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원호섭 매일경제 산업부 기자(과학과기술 편집위원)

1980년, 대학을 졸업하고 금성전기(현 LG전자) 연구소에 입사해 통신 장비를 만들던 20대 젊은이가 고민에 빠졌다. 군대에서 신호 처리 기술을 연구했는데, 기밀을 알고 있다는 이유로 유학을 가지 못하고 기업을 택했으나 수차례 한계를 느꼈다. 통신 장비를 만들기 위해서는 다른 기술이 필요했다. 한국의 전자 산업이 한 단계 나아가려면, 반도체 기술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고민 끝에 회사 생활을 정리하고 무작정 미국 유학 길에 올랐다. 그렇게 스탠퍼드대학에서 반도체를 공부하고, 미국 텍사스인스트루먼트에서 반도체 칩을 연구했다. 이후 귀국해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반도체를 연구하던 그는 한국에 돌아와 능동형 유기 발광다이오드(AMOLED)를 연구했고, 세계 최초로 모바일 대형 TV용 AMOLED 관련 기술을 개발하면서 대한민국이 디스플레이 분야 강국으로 올라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한국의 디스플레이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지 않고 등장할 뿐 아니라 여전히 삼성 LG 등 디스플레이 업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꼽히는 권오경 한양대 석좌교수(한국공학한림원 회장) 이야기다. 과학 기술정보통신부(과기정통부)와 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과총)가 지난 9일 ‘2021년 대한민국 최고과학기술인상’ 수상자로 권 교수를 선정했다.
산업계를 비롯해 학계에서는 권 교수를 가리켜 ‘겸손하다’고 이야기한다. 한국의 디스플레이 산업을 이끌었다고 평가받지만, 항상 ‘뒤’에 서 있어 잘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업적은 누구보다 화려하다. 권 교수는 AMOLED 화소 회로와 구동 회로를 개발하여 모바일용 AMOLED 디스플레이를 양산할 수 있게 한 핵심 인물이다. 장시간 사용이 가능한 TV용 AMOLED 디스플레이 양산에도 그의 기술이 적용됐다. 경쟁력 있는 418건의 해외 특허와 310건의 국내 특허를 보유하고 있다. 그의 특허 없이는 AMOLED 를 만들기 힘들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과기정통부는 ‘세계 최고 수준의 업적들은 주요 디스플레이 기술 국산화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국내 반도체 중견기업으로의 기술 이전을 통해 치열한 세계 디스플레이 시장에서 기술 경쟁력 확보를 이끌었다’고 설명했다. 또한, 권 교수는 한국의 과학기술 발전을 위한 대외 활동도 활발히 수행하고 있을 뿐 아니라 대학과 기업체에서 세미나, 강의 등 교육과 자문 역할을 하며 디스플레이 기술 보급 확산과 후진 양성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는 업적을 인정 받았다.
권 교수는「과학과기술」과의 인터뷰에서 “40년간 공학자의 길을 걸어오면서 우리나라의 디스플레이와 시스템 반도체 산업에 기여할 기회가 주어진 것에 감사하게 생각한다”며 “우리나라 디스플레이 산업과 시스템 반도체 산업의 세계적인 위상을 제고하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어서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최고과학기술인상은 탁월한 연구 성과를 이룬 과학기술인을 발굴하여 그 공로를 치하하고, 국민에게도 널리 알려 그 명예와 자긍심을 높일 수 있도록 2003년부터 시상해온 우리나라 최고의 과학기술인을 위한 상이다. 수상자는 과학기술 분야 최고 전문가로 연구개발 업적뿐 아니라 우리나라 경제 발전 기여도, 국민 생활 향상에 미친 영향 등을 종합하 여 평가하며 그동안 수상자는 올해 포함 총 44명이다. 과기정통부는 9월 10일 과총이 주최하는 2021 년 대한민국과학기술연차대회 개회식에서 권 교수에게 대통령 상장과 상금 3억 원을 수여했다. 다음은 권 교수와의 일문일답이다.
Q. 대한민국 최고과학기술인상을 수상한 소감은.
A. 큰 상을 주신 문재인 대통령님과 과기정통부 임혜숙 장관님, 심사위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국내 과학기술 분야 최고 명예와 권위를 자랑하는 이 상을 수상할 수 있도록 저와 함께 연구실에서 밤낮 가리지 않고 연구에 몰두해 주신 160여 명의 제자와 연구교수님, 그리고 항상 아낌없는 지원과 격려를 해주신 많은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지난 40년 동안 공학자의 길을 걸어오면서 우리나라의 디스플레이 산업과 시스템 반도체 산업에 기여할 기회가 주어진 것에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 산업의 세계적인 위상을 제고하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어서 매우 영광스럽고 또한 자부심을 느낍니다.

