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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칼럼

‘40일의 격리’를 뜻하는 ‘검역’

[이름들의 오디세이] 이름들의 오디세이(76)

2019년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2019-nCoV)으로 세상이 어수선하다. 검역 당국은 입국 관문인 공항과 항만에서 잠재적인 환자를 찾아내려 고군분투하고 있다.

검역의 대상이 되는 감염병의 감시(격리) 기간은 콜레라(5일), 페스트와 황열(6일), 황열 조류인플루엔자인체감염증(10일), 메르스(14일), 폴리오(21일), 에볼라바이러스병(21일)로 정해져 있어 병마다 다르다. 이번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은 메르스의 14일을 준용하고 있다.

검역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검역은 곧 격리’였다. 6세기에 비잔틴(동로마)제국의 유스티아누스 1세는 한센병 환자를 격리하도록 했다. 1377년에 이탈리아의 라구사(Ragusa, 현재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에서는 페스트 발생지역에서 오는 모든 선박과 여행자들은 항구 인근의 섬에서 30일 동안 격리시켰다. 물론 그 기간 동안 환자가 생기지 않아야 입항할 수 있었다.

라구사 항의 조치는 나중에 황열과 매독이 유행할 때도 적용되었고, 기간은 40일로 늘렸다. 이 ‘40일’을 뜻하는 베니스 사투리 ‘quarantagiorni’가 오늘날의 검역(檢疫, 돌림병을 검사한다는 뜻)을 뜻하는 영어 ‘quarantine’의 어원이 되었다.

두브로브니크는 처음으로 검역이 시행된 곳이다. ⓒ 박여정

왜 하필이면 40일이었을까? 기독교를 신봉하던 유럽인들에게 40은 ‘속죄와 정화’를 뜻하는 숫자이기 때문이다. 그 근거는 성서에서 찾을 수 있다.

노아의 대홍수에서 폭우는 40일 동안 쏟아져 세상을 깨끗이 청소했다.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40일을 지내며 몸과 마음을 정화한 후 십계명을 받았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를 탈출한 후에도 40년 동안 광야에서 정화되었다.

예언자 엘리야도 호렙산으로 갈 때 천사가 준 음식을 먹고 40일 밤낮을 걸었다. 예수도 세례를 받은 후 40일을 광야에서 머물며 단식했고, 부활 후에도 40일간 세상에 머무른 후 승천했다. 평신자들도 부활 전 40일을 ‘사순절(四旬節, 4순은 40일이다)’로 정해 속죄와 참회 그리고 정화의 기간으로 삼는다. 연금술에서도 광물을 금으로 만드는 데 40일이 걸린다고 믿었다. 그래서 40일로 정한 것이다.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현대 의학에서도 40일에 가까운 6주(42일)를 기준으로 급성병과 만성병으로 나눈다. 웬만한 급성 질병은 6주 이내에 발병하고 회복된다.

18세기가 되면 검역 현장에 노란 깃발(yellow jack)이 등장한다. 선박에 노란 깃발이 게양되면 ‘우리 배에 환자가 있다’는 의미로 일종의 ‘접근 금지’ 경고였다. 하지만 지금은 정반대의 뜻으로 쓰인다. ‘우리 배에는 돌림병 관련 문제가 없으니 입항 허가를 요청한다(Q)’거나 ‘검역 완료(L)’라는 의미다.

검역 깃발. 좌측은 ‘퀘벡(Q)’으로 ‘우리 배에는 돌림병 관련 문제가 없으니 입항 허가를 요청한다’는 의미이고, 우측은 ‘리마(L)’로 ‘검역 완료’란 뜻이다. ⓒ 위키백과

물론 일반인들이 검역과 관련된 노란 깃발을 볼 일은 없다. 하지만 돌림병 유행지역에서 귀국하는 승객들은 비행기 안에서 검역 질문지를 작성해 제출해야 한다. 그 용지는, 짐작하듯 노란색이다.

