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칼럼

한국 BEST SF작가 10인, 김보영(2)

[한국SF를 찾아서] 국내 초인소설의 효시 <다섯 번째 감각>

전자책으로 먼저 발간된 중단편집 <멀리 가는 이야기; 2005년>은 김보영이 과학소설 작가로서의 일관된 관심과 지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찬찬히 들여다볼 만한 작품집이다.

여기에는 <촉각의 경험>과 <미래로 가는 사람들>처럼 이미 2004년 과학기술창작문예 당선작 모음집에 다른 작가의 당선작들과 함께 수록됐던 작품들과 함께 <다섯 번째 감각>과 <우수한 유전자> 그리고 <종의 기원> 같은 신작들이 수록됐다. 심사가 끝나고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당시 심사에서 <촉각의 경험>과 막판까지 경합을 벌인 또 한편의 유력한 수상 후보작 역시 김보영의 중편 <미래로 가는 사람들>이었다.

▲ 김보영의 빼어난 중단편집 <멀리 가는 이야기> ⓒ행복한 책읽기


알고 보니 필자를 포함한 모든 심사위원들이 같은 작가의 작품 둘을 놓고 어느 쪽을 당선작으로 정할까 고민했다는 이야기다. (일반적으로 공모전에서 심사위원들은 투고작의 저자 신상에 관해 수상작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일체 알 수 없다.) <미래로 가는 사람들>은 우주의 끝을 향해 나아가는 시간여행자의 일대기를 통해 우주에서의 인간의 의미와 생명의 의미, 생존의 의미 그리고 우주생성의 의미를 모색한 괴작(怪作)으로 겨우 중편의 길이에다 이처럼 방대한 주제들을 한데 포용하려 한 야심찬 시도였다.1)

김보영의 단편집 <멀리 가는 이야기>에 실린 작품들은 하나같이 한 방(!)을 지닌 수작들이지만 그중에서도 수상작인 <촉각의 경험> 외에 필자의 눈길을 유독 끈 것은 중편 <다섯 번째 감각>이다. <다섯 번째 감각>은 플롯 얼개만 놓고 보면 다분히 진부한 공식에 따라 전개된다. 즉 이 중편은 올라프 스태플든(Olaf Stapledon)의 <이상한 존 Odd John; 1935년>과 A. E. 밴 보그트(van Vogt)의 <슬랜 Slan; 1946년>에서처럼 남보다 월등히 특출한 능력을 타고 난 차세대 인종이 그러한 자질을 시기하는 보통 사람들에게 구박받고 소외되는 비극적인 시선과 궤를 같이 한다.

한 마디로 김보영의 이 중편은 젤라즈니류의 호쾌한 영웅이 초인적인 위력을 발휘하는 낭만적인 공식과는 처음부터 갈 길이 다르다. 로저 젤라즈니 풍(風)을 따르면서 만화가 아닌 소설로서의 리얼리티와 감정이입을 확보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올라프 스태플든 식으로 타고난 초능력 탓에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소외되고 핍박받는다는 설정 또한 소재가 되는 초능력에 대한 그럴듯한 묘사가 부족할 경우에는 심리소설로서 독자들을 끌어들이는 데 실패할 공산이 크다.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다. 무엇보다 앞의 두 방식 다 이제는 너도 나도 우려먹을 대로 우려먹은 나머지, 같은 출발점에 서서는 신선한 차별화가 극히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다섯 번째 감각>에 주목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이 중편이 올라프 스태플든의 전형적인 공식을 따르면서도 초능력 자체에 대한 작가 나름의 창의적인 소재와 기준을 설정해 진부해질 우려를 털어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단지 초인과 주류사회라는 식의 단순 이분법 대신 초인의 자질을 지녔지만 막상 그 능력만 빼고는 철저하게 사회적 약자인 여주인공을 내세움으로서, 남들과 다른 사람을 무조건 불온한 시선으로 바라보기 일쑤인 우리 사회의 편협함을 고발하는 사회의식을 담아냈다는 데 있다.

<다섯 번째 감각>에 나오는 초능력은 말 그대로 다섯 번째 감각, 즉 특출한 청각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초능력자들은 보통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소리에 대한 감수성과 변별력을 자랑한다. 이들은 남들이 여간해서는 듣지 못하는 작은 소리는 물론이고 미세한 진동과 음파까지 감지한다.

문제는 정부 비밀기관이 이러한 능력을 선천적 또는 후천적으로 개발한 사람들의 동태를 감시하며 불온시 한다는 것이다. 청력이 특출하게 뛰어나면 특수 장비의 이식 수술비 한 푼 안들이고 특수공작원 ‘소머즈’ 같은 능력을 발휘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 능력자는 도청기기가 따로 필요 없는 민완첩보원으로 써도 안성맞춤이리라.

