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이 얼면 얼음이 된다. 얼음은 물보다 밀도가 낮아 물에 동동 뜬다. 이처럼 우리가 아는 물에 관한 상식을 뒤엎을 새로운 얼음이 실험실에서 만들어졌다. 이 기묘한 얼음은 물과 밀도가 유사해 물 위에 뜨지도 않고, 우리가 아는 얼음처럼 분자들이 규칙적으로 줄을 선 상태도 아니다.
-200℃에서 칵테일 만들 듯 제조
기존 상식을 깨버리는 새로운 얼음 탄생 소식은 지난 2월 2일 국제학술지 ‘사이언스(Science)’에 실렸다. 연구를 이끈 영국 유니버시티컬리지런던 연구진은 질소를 이용해 영하 200℃까지 온도를 낮춘 용기에서 일반 얼음과 강철 공을 함께 넣고 칵테일을 만들 듯 마구 흔들었다. 산업계에서 재료를 으깨거나 혼합할 때 자주 사용되는 ‘볼 밀링(Ball milling)’ 기술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다.
이 과정을 거친 얼음은 더 작은 조각으로 깨지는 것을 넘어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놀라운 특성이 있는 새로운 얼음으로 다시 태어났다. 연구진은 이 얼음에 ‘MDA(Medium Density Amorphous Ice, 중밀도 비정질 얼음)’라는 이름을 붙였다.

MDA는 겉으로 보기에 고운 하얀 가루처럼 보인다. 그 속을 들여다보면 더욱 기묘하다. 액체 상태에서 불규칙적으로 떠돌아다니던 분자가 결정화되면 고체 상태가 된다. 그래서 일반적인 얼음은 분자가 규칙적으로 배열된 ‘결정 상태’다. 그런데 MDA는 고체지만, 분자의 배열은 액체처럼 불규칙적이다. 이런 상태를 ‘비결정 상태’라고 한다.
사실 비결정 상태의 얼음이 발견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30년대에 과학자들은 영하 110℃까지 냉각된 금속 표면에 수증기를 부착시켜 물보다 밀도가 낮은 ‘저밀도 비결정 얼음(LDA)’을 제작했다. 저밀도 비결정 얼음은 우주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얼음 형태다. 이후 1980년대에는 일반 얼음을 영하 200℃의 저온 환경에서 압축하여 ‘고밀도 비결정 얼음(HDA)’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저밀도와 중밀도 사이 즉, 물과 비슷한 밀도에서는 비결정 얼음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하지만 이번 연구는 이 정설을 깨고, 물과 비슷한 밀도를 가진 중밀도의 비결정 얼음이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교신저자인 크리스토프 잘츠만 유니버시티컬리지런던 화학과 교수는 “인류는 지금까지 20가지 형태의 결정 얼음과 2가지 형태의 비결정 얼음을 발견했음에도 여전히 물에 대한 모든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태양계의 가장 큰 ‘달’ 가니메데에 존재 가능

연구진은 새롭게 발견한 MDA가 우주에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했다. MDA는 단순히 차가운 온도에서 파쇄를 거듭하면 만들어지기 때문에 목성의 위성인 가니메데와 유로파, 토성의 위성인 엔셀라두스 등 얼음 위성에서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 위성을 뒤덮은 얼음이 행성의 기조력에 의해 흔들리고, 깨지고 서로 부딪히는 과정에서 중밀도 비결정 얼음이 만들어질 가능성이 있다.
이번 연구에서 연구진은 MDA를 가열하는 실험도 진행했다. MDA가 생성된 온도인 영하 200℃에서 영하 120℃까지 가열했더니, 일반적인 얼음의 구조로 변해갔다. 특이하게도, 가열과 함께 MDA에서는 열이 방출됐다. 연구진은 볼 밀링 과정의 기계적 에너지가 MDA에 저장됐다가, 가열 때문에 방출되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만약, 비슷한 변화가 위성에서도 일어난다면 위성의 온도가 높아지면 비정상적인 열이 방출돼 위성의 지각 활동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수 킬로미터 두께의 얼음이 움직이는 지각 운동이나, 얼음에서 일어나는 지진인 ‘빙진’ 또는 극저온 화산 활동까지 중밀도 비결정 얼음에 의해 촉진될 수 있다.
잘츠만 교수는 “물은 생명의 기초이며, 우주에서 물을 근거로 생명체의 흔적을 찾기 위한 여러 임무가 펼쳐지고 있지만 우리는 아직 물에 대한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며 “우리의 발견은 얼음을 넘어 모든 상태의 물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제기한다”고 말했다.
- 권예슬 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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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 2023-03-16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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