’가 부산 동구 초량동에서 문을 열었다. 부산역 뒤편의 중앙공원 근처에 자리 잡은 이 기념관에 가면 장기려 박사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가 상영되고 그가 평소에 사용하던 청진기 및 의사 가운 등을 볼 수 있다.
- 이성규 객원편집위원
- 2noel@paran.com
- 저작권자 2014-07-30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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