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어를 쓰는 중남미계 미국 이주민을 흔히 히스패닉(Hispanic)이라 부른다. 이들이 라틴아메리카에서 왔다고 하여 '라티노(Latino)'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이 라티노들이 미국에 사는 백인계 코카서스 인종이나 동아시아계 인종에 비해 노화가 느리고 수명이 좀더 긴 이유를 분자생물학적으로 밝힌 연구가 발표됐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연구팀이 유전학 저널 ‘지놈 바이올러지’(Genome Biology) 최근호에 게재한 이번 연구는 ‘히스패닉 패러독스’를 과학적으로 규명해 주는 한편, 앞으로 인간의 노화과정을 늦추는 연구에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미국계 중남미 이주인들은 수입이나 교육수준 등이 백인계보다 낮은데도 불구하고 수명은 더 길어 이 역학적(疫學的) 모순을 ‘히스패닉 패러독스’ 또는 ‘라티노 패러독스’라 불러왔다.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은 계층은 상대적으로 건강상태도 나쁘고 사망률도 높은 것이 보편적인 현상이다. 중남미계 미국 이주민은 이와 반대여서 학자들이 그 원인에 대해 관심을 가졌으나 특별한 인과관계는 발견하지 못 했었다.
히스패닉 패러독스와 관련해 일부 학자들은 출산 관행상 백인 신생아들이 출산 때 외상을 입어 그로 인해 병에 걸리는 확률이 높다, 모유 수유도 라틴계에 비해 적게 하기 때문이라는 추정을 하기도 했다. 또 미국으로 이주하는 중남미인들은 늙어서 몸이 아프게 되면 ‘고향 회귀 본능’에 따라 본국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사망률이 낮다든가, 이주자들은 본국에 남아있는 사람들보다 이민을 단행할 만큼 상대적으로 건강하다는 설 등이 제기돼 왔다.
라틴계 성인 다른 인종보다 사망위험 30% 낮아
논문 저자인 스티브 호바스(Steve Horvath) UCLA의대 유전체학 교수는 “이번 연구 결과 분자생물학적 수준에서 라티노들의 노화가 더 느리게 진행된다는 사실을 밝혀냄으로써 라티노들이 당뇨병이나 다른 질병에 걸리는 비율이 높은데도 불구하고 오래 사는 ‘히스패닉 패러독스’를 설명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질병관리본부(CDC)에 따르면 미국 내 라티노는 평균 기대수명이 82세로 79세인 백인들보다 3년이 더 길다. 2013년도 미국 공중보건 학회지(the American Journal of Public Health)에 따르면 건강한 라틴계 성인들은 어느 연령층에서든 다른 인종그룹에 비해 사망위험이 30% 낮은 것으로 보고됐다.
연구팀은 호바스 교수가 2013년에 개발한 ‘후생유전학적 생체시계’(epigenetic clock)를 포함한 여러 바이오마커를 사용해 유전체에서 노화와 연결되는 후생유전적 변이를 추적했다. 후생유전학이란 DNA 염기서열 자체는 변화하지 않은 채 어떤 유전자가 활성화되도록 하는 DNA 분자의 변화를 연구하는 분야다.
인종별 세포 노화 차이 커
호바스 교수팀은 약 6000명으로부터 DNA 표본을 얻어 18세트의 데이터를 분석했다. 조사 대상군에는 2개 아프리카 그룹과 미국내 흑인 그룹, 백인계, 동아시아계, 라틴계 그리고 유전적으로 라틴계와 연관이 있는 아메리카 토착인으로 볼리비아에 살고 있는 치메인(Tsimane) 등 7개 인종군이 포함됐다.
연구팀은 면역시스템의 건강성을 살펴볼 수 있는 혈액에서 DNA를 추출해 조사한 후 인종별로 차이가 커서 놀랐다고 밝혔다. 특히 세포 구성의 차이점을 분석한 결과 라티노와 치메인의 피는 다른 인종그룹에 비해 노화가 더 느리게 진행됐다.
호바스 교수는 이번 연구가 라티노의 긴 수명을 후생유전학적으로 설명해 준다고 밝혔다. 예를 들면 생체시계상 라티노 여성은 폐경 후 같은 나이대의 비(非)라티노 여성들에 비해 2.4년이 더 젊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는 “라티노의 더딘 노화는 특히 비만 및 염증과 관련된 그들의 건강상 높은 위험도를 중화시켜주는 것으로 추정된다”며, “이번 연구는 인종과 연계된 유전적, 환경적 요인이 노화와 수명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뒷받침한다”고 강조했다.
노화 연구도 분자적 수준으로
치메인은 라티노보다 노화가 더 느렸다. 생체시계를 통해 계산한 바로는 이들의 혈액 연령이 라티노보다 2년, 백인보다는 4년 더 젊었다.
논문의 공동저자인 샌타 바버라 캘리포니아대 마이클 거번(Michael Gurven) 교수(인류학)는 “치메인인들은 자주 감염질환에 걸려도 현대사회에 만연한 만성질환이 거의 없다”며, “그들의 원기왕성한 건강도 이번 연구를 통해 분자생물학적으로 흥미롭게 설명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번 연구에서는 또 같은 인종그룹에서 남성들의 피와 뇌조직이 여성들보다 더 빨리 노화되는 것으로 나타나 여성들의 기대수명이 남성들보다 긴 이유를 확인해 준다.
- 김병희 객원기자
- kna@live.co.kr
- 저작권자 2016-08-19 ⓒ ScienceTimes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