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공학 기술이 발전하면서 유럽연합(EU) 과학자들이 유전자 편집기술 사용 허가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독일 바이로이트 대학과 괴팅겐 대학을 포함한 국제 연구진은 식물학술지인 ‘트랜즈 인 플랜트사이언스(Trends in Plant Science)’에서 “유기농업 확장을 위해선 유전자 편집과 같은 새로운 육종기술을 허용토록 EU의 GMO 규제 법안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재 EU 규정에 따르면 식물 육종 기술인 GMO 사용을 법적으로 제한하고 있다. 연구진은 “EU의 이런 제한은 생명공학기술의 퇴보를 만들어 낸다”는 입장이다. 과학자들의 목소리에 최근 EU는 긍정적 반응을 보이고 있다.
유기농업 확대 계획이 발단
이 주장의 발단은 지난해 5월 20일 유럽연합위원회(EC)가 발표한 ‘팜투포크(Farm to Fork, 농장에서 식탁까지)’ 발표가 원인이 됐다. ‘유럽 그린 딜(European Green Deal)’ 전략 목표 중 하나로 2050년까지 유기농업을 늘려 기후 중립을 실현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겼다. 2030년까지 농지의 25%를 유기농업을 실천하고, 살충제 50% 감소, 비료 사용량 20% 감소 등의 실천을 주요 골자로 한다.
하지만 유럽 과학자들은 현재 유전자 편집기술로 탄생한 작물을 제한하는 EU 규정이 정책 완수를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독일 바이로이트 대학 생명과학부의 카이 펀하겐 교수는 “현재 농산업에 생명공학기술 법 규제 하에서는 유기농법만으로 식량의 지속가능성을 유지할 수 없다”고 말했다. 유기농법이 농사에 들어가는 비용에 비해 수확량이 관행 농법에 비해 낮다는 점이다.

연구진을 포함한 생명공학기술의 규제 완화를 주장하는 과학자들의 설명으로는 유기농 농지를 늘리면 의도치 않게 숲과 생물의 서식지가 파괴된다는 것. 실제로 농지 확장을 위해 열대 우림 또는 숲이 사라지는 상황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유기농업에 사용되는 가축분뇨 등이 오히려 온실가스 배출을 증가시킨 연구 결과가 나타나기도 했다. 탄소 중립의 목표가 오히려 자연을 파괴하는 셈이다.
또 온난화 탓에 열대 기후의 범위가 커지면서 농작물에 해를 가하는 해충과 병균 발생이 더욱 빈번해 유기농업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작물 해충을 연구하는 영국 엑시터대학 생명과학부 다니엘 베버 교수는 과거 논문에서 “전 세계 주요 농업 국가는 2050년까지 병해충으로 뒤덮일 가능성이 높다”고 예측했다. 이런 이유로 과학자들은 생명공학 기술이 EU의 유기농업 정책을 완수할 도구라고 주장한다.
유전자 편집기술, GMO 굴레에서 벗어나나?
EU를 비롯해 주요 국가는 생태계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유전자변형생물을 규제했다. 특히 아그로박테리움(Agrobactrium)을 이용하거나 방사선과 화학처리로 돌연변이를 유도한 유전자변형생물에서 전통적 육종방법으로 얻을 수 없는 형질 생성을 위해 외래유전자를 도입하면 GMO 규제 대상이었다.
하지만, 최근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CRISPER-Cas9)’와 같은 발전된 유전자 편집기술은 기존 GMO 방식과는 달라 과학자들은 규제 완화를 기대해 왔다. 예로 벼에 발생하는 세균성벼알마름병의 경우, 외부 유전자 도입 없이 벼에 SWEET 단백질을 암호화하는 유전자 프로모터(Promoter)에서 몇 가지 염기만 유전자 가위로 처리해 세균에 저항성을 얻을 수 있다.
외부 유전자 도입 없는 유전자 편집생물이 GMO와는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영국 로담스테드 연구소 안젤라 카프 소장은 네이처(Nature)지에서 “유전자 편집생물이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돌연변이나 화학적 또는 방사선으로 유도된 무작위 돌연변이보다 더 위험하다고 보는 것은 과학적 정당성이 없다”고 말했다.

영국과 미국은 이런 과학자의 목소리에 적극 규제를 완화했다. ‘브렉시트’로 유럽연합을 벗어난 영국은 EU의 GMO 규정에서 자유로워진 상황. 영국 환경식품농무부(DEBRA)는 과학자들의 의견을 적극 반영해 유전자 편집금지 완화 여부에 대한 협의를 마치고 6월까지 공식 답변을 내놓을 예정이다. 영국 언론은 유전자 편집금지가 완화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예측하고 있다.
미국은 영국보다 앞서 규제 완화를 시행하고 있다. 미국 농무부(USDA)는 지난해 환경운동가들의 반발에도 전통적인 번식을 통한 특성을 만드는 아미노산 염기쌍 변화, DNA 결실 등 유전자편집생물 및 식품을 규제대상에서 제외했다. 또 이미 승인된 작물과 같은 방식의 새로운 품종에 대해서는 자동으로 승인토록 규정을 바꿨다. 미국의 이런 결정에 캘리포니아대 식물유전학자 켄트 브래드포드 박사는 “유전자 편집기술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통로가 만들어졌다”고 했다.
유전자편집 장벽 높은 EU…변화의 조짐

영국과 미국이 규제 완화에도 침묵하던 EU는 유기농업 확대 정책 발표 이후, 유전자변형생물 규제와 관련해 움직임을 보인다. 판결에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2018년에 유럽 사법재판소는 유전자 편집기술을 GMO와 같은 규칙을 적용해 ‘자연적으로 일어나지 않는 방식의 유기체’라는 이유로 강력한 규제를 시행했다. 당시 2만 6,000명 이상의 과학자들을 대표하는 유럽 식물과학기구(EPS)는 이 판결에 대해 “유럽은 기회를 잃은 처사”라고 강한 비난과 실망감을 표명했다.
하지만 지난 29일 로이터 통신은 유럽연합위원회가 GMO에 대한 EU의 규칙을 검토, 유전자 편집기술 작물에 대한 제재 완화 가능성을 열었다고 보도했다. 유럽위원회는 117페이지 분량의 보고서에서 유전자 편집을 ‘새로운 게놈 기술(NGT)’이라고 지칭하고 지속 가능한 식품에 이바지할 잠재력을 고려해 기존 규정의 재검토를 시작한다고 밝혔다.

EU의 최대 농업 생산국인 프랑스와 독일은 유럽연합위원회의 움직임에 지지를 표명했다. 줄리아 크로크노 독일 농업부 장관은 EU의 이번 소식에 반기며 성명을 통해 “농부들이 지속 가능한 식량을 생산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규제 완화를 걱정하는 반대론자들은 “혁신적이지만 파괴적인 기술에 지나친 자유가 부여되고, 생명공학을 다루는 대기업들을 통제하던 명분이 사라질 수 있다”며 반감을 나타냈다.
- 정승환 객원기자
- biology_sh@daum.net
- 저작권자 2021-05-04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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