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많은 상흔을 남긴다. 폭력과 파괴가 난무했던 20세기를 지나 21세기, 현재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도 역시 그렇다. 특히 2년째 이어지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막대한 인명·재산 피해를 냈을 뿐만 아니라 세계정세에 큰 위협이 되고 있다. 그리고 많은 과학자들이 경고했던 기후·환경·생태계에 전쟁이 미치는 돌이킬 수 없는 영향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관련 기사 바로가기 - 전쟁은 물과 토양을 독성으로 만들고 있다)
특히 지난해 우크라이나 카호우카 댐(Kakhovka Dam)이 파괴된 후 생태학적 재앙이 가속화됐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생물학자들은 명분 없는 인간의 전쟁이 ‘대멸종의 시대’를 앞당겼다며 우려를 넘어 탄식을 쏟아내는 분위기다.

재앙이 된 그날
지난해 6월 6일 우크라이나 헤르손주 노바 카호우카에 있는 카호우카 댐(Kakhovka Dam)이 공격을 받아 파괴되었다. 카호우카 댐은 높이 30m, 총 길이 3.2㎞의 초대형 댐으로 저수량이 약 1,800만㎥에 달해 인근 지역에 전기 공급과 자포리자 원자력 발전소에 냉각수를 공급하는 헤르손 지역 핵심 기반 시설이다.
이날 폭격으로 댐의 약 200m 가량이 파손됐는데, 파손된 구간 사이로 범람한 강물로 인해 인근 지역에 대규모 홍수 피해가 발생했다. 외신 보도에 따르면 사망자는 100명을 넘었고 인근 마을 4곳에서만 피해 규모가 10억 달러, 한화 1조 2천억 원 이상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우크라이나 농업부는 자포리자 지역의 물 공급 시설이 제때 복구되지 않으면 남부지역의 농업이 불가능해져 피해 규모는 더 늘어날 것이라고 강조했다.

말을 못 하는 환경·생태계의 피해는 더 심각하다
다행히 원전 피해는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오스타프 세메라크(Ostap Semerak) 우크라이나 전 환경부 장관은 카호우카 댐 파괴가 1986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파 이후 우크라이나가 경험한 가장 심각한 환경 재해라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 환경부와 과학자, 환경단체 등이 조사한 환경 피해액은 514억 달러, 한화로 약 66조 6천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됐다.
지난해 영국 일간지 가디언 보도에 따르면 과학 연구·ICT를 활용한 역대 최초의 전시 환경 파괴 조사 결과, 동물 600종과 식물 880종이 멸종 위기에 직면했다고 전했다. 이어지는 후속 연구들도 카호우카 재해의 ‘나비효과’를 엄중히 경고하는 결과들을 내놓고 있다.
폴란드 제슈프대학교 생물학 연구팀은 2022년 3월부터 15개월간 우크라이나 전역의 조류종 생태 환경을 조사해 발표한 바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전쟁은 조류들에게 직·간접적인 악영향을 미친 게 분명했다. 특히 미사일, 자주포 등의 포격은 새들의 주요 서식지를 직접 파괴했고, 산불을 유발해 생태 환경을 잃게 만들었다.
책임 연구자인 에바 뱅그진 교수는 드네르프강 하구 인근의 피해와 노바 카호우카 댐 인근 지역의 피해가 치명적이라고 강조했다. 드네르프 지역은 1983년에 유네스코가 지정한 생물권 보존지역인데, 이 지역에 사는 멸종 위기 생물들의 서식지가 전멸했다는 것이다. 또, 카호우카 댐 인근의 물새 종들의 새끼가 홍수에 휩쓸려 대부분 죽었고, 새들의 둥지와 먹이원이 사라졌다. 저수지의 약 90%가 범람해 호수 바닥 1,870㎢가 노출됐는데 이 중에 포함된 5개의 람사르 습지에 서식하는 생물들도 사실상 전멸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전쟁이 만든 ‘생물들의 삶이 없는 자연’
Science지 1월 호에는 우크라이나 국립과학원(이하 NAS) 산하 연구소와 전문가들이 본격적으로 생태학적인 피해를 조사하고 복구 방향을 논의하는 기사가 실렸다.
이들의 조사 결과는 언론을 통해 알려진 것보다 훨씬 심각한 수준이었다. 세르게이 모샤킨(Sergei Mosyakin) NAS 산하 식물학 연구소(M.G. Kholodny Institute of Botany) 소장은 드니프로 저수지에서 전멸한 다뉴브 철갑상어 얘기를 꺼냈다. 헤르손 남서쪽에는 실험용 양식장과 심각한 멸종 위기종인 다뉴브 철갑상어 번식장이 조성돼 있었다. 이곳에는 철갑상어 치어를 포함해 여러 종의 물고기 약 150만 마리가 있었는데 모두 전멸했다는 것이다. 폭격으로 인한 홍수로 오염된 물이 이곳까지 범람했고, 특히 독성 물질에 매우 민감한 다뉴브 철갑상어는 구조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댐 상류에는 저수지 물의 거의 90%가 배수되어 1,870㎢에 달하는 호수 바닥이 그대로 드러났다. 이제 이곳에는 풍부했던 물과 생물자원 대신 약 50만 톤에 달하는 죽은 어패류가 말라버린 호수 바닥에서 썩어가고 있다. 유리시네츠(Volodymyr Yuryshynets) NAS 수생물학연구소 소장은 어패류 잔해가 완전히 분해되는 데는 짧게는 몇 년, 껍데기는 훨씬 더 오래 걸리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늦은 봄에 흑해에서 헤엄쳐 와 카호우카 댐 아래에서 산란기를 가졌던 어류들도 사라진 이곳은 ‘생물들의 삶’이 없는 곳이 되어 버렸다는 게 생태조사팀의 말이다.

남은 과제는 “Build back better”
조사팀은 이제 남은 것은 더 나은 환경을 만드는 일이라고 말했다. 여전히 카호우카 저수지 물의 깊이는 2m 미만이고, 자연스러운 계절 변화가 생태계를 가혹한 환경으로 몰아가고 있는 듯이 보인다. 악화일로다. 하지만 아주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과학자들은 지금이 역사의 잘못을 바로잡을 유일한 기회라고 말한다.
다만, 복구와 재건에 대해서는 이견이 갈리는 것으로 보인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전쟁 후 댐을 재건하겠다는 의지를 밝혔지만, 환경 전문가들은 드니프로 분지 일부를 포함해 인근 지역이 자연적으로 회복할 수 있는 방향을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미니체바(Galyna Minicheva) NAS 해양생물학연구소 소장은 “카호프는 비극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것은 거대하고 전례 없는 자연 실험장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인간의 시계를 기준으로 보면 자연이 묵묵히 회복하는 시간은 더디다. 그럼에도 많은 생태학자들은 자연이 가진 놀라운 잠재력을 기대하자는 분위기다. 무엇보다도 전쟁이 빨리 끝날수록 생태계가 더 빨리 회복될 기회를 얻게 될 것이라는 세계적인 공감대도 형성되고 있다. 더 나은 재건을 위한 기회가 다시 한번 인간에게 돌아왔다.
- 김현정 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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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 2024-02-13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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