Q. 반도체를 공부했지만, 이제 디스플레이 분야 석학이 되셨는데.
A. 인생은 참 알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농사를 지으셨던 부모님은 제가 의대에 가기를 원했습니다. 전 물리학자가 꿈이었고요. 반드시 의대를 가라고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저는 전자공학을 택했습니다. 반도체를 전공했고, 지금은 디스플레이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최고과학기술인상을 받으면서 생각해보니 귀국하여 새로운 분야인 디스플레이 분야를 도전한 것이 ‘참으로 잘한 선택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상을 주신 것은 앞으로도 대한민국의 디스플레이 분야와 반도체 분야에 더 많이 기여하라는 말씀으로 알고, 국가 산업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지속적인 연구와 인재 양성을 위해 더욱 노력하려 합니다. 한국공학한림원 회장으로서 과학기술, 산업기술, 공학 인재 양성, 벤처기업의 육성 및 글로벌화 등의 분야에서 수월성 제고를 위한 실효성 있는 정책 제안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Q. 디스플레이 분야와 연을 맺게 된 계기는.
A. 우리나라의 전자 산업의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반도체 기술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금성 전기에서 통신 장비를 만들면서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유학 길에 올라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텍사스인스트루먼트의 반도체 연구소에서 다양한 경험을 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고전압 IC 공정개발이었는데, 당시 티아이재팬(TI Japan)에서 LCD 구동 회로를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받아 테스트용 LCD 구동 IC를 선보였습니다. 이후 PDP 구동 IC 공정을 만들어 달라는 요청이 있어서 그 프로젝트 도 성공적으로 완성한 뒤 티아이재팬에 기술을 이전했습니다. 귀국한 뒤 얼마 되지 않아 국내 기업 몇 곳이 제게 찾아와서 연구비를 줄 터이니 같이 연구를 하자고 했습니다. 디스플레이 연구였습니다. ‘내 전공은 반도체입니다’라고 했지만 막무가내였습니다. 당시 디스플레이 구동 칩은 티아이재팬에서만 생산했는데, 일본 기업들에 납품하기도 바쁜 일정이어서 한국 회사에는 공급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한국 기업이 디스플레이 구동 칩을 구매하려고 일본에 갔는데, 그쪽에서 한양대에 구동 칩 전문가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저를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Q. 지금까지 연구하면서 가장 의미 있었던 성과는.
A. 1990년대 말, 디스플레이 소자로는 주로 LCD는 소형, PDP는 대형 평판디스플레이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OLED 디스플레이가 미래 유망 기술로 대두됐고, 이를 미국의 코닥, 일본의 세이코엡손, 소니 등에서 차세대 자발광 디스플레이로 기술 개발을 시작했습니다. 이 사실이 국내에 알려졌고, 우리도 OLED 디스플레이에 도전해야 한다는 의견이 LG와 삼성으로부터 강하게 제기되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상황은 열악했습니다. OLED 소재와 생산 설비가 없었고, 2001~2002년이 되어서야 실험실 레벨에서 OLED 소자 제작도 겨우 할 수 있는 수준이었습니다.
일본 소니가 2004년에 PDA용 AMOLED의 시제품을 출시했는데, 화소 구조가 너무나 복잡하고 휘 도(광원의 단위 면적당 광도)의 균일도가 좋지 않아 수율이 매우 낮았습니다. 결국, 출시 6개월 만에 사업을 중단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우리는 전류를 잘 제어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습니다. 마침내 디스플레이 해상도를 높여가면서 매우 낮은 전류 레벨을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해 2008년에 처음으로 삼성 모바일 디스플레이에서 양산하게 됩니다. 당시 일본 소니의 엔지니어들을 세계정보디스플레이학회에서 만나면, ‘수 pA전류를 제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임을 우리가 보여 주었는데, 왜 아직도 그런 일을 하느냐’고 야유 섞인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2007년 우리가 양산할 샘플을 보고 놀라던 모습이 아직도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
Q. 디스플레이 분야에서 이처럼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계기는.
A. 디스플레이 분야에 입문한 후 약 6개월 정도까지만 해도 많이 후회했습니다. ‘잘 알고 있는 반도체 분야만 했으면 훨씬 편하게 살 수 있었는데’ 하면서요. 디스플레이 분야는 공학적인 것만 잘 숙지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색채 과학, 인간의 감각 기관인 눈에 대한 분야까지도 잘 알아야 했습니다. 힘들 때마다 이 일은 인류 사회를 위한 일이라고 마음속으로 외쳤습니다. 무엇보다 팀원이 하나가 됐을 때 시너지 효과가 나타났습니다. 끊임없이 토론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고 이러한 노력을 팀원인 학생들이 잘 따라주어서 연구에서 좋은 성과를 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Q. 직접 개발한 기술이 적용된 일상을 마주하면 어떤 느낌이 드는지.