하지만 정부 입장은 딴판이다. 정부는 이러한 인재들이 체제의 힘을 강고히 하는 데 기여하기는커녕 도리어 자기들끼리 몰려다니며 불온한 꿍꿍이를 꾸미지는 않을까 불안해 한다. 드디어 꼬리를 잡았다고 생각한 정부가 일제히 검거령을 내리자 단지 친목도모를 위해 신종 음악을 다루는 밴드의 일원이 됐다고 여긴 여주인공을 비롯한 청각 초인들은 혼비백산한다. 결과적으로 로마시대의 초기 기독교 포교처럼, 청각 초인들은 더욱 더 지하로 숨어들어 그네들만의 음악을 갈고 닦으며 새로운 예술세계를 탐구한다.

보통 사람인줄 알았던 여주인공이 스스로 청각 초인임을 각성하는 과정을 좇으면서 독자들은 어느덧 청각 초인들에게 심정적으로 동화된다. 일반적으로 초인소설은 보통사람인 독자들이 소외되고 핍박받는 선량한 초인 주인공들에 감정이입하게 만들되, 작품 속의 보통 사람들(일반 대중)이 보여주는 편협함과 비이성적인 증오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느끼게 유도한다.

▲ 김보영 작가 자신이 그린 자화상 캐리커쳐. 그림 솜씨도 개성이 돋보인다. ⓒ김보영


작가 김보영은 이러한 공식을 아주 매끈하게 매만져 자기 것으로 만든다. 여주인공은 이렇다 할 학벌도 돈도 없다. 시골 소도시에서 언니와 단둘이 살며 청소부 일이라도 해야 입에 풀칠할 수 있는 처지다. 그렇다고 자신의 삶을 저주한 적은 없지만 자신이 남들보다 특정 분야에서 뛰어난 잠재력을 지녔다는 허황된 망상을 품어본 적도 없다. 한 마디로 그녀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변두리 구석에서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는 전형적인 서민이다. 그러던 어느 날 언니의 교통사고를 계기로 우연히 자신의 초능력을 어렴풋이 깨달은 여주인공은 익숙하지만 부조리한 이쪽 세계와 낯설지만 가슴 설레게 하는 저쪽 세계 사이를 본의 아니게 넘나들며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여기서 그녀가 자의적인 선택 대신 상황의 논리에 끌려 다닌다는 설정이 독자와의 공감대 형성에서 중요한 포인트다. 소설 속의 여주인공은 남다른 자질을 타고났는지는 모르나 이제까지 불공정하고 부조리한 사회의 한 구석에서 조심조심 삶을 연명하는 데 급급했기에, 인생을 주체적으로 이끄는 기질과는 거리가 멀다. 

만일 그녀가 초능력에다 세파(世波)를 영악하게 헤쳐 나가는 능력까지 고루 갖췄다면 독자들은 이 ‘잘난뽕 여인’에게 이내 흥미를 잃었을지 모른다. 여주인공은 독자가 보기에 답답하리만치 현재의 삶에 안주하려 하지만 타고난 재능이 그렇게 놔두지 않는다. 천신만고 끝에 여주인공이 위기를 벗어나 자신의 참다운 힘을 각성하는 클라이맥스는 세상에서 가치 있고 존중 받을 만한 능력을 지닌 사람을 반드시 사회적 지위와 재산 그리고 학벌 따위의 잣대로만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아님을 시사한다.

사실 초능력자를 주인공으로 삼은 이야기는 시지각 예술인 만화와 영화에 비해 글씨투성이 소설에서 현실감 있게 이끌어내기란 쉽지 않다. 아마 <다섯 번째 감각>은 국내 프로작가가 발표한 과학소설들 중에 최초로 진지하게 초인을 다룬 사례가 아닌가 생각된다.

김보영은 창작 과학소설의 공력이 아직 취약한 국내 출판계에 자칫 허무맹랑한 무협지가 되기 쉬운 ‘초인’이란 하위 장르를 생동감 넘치게 자기 것으로 재창조하는 능수능란함을 보여줬다. 다시 말해 <다섯 번째 감각>은 초인이란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낯선 소재를 한국사회의 먹이사슬에서 밀려나지 않으려 안간힘 쓰는 지방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의 일상과 결합시켜 자연스럽게 공감을 이끌어낸다.





1) <미래로 가는 사람들>은 광속으로 이동하는 덕에 지구에 있는 사람들에 비해 나이를 거의 먹지 않는 시간여행자의 눈을 통해 거시우주론에 입각한 우주의 진화와 종말 그리고 그로 인한 새로운 창조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국내 작가들이 쉽게 덤비기 어려운 세계관과 관련지식을 보여준다. 아울러 이 중편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아들우주론, 블랙홀 이론, 시간여행이론, 광행차를 비롯한 빛의 특성 그리고 물질의 궁극붕괴가 일어나는 우주종말론에 이르기까지 우주론 전반에 관한 과학지식에 정통해 있지만 독자가 알기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자상한 배려를 잊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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