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칼럼

한국인의 고향, ‘신비의 왕국’ 찾았다(I)

이종호의 과학이 만드는 세상

우리나라 역사의 정론이라 볼 수 있는 <국사편찬위원회>의 2002년도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국가 형성 단원에서 우리나라에 언제 국가가 성립됐는가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청동기 문화의 발전과 함께 족장이 지배하는 사회가 출현했다. 이들 중에서 강한 족장은 주변의 여러 족장 사회를 통합하면서 점차 권력을 강화해갔다. 족장 사회에서 가장 먼저 국가로 발전한 것은 고조선이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고조선은 단군왕검(B.C. 2333). 단군왕검은 당시 지배자의 칭호였다.’



고조선을 건국한 단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고조선은 요령 지방을 중심으로 성장해 점차 인접한 족장 사회들을 통합하면서 한반도까지 발전했는데, 이와 같은 사실은 비파형 동검의 출토 분포로써 알 수 있다. 고조선의 세력 범위는 청동기 시대를 특징짓는 유물의 하나인 비파형 동검이 나오는 지역과 깊은 관계가 있다.



고조선의 건국 사실을 전하는 단군 이야기는 우리 민족의 시조 신화로 널리 알려져 있다. 단군 이야기는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전승돼 기록으로 남겨진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어떤 요소는 후대로 오면서 새로 첨가되기도 하고 또 어떤 요소는 없어지기도 했다.



신화는 그 시대 사람들의 관심이 반영되는 것으로 역사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이것은 모든 신화에 공통되는 속성이기도 하다. 단군의 기록도 마찬가지로 청동기 시대의 문화를 배경으로 한 고조선의 성립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이때 환웅 부족은 태백산의 신시를 중심으로 세력을 이루었고, 이들은 하늘의 자손임을 내세워 자기 부족의 우월성을 과시했다. 또 풍백, 우사, 운사를 두어 바람, 비, 구름 등 농경에 관계되는 것을 주관하게 했다.’



이 글을 읽으면 단군이 신화적 존재인지 역사적 실존인물이라는 말인지 다소 혼동스럽다.



앞의 글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고조선은 단군왕검이 건국했다고 한다’이다. ‘건국했다’와 ‘건국했다고 한다’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한마디로 고조선의 건국 사실을 자신 있게 명시하지 못하고 남의 입을 빌려 표현한 것과 다름 아니다.



<실증사학에 의한 고대사>



이러한 모호한 기술은 일제 강점기를 벗어난 후 실증사학(實證史學)이 뿌리 내리면서 기록으로 남지 않은 역사는 기술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역사방법론이 주류를 이루었음에서 기인한다.



역사학계에서는 두계 이병도(李丙燾) 박사와 그를 잇는 학파를 실증주의 학파라고 부른다.



학계의 통설에 의하면 실증주의(positivism)를 특징짓는 명제는 과학만이 가장 타당한 지식이며 사실만이 지식의 가능한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실증주의는 사실과 과학에 의해 확인된 법칙을 넘어서는 어떠한 힘이나 실체의 존재 및 그에 대한 인식을 거부하며 어떠한 형이상학이나 과학적 방법으로 환원되지 않는 연구 방법을 배격한다.



이는 역사학을 하나의 과학으로 보려는 학문적 연구 태도와 관점, 다시 말하면 역사의 과정과 자연의 과정을 동일한 종류의 것으로 보고 자연 과학의 방법을 역사의 해석에 적용하려는 입장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신복룡 박사는 썼다.



이들은 최종 자료를 문헌자료에 의존한다. 아무리 많은 고고학 자료가 있다 해도 자의적인 해석이 되기 쉬우므로 그것이 갖는 의미는 최종적으로 문헌자료에 근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문헌자료를 근거로 한다는 것에도 문제점이 있음을 자인한다. 문헌 자료란 글자가 생긴 후에 만들어진 것인 데다가 당시의 사회 모습을 체계적으로 설명해 줄 정도로 자세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실증사학에서도 양측을 병용해 접근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이병도 박사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조선의 병합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조선사』를 편찬한, 이완용이 고문으로 있던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 >의 일원이며 이후 한국 사학계를 주도했던 진단학회(震檀學會)를 이끌었고 해방 이후에도 1950~1960연대에 『한국사』 전 6권을 발간하는 등 한국 사학계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실증사학은 영국·불란서·독일·미국·일본 등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 지배수단으로 이용하던 학문이라는 데 문제점이 도사리고 있다. 원래 실증사학은 독일의 역사학자 랑케의 ‘역사는 주관적인 판단 없이 역사적 사실을 실증 그대로 기술해야 한다’는 주장을 기본으로 한다. 유적과 유물도 과학으로 실증된 사실을 인정해야 하며 사료의 경우 주관적 판단이 들어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배제한다. 당연히 민족사학 등은 비판의 대상인데 일반적으로 실증사학은 짧은 역사를 가진 서양사회가 오랜 역사를 가진 동양사회를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등장한 학문이라는 데 문제점이 도사린다.



이 문제는 이곳에서 다룰 성질이 아니므로 더 이상 거론하지 않지만 여하튼 실증사학을 표방하는 측은 서기 1281~1283년경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일연의 『삼국유사』에 적힌 단군을 실존인물로 대접하기에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한마디로 기원전 2333년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단군이 인정된 역사>



2007년 발간된 교육인적자원부의 『국사』에서는 한반도 청동기 보급 시기를 기존에 알려진 것보다 최대 1000년까지 앞당기고 고조선 건국도 공식 역사로 편입했다. ‘고조선과 청동기 문화’ 단원도 다음과 같이 수정했다.