그렇다면 검역과 격리는 서구 문명만의 것일까? 아니다. 우리 민속에도 21일의 신성한 격리 기간이 있다. 누구든 들어보았을 삼칠일(三七日)이 그것이다. 아기가 태어나면 대문에 금(禁)줄(일종의 통제선)을 걸어 외부인이 함부로 출입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21일 동안 아기를 밖으로 데려 나가지도 않고 아기를 보고 싶은 친지라 할지라도 집 안으로 들이질 않았다. 산모도 이 기간 동안에는 미역국을 먹으면서 ‘몸조리’라 불린 휴식과 안정, 그리고 적응의 시간을 누렸다. 혹시 모를 나쁜 감염병으로부터 신생아는 물론이고 산모를 보호하는 효과를 감안한 것이다.

그런데 왜 ‘3X7=21일’이었을까? 우리 민속에서 ‘일곱’은 칠성(七星) 신앙과 관련해 ‘신성한’ 수였고 ‘셋’ 역시 ‘행운의’ 수였기 때문이다. 신성한 일곱 날을 이왕이면 삼 세 번을 가져 확실한 단도리를 한 것이다.

우리 역사에 검역이나 격리 관련 기록은 비교적 근대에 등장한다. 조선 시대에 돌림병이 창궐하면 유행지의 환자나 주검을 성 밖에서 격리하는 법적인 조치가 있었다. 근대적인 검역 조치는 지금으로부터 135년 전인 1885년에 조선 정부가 도입했다.

1885년에 부산, 인천, 원산의 개항지에 검역소를 설치해 해항(海港) 검역이 실시되었지만 간소화를 요구한 열강들의 압력으로 그 규모가 대폭 축소되는 수난을 겪었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1895년부터는 본격적인 검역 및 소독 활동이 이루어졌는데 당시에 큰 문제가 된 콜레라 때문이었다.

콜레라 환자가 생기면 환자들을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거나 ‘피병원(避病院, 전염병자를 수용하는 격리병원)’으로 옮겼다. 환자의 집과 집기들은 석탄산이나 황산으로 소독했고, 돌림병으로 죽은 환자의 주검은 깊이 매장한 다음 주변에 소독제를 뿌렸다. 서양처럼 화장(火葬)을 하지는 않았다.

조선 정부 최초의 콜레라 피병원은 1895년 7월 동대문 인근의 하도감(軍營) 터에 설치됐다. 말이 피병원이지 비바람이나 ‘피’하는 정도로 시설은 열악했다. 하지만 서양식 진료를 하는 선교 의사들이 환자들을 돌보았다.

총 135명의 환자가 피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치사율은 무려 75%나 되었다. 조선은 1821년부터 콜레라가 유입되어 수십만 명 이상의 귀중한 인명을 잃은 것으로 본다. 일반적인 치사율도 80~90%였으니 피병원이라고 해서 환자들이 잘 나은 것도 아니었다. 다만 환자를 격리해 전염을 방지하는 목적이 컸을 것이다.

때문에 조선 민중들은 피병원을 별로 선호하지 않았다. 환자들은 여전히 집안 깊숙한 곳에 숨겨졌고 자신도 모르게 사랑하는 가족에게 병을 퍼뜨렸다. 방역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한 세기가 지난 20세기 후반, 인류는 처음으로 치명적인 감염병 하나를 근절하는 데 성공했다. 두창(마마, 손님)이다. 그 여세를 몰아 폴리오(소아마비)도 근절하려 했지만 마지막 순간에 실패했다.

물론 노력을 기울인다면 몇몇 감염병을 지구에서 영원히 추방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새로운 감염병이 등장하는 것도 현실이다.

20세기 말의 조류독감(AI), 21세기 벽두에 등장한 SARS, 2009년의 신종플루, 2018년의 메르스(MERS), 그리고 2019년의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까지 사라지는 병보다 새로 등장하는 병이 더 많아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현실을 보면 인류가 모든 병을 근절할 수도 없고, 설사 그렇게 되었다 하더라도 새로운 감염병은 어김없이 등장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그때마다 이런 공포와 혼란을 겪어야 할까? 이런 사태를 겪으면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신종 감염병에 대응하는 시스템을 잘 갖추고 유사시에 신속하고도 침착하게 대응하는 것이다.

17세기 초 베니스 여행자에게 발급된 검역증명서. 런던 과학박물관. ⓒ 박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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