A. 저렴하고 신뢰성이 높을 뿐 아니라 더 좋은 화질을 갖는 디스플레이를 상용화할 때마다 인류에게 기술의 혜택을 나누는 느낌은 느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스탠퍼드대학의 지도교수님께서 항상 제게 했던 말이 떠오릅니다. “너는 매우 창의적으로 생각하는데, 왜 원천 미래 기술에 대해 연구하지 않고, 상용화에 가까운 연구를 하느냐”라는 것이었습니다. 8년 전 한국에 초빙하여 저희 연구실에서 연구하는 내용을 같이 보면서 대형 스크린 디스플레이에 터치 기능을 탑재해 게임을 했는데, 지도교수님께서 감명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 후로는 제게 “왜 첨단 미래기술연구를 하지 않으냐?”고 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어떤 재미있는 연구를 하느냐?”고 묻고 있어서 또 다른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Q. 현재 우리나라가 디스플레이 및 반도체 분야를 선도하고 있다는 데 이견이 없지만, 기술 경쟁 상황에 따른 위기 론도 상당한데.
A. 한국 LCD 기술이 2004~2005년 즈음 일본을 따돌리고 1위가 됩니다. 이제 LCD 산업에서는 기술의 혁신보다는 제조 공정의 혁신으로 유리 기판의 크기를 키워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막대한 자본으로 대규모 LCD 공장을 지으면서 LCD 사업이 중국으로 거의 넘어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OLED 디스플레이는 한국의 기술력이 중국보다 2~4년 정도 앞서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모바일용 OLED의 시장 점유율이 85% 정도, TV용 OLED 패널 시장 점유율은 95% 이상을 국내기업이 선점하고 있어서 초격차 전략으로 간다면 중국이 따라오기에는 시간적인 여유가 있을 것으로 판단합니다.
하지만 자만은 금물입니다. 초격차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디지털 전환 시대에 우리 사회의 변화하는 메가 트랜드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특히, 요즘 메타버스에 대한 관심이 큽니다. 이러한 VR 분야에서는 광학기술, 초고해상도의 마이크로 디스플레이, 반도체 공정 등 융합 연구가 절실하기 때문에 범부처 사업으로 빠른 시 간 내에 대형 프로젝트 출범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Q. 앞으로 궁극적으로 도전하고 싶은 목표, 이루고 싶은 연구 성과는 무엇인지.
A. 현재 초고해상도 VR용 마이크로 디스플레이의 해상도 형식을 4K × 3K까지 달성하였는데 궁극 적으로 8K × 8K의 해상도로 가야만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의 구분이 없어진다고 이야기합니다. 8K × 8K 해상도로 만들기 위해서는 풀어야 하는 숙제가 많습니다. 반도체 기술과 OLED 디스플레이 기술로 이를 풀어나가고자 합니다. VR용 마이크로 디스플레이가 완성된다면 VR 기기를 사용할 시에 현실 과 가상 세계의 구분이 어려울 정도가 됩니다. 초고해상도 복합 마이크로 디스플레이를 개발하기 위하여 반도체와 디스플레이가 협업하여 개발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Q. 후진 양성과 관련해서, 함께 연구하는 학생들에게 강조하고 싶은 것은.
A. 공학은 인류에게 이롭고, 편리하고, 안전하고, 건강하고, 즐거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새로운 도구나 소프트웨어를 만들어서 제공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일을 하는 공학인으로서 항상 자부심을 가지고 사고하며 행동하시길 당부드립니다. 호기심이 많아야 배우겠다는 열정도 생깁니다. 호기심을 갖고 꾸 준히 배우려는 자세로 평생을 살아야 합니다.
또한, 더 이상 혼자서 모든 일을 잘할 수 없는 시대가 됐습니다.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와 협업해야 합니다. 협업의 첫 번째는 배려입니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으로 일을 시작하시고 마무리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늘 많이 배울 수 있는 동료와 같이 노력해야 더 많은 성취가 있다는 것도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Q. 연구자로서 철학이 있다면.
A. 신중하게 생각하고 충실히 행동하라는 뜻의 신사독행(愼思篤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이를 ‘논리적으로 신중하게 생각하여 촘촘한 계획을 가지고 열정으로 행하라’고 생각하고 연구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함께 일하는 연구원에게는 “별을 바라보는 자에게 빛을 비추듯이 비전을 가진 자에게 나아갈 희망의 길이 보인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즉, 새로운 연구를 시작하기 전에 ‘본인이 할 일이 인류를 위해서 매우 중요하다고 인식하자’고 말입니다. 열정이 생겨서 열심히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논리적으로 신중하게 생각해서 촘촘한 계획을 세워서 연구를 수행하자’입니다. 어느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만큼 실수를 100% 막을 순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같은 실수는 두려워하되 새로운 실수는 두려워하지 말자. 실수도 새로운 경험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연구자들이 열심히 연구한다면, 연구의 목표는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 이 글은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에서 발간하는 ‘과학과기술’로부터 제공받았습니다.
-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홍보팀
- 저작권자 2021-10-25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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