‘청동기 문화의 발전과 함께 족장이 지배하는 사회가 출현했다. 이들 중에서 강한 족장은 주변의 여러 족장 사회를 통합하면서 점차 권력을 강화해갔다. 족장 사회에서 가장 먼저 국가로 발전한 것은 고조선이었다.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했다(기원전 2333). 단군왕검은 당시 지배자의 칭호였다.



고조선은 요령 지방을 중심으로 성장해 점차 인접한 족장 사회들을 통합하면서 한반도까지 발전했는데, 이와 같은 사실은 비파형 동검과 고인돌의 출토 분포로써 알 수 있다. 고조선의 세력 범위는 청동기 시대를 특징짓는 유물의 하나인 비파형 동검과 고인돌이 나오는 지역과 깊은 관계가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고조선은 단군왕검(檀君王儉)이 건국했다고 한다(기원전 2333년).’ 부분이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했다.’로 수정됐고 청동기 시대를 특징짓는 유물로 고인돌이 비파형 동검과 함께 삽입돼 우리 역사에서 고인돌의 비중을 높였다. 또한 ‘고조선과 청동기 문화’ 단원도 다음과 같이 수정했다.



■ 2002년도 『국사』 :



‘신석기 시대를 이어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10세기경에, 만주 지역에서는 이보다 앞서는 기원전 15~13세기경에 청동기 시대가 전개됐다. 청동기 시대에는 생산 경제가 그 전보다 발달하고, 청동기 제작과 관련된 전문 장인이 출현했으며, 사유 재산 제도와 계급이 나타나게 됐다. 이에 따라 사회 전반에 걸쳐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됐다.’



■ 2007년도 『국사』 :



‘신석기시대 말인 기원전 2000년경에 중국의 요령(랴오닝), 러시아의 아무르 강과 연해주 지역에서 들어온 덧띠새김무늬 토기 문화가 앞선 빗살무늬 토기 문화와 약 500년간 공존하다가 점차 청동기 시대로 넘어간다. 이때가 기원전 2000년경에서 기원전 1500년경으로, 한반도 청동기 시대가 본격화된다. 고인돌도 이 무렵 나타나 한반도의 토착 사회를 이루게 된다. 청동기 시대에는 생산 경제가 그 전보다 발달하고, 청동기 제작과 관련된 전문 장인이 출현했으며, 사유 재산 제도와 계급이 나타나게 됐다. 이에 따라 사회 전반에 걸쳐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됐다.’



이와 같은 수정에 대해 <국사편찬위원회>의 설명은 당당하다. 장득진 실장은 “그동안 사서에는 나오지만 고고학적 증거가 불충분했던 고조선 건국 시기가 최근 연구 성과로 근거가 뚜렷해짐에 따라 서술 방식을 변경했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한 증거로 고고학적 유물의 발굴과 과학적 연대 측정 결과를 제시했다. 그동안 한반도 청동기시대는 기원전 10세기쯤부터라고 주장했으나 그동안 발견된 유적과 유물에 대한 연대 측정 결과가 과거보다 앞선 시기로 나타나므로 이를 수정하지 않으면 안되게 됐다는 것이다.



진주 남강 수몰지구에서 확인된 각종 청동기 시대 유적과 유물은 연대가 기원전 10세기를 뛰어넘어 기원전 15세기 무렵으로 조사됐고 옥방 유적의 집자리터에서 나온 목탄 2점에 대한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는 각각 기원전 1590~기원전1310년과 기원전 1620~기원전 1400년이라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 이형구 교수는 탄소연대 측정 전까지 학계에서는 대체로 남강지역의 유적 연대를 기원전 5세기∼기원전 4세기라고 설명했다고 지적했다.



<건국대박물관>이 다른 남강 수몰지구에서 발굴한 청동기 시대 주거지 출토 목탄 2점을 측정한 결과에서도 기원전 1420~기원전 1100년, 기원전 1400~기원전 1100년으로 나타났고 <경남대박물관> 역시 서울대학교와 캐나다 토론토대에 시료측정을 의뢰한 결과 기원전 10세기를 뛰어넘었다고 발표됐다. 남한에서는 유일하게 청동 도끼가 출토된 속초 조양동 청동기 시대 유적 또한 기원전 1206~기원전 830년으로 측정됐다.



기원전 1500년을 상회하는 유물도 계속 발견됐다. 강원 지역의 경우 청동기 시대는 남강 유역보다 더욱 올라간다. 최몽룡 교수는 강원도 춘천시 신매리에서 출토된 청동기는 기원전 1510년경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강릉 교동 주거지 1호의 경우 그 연대가 무려 기원전 1878~기원전 1521년으로 나왔고 다른 두 곳의 주거지도 중심 연대가 기원전 15세기 무렵인 것으로 나타났다. <조선대박물관>이 발굴한 전남 순천 죽내리 청동기 시대 주거지도 탄소 연대 측정을 한 결과 기원전 16세기~기원전 15세기라는 결과가 나왔다는 발표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양평 양수리의 두물머리고인돌의 덮개돌 밑 15센티미터 되는 무덤방 안에서 발견된 숯의 연대측정은 3,900±200B.P(MASCA 계산법으로는 4,140~4,240B.P)라는 절대연대를 보였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서강대의 이종욱 교수는 “중국이 고조선 건국 장소인 중국 요동지역 청동기 도입 시기를 앞당기고 있는데 한반도 청동기 도입 시기를 앞당기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계속)



참고문헌

『한국사 새로 보기』, 신복룡, 풀빛, 2001.

『동북아 청동기시대 문화연구』, 최몽룡 외, 주류성, 2004

「고조선, ‘역사’의 발자취를 찾았다」, 박종진, 주간한국, 200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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