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과학이 꽃피는 사회

[물리학과 첨단기술] 과학의 창

박승일 한국원자력연구원 융복합양자과학연구소장 ⓒ한국물리학회

물리학을 공부한 덕분에 요새는 콧대가 높다. 양자 기술이 점차 현실이 되어가면서 양자역학에 관해 묻는 사람이 늘었다. 시의적절하게 스웨덴 노벨 위원회에서, 아인슈타인의 고전적인 세계관이 아니고 양자역학이 옳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입증했던 세 과학자에게 노벨 물리학상을 안겨 주었다. 가는 곳마다 양자 기술이 무엇인지, 올해의 노벨상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묻는 분들께 쉽게 설명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다. 이 시대의 가장 성공한 사업가 중 한 명인 일론 머스크가 물리학을 전공하며 배운 지혜를 사업에 십분 활용하고 있다고 떠들어주는 것은 덤이다. 4차 산업혁명으로 상징되는 거대한 변화의 물결이 우리 사회에도 물리학에 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음을 피부로 느낀다.

물리학을 포함한 기초과학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서구 사회와 우리나라에는 온도 차가 있음을 오랜 세월 느꼈다. 우리나라에서는 물리학을 전공했다고 하면, 잘 모르겠지만 어려운 공부를 하셨다는 반응을 흔하게 접하곤 했다. 그러나,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물리학을 공부했다고 하면 곧바로 대답하기 힘든 매우 구체적인 질문을 하는 비전공자를 종종 만나곤 했다. 일반 상대론을 공부하고 있다며 질문을 하는 기능공이 있는가 하면, 양자 컴퓨터에 사용하는 쇼어의 알고리즘을 설명해 달라는 엔지니어도 있었다. 과학혁명과 산업혁명을 거쳐 발전한 경험이 있는 서구 사회에서는 기초과학이 시민의 교양 수준으로 확산하여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기초과학은 자연과 우주에 대한 지적 호기심에서 시작한다. 그러다 보니 먹고살기 바쁜 나라에서는 아무래도 기초과학은 뒷전이 되기 일쑤이다. 우리나라도 크게 다르지 않다. 헌법 127조에서 과학기술을 경제발전의 도구로 묘사한 것은, 옳고 그름을 떠나 헌법 조문을 작성하던 당시 우리 사회가 과학기술에 바라던 바를 투영한 것이다. 정부에서 기초과학보다는 기초, 응용, 개발로 이어지는 제품화를 염두에 둔 기초연구라는 단어를 더 자주 쓰는 것도 그런 사회상을 반영한다. 이는 상대적으로 기초과학이 설 자리를 좁게 했다.

그러나 기초과학이 호기심에 의해 시작한다고 해서 개인의 취미활동 정도로 치부해선 곤란하다. 유럽의 한 지인은 필자에게 “패러데이 덕분에 물리학자는 5세기 동안의 연구비를 보장받았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패러데이가 제품을 개발하려는 목적으로 전기와 자기를 연구하진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전기 문명의 시대를 열었고, 인류는 그를 포함한 당시의 물리학자들에게 큰 빚을 졌다는 뜻일 것이다. 현대 산업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정보통신과 생명공학 역시 반도체에 관한 물리학 연구와 DNA 구조를 엑스선 결정학으로 밝혀낸 데에서 시작했다. 이처럼 새로운 산업의 탄생과 그로 인한 사회의 변화는 기초과학으로부터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국가 연구개발 투자가 연 30조 원을 넘었다고 한다. GDP 대비 연구개발 투자 비율이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른다니 과학자로서 감사한 일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막대한 투자를 보다 전략적으로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국가 연구개발의 한 축을 담당하는 출연연구원에 대한 문제 제기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공적 자금과 이를 받아서 일하는 기관의 효율성을 따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에 대해 그간 다양한 제안과 정책이 넘쳐났지만,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근본적 해결을 위해 기초연구비의 비중을 늘려야 한다는 이야기가 많다. 출연연구원도 대학이 구축, 운영하기 힘든 대형연구시설을 통해 기초과학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사회는 당면한 기술 개발 경쟁에 허덕이고 있으며, 정부 정책도 과학이 빠진 기술만 주로 언급하는 현실은 우리가 처한 딜레마를 보여준다. 정책 결정권자들이 기초과학의 중요성을 모를 리 없다. 그러나 많은 예산을 기초과학에 투자했을 때 국민의 지지를 받으리라는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우리 사회는 기초과학이 사회의 근본적 변혁을 끌어낸 집단적 경험을 공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리튬이온 배터리로 전기차 시대를 연 테슬라나 mRNA 백신을 개발한 바이오엔텍처럼 과학을 통해 성공적인 사업 모델을 만든 기업도 아직은 남의 나라 이야기이다.

그러나 시민 사이에서 과학에 관한 관심이 높아가는 데 희망을 느낀다. 국가 주도의 과학 교육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크지만, 다행스럽게도 인터넷을 포함한 여러 매체를 통해 과학 지식이 쏟아지고 소비되고 있다. 과학적 소양 없이는 다음 산업혁명의 파고를 넘을 수 없다는 것을 시민 스스로 깨달은 덕분이다. 기초과학은 이와 같은 토양 위에 꽃을 피울 수 있다.

 

* 이 글은 한국물리학회에서 발간하는 웹진 ‘물리학과 첨단기술’로부터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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