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준의 가장 큰 과학적 업적은 한국 전통의학의 전범을 제시한 동의보감을 완성했다는 데 있다. 이 책은 두 갈래로 나뉘어 있던 양생의 전통과 의학의 전통을 종합하고 병의 증상 및 진단, 예후, 예방법 등을 사용하기 편리하도록 정리한 의학서이다.
동의보감은 1596년 선조가 허준을 불러 새로운 의서의 편찬을 명함으로써 탄생하게 된 책이다. 당시 선조는 허준에게 “궁벽한 시골과 후미진 거리에 의원과 약재가 없어서 요절하는 자들이 많은 것은 우리나라에 향약은 많이 생산되지만 사람들이 알지 못하기 때문이니 분류하고 향약명을 기록하여 백성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지시하여 발간 의도를 명확히 했다.
이 명에 따라 허준은 유의 정작, 어의 양예수, 이명원, 김응탁, 정예남 등과 함께 기구를 설치하고 책의 편찬에 들어갔다. 그러나 다음해 정유재란이 발발함으로써 모든 의사들이 뿔뿔이 흩어져 일이 중단되고 말았다.
이후 선조가 500여 권의 의서를 내주면서 허준에게 홀로 작업할 것을 다시 명했다. 그러나 작업이 채 반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선조가 승하했으며, 허준은 유배지에서 책의 집필에 본격적으로 매달려 1610년 25권의 책을 완성해 광해군에게 바쳤다. 그러자 광해군은 허준에게 태복마(사복시에서 관리하던 말) 1필을 하사해 수고를 위로한 다음, 간행청을 구성한 후 인쇄해 널리 배포하라는 명을 내의원에 내렸다.
허준이 이 책에 ‘동의(東醫)’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동쪽 지방의 의학 전통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책”이라는 뜻에서였다. 홍문관 대제학 이정구가 쓴 서문에 의하면 “이 책은 옛 것과 지금의 것을 두루 포괄하고 수많은 말들을 절충하여 근본을 찾아 근원에 깊이 들어갔고 강령과 요점을 잘 제시하고 있다. 상세하지만 산만하지 않고, 요약되어 있으되 포괄하지 않는 것이 없다”며 동의보감의 장점을 지적하고 있다.
예부터 전해오는 의서의 경우 당시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약재명이 매우 많았다. 따라서 동의보감에서는 중국산인지 조선산인지를 기록하였고, 조선산의 경우는 우리 고유의 약물 이름과 산지, 채취 시기, 가공법 등을 써놓아 쉽게 갖추어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총 5편으로 구성된 동의보감
동의보감은 1편 내경, 2편 외형, 3편 잡병, 4편 탕액, 5편 침구 등 총 5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1편 내경(內景)에서는 인체의 모양을 이루는 기본 요소에 대한 설명과 인체 내부의 상황을 반영하는 일종의 생리학 개론, 그리고 몸을 구성하는 오장육부에 대해 다루었다. 또한 끝에는 소변 및 대변 등 신진대사에 대해 기술했다.
2편 외형(外形)은 몸의 겉에서 관찰되는 부분들의 의학적 기능과 거기에 생기는 질병에 대해 서술한 것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각 부분에 대해 순서대로 설명하고 있다. 즉, 지금의 외과, 이비인후과, 피부과, 비뇨기과, 성병 등이 포함되어 있는 셈인데, 어느 의서에서도 접할 수 없는 특별한 부분이다.
3편 잡병(雜病)에서는 각종 질병의 발생 원인과 증상, 특수한 상황에서 생기는 질병 및 특정 연령층에서 생기는 질병 등을 구분해 서술하고 있다. 곽란, 구토, 땀, 설사, 부종 등의 증세에 따른 진단 문제와 함께 마지막 부분에서는 부인과와 소아과를 정리하고 있다.
4편 탕액(湯液)은 약품에 대해 소개해놓은 내용이다. 앞부분에서는 약물의 채취 및 가공, 약 달이는 법, 약리 이론, 오장육부와 경락에 상응하는 약물 등 약품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으며, 뒷부분에서는 약물의 기원에 따라 구분하고 있다.
5편 침구(針灸)에서는 침구의 실제와 침구 운용에 가장 필수적인 내용을 선별해 기록하고 있다. 침을 놓는 법, 혈자리를 찾는 법, 12경맥이 흘러가는 길, 침과 뜸을 만드는 방법 등 침구학에 대한 대부분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동의보감은 18세기 이후 현재까지 중국에서만 30여 차례나 인쇄될 정도로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일본에서는 2회 재판 간행을 했으며, 1897년에는 미국의 랜디스 박사에 의해 일부 영어 번역본으로 서양에 소개되기도 했다. 또한 베트남을 비롯해 많은 아시아 국가에서도 계속 재출판되고 있다.
2009년에는 동의보감이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되었으며, 2013년에는 국가 차원의 지원에 힘입어 경남 산청에서 동의보감 간행 400주년을 기념하는 세계전통의약엑스포가 열렸다.
예방의학의 중요성 인식한 최초의 서적
동의보감의 발간이 지니는 시대적 의미의 중요성은 17세기에 이미 국가가 공공의료를 책임질 것을 선포하며 계획적으로 이 책의 편찬을 추진했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교육을 받지 못한 평민들도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책의 일부에서는 한자와 함께 한글이 사용되었다.
국가가 제공하는 공공 의료 서비스의 개념은 서양의 경우 19세기에 와서야 도입된 것으로 본다. 19세기 이전에 왕실이나 귀족보다는 평민의 건강을 위해 국가적으로 추진된 편찬사업은 전 세계적으로 보기 드물었다는 데 동의보감의 가치가 있다.
또한 동의보감은 양생(養生)의 원칙을 바탕으로 의학에서 예방의 중요성을 전면적으로 인식한 최초의 의학 서적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양생의 철학에서는 인간의 질병이 단지 신체적 원인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신체적 요인과 더불어 사회적·정신적 요인이 복잡하게 작용한 결과라고 본다. 동의보감의 이 같은 예방의학적 관점은 현대 의학이 그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보다 훨씬 앞서 있다.
동의보감은 동아시아에서 2천년 동안 창안하고 발전시켜 온 다양한 의학 지식을 집대성해놓은 책이다. 따라서 17세기의 아시아인들이 우주와 세계, 인간을 보는 관점에 대해 통찰력을 제공해주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더불어 당시 아시아인들의 생활과 문화, 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하기도 한다.
독창적인 분류 방법을 채택함으로써 다른 어떤 의학서보다 체계적으로 편집되었다는 점도 동의보감의 특징 중 하나다. 질병의 원인, 특별 증상, 진단, 처방 등의 정보를 중앙에 강조해서 잘 보이게 하고, 비슷한 질병에 관한 정보와 관련 개념들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구조가 체계화되어 있어 내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요즘의 인터넷 팝업창처럼 박스를 만들어 유용한 정보를 보충한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 이성규 객원편집위원
- 2noel@paran.com
- 저작권자 2014-11-18 ⓒ ScienceTimes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