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젠베르크의 “철학과 물리학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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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에서 책 한 권을 발견했다. 하이젠베르크의 《철학과 물리학의 만남》(1958년 출간된 영어판 제목 : Physics and Philosophy, 독일어판은 이듬해 출간되었다.)이다. 지난 번에 2회에 걸쳐 하이젠베르크의 저서 《부분과 전체》를 읽으면서, 과학에서 토론과 대화의 중요성, 과학자의 역할, 과학과 언어의 문제에 관해 다루었다. 《철학과 물리학의 만남》에도 역시 이와 비슷한 주제들이 다루어지고 있는데, 이 글에서는 불확정성의 원리를 중심으로 양자론과 인간 인식 문제와 관련한 주목할 만한 몇 구절을 간추렸다.



물리학자들이 입자냐 파동이냐의 문제로 논쟁할 때, 닐스 보어는 초기 양자론의 입장과는 달리 파동설을 무시할 수 없음을 확신하여, 입자설과 파동설 둘 다 지지하게 되었다. 그는 이 양면성을 서로 대립, 모순된 관계로 보지 않고 서로 보완하는 관계로 보았다. 한 개체가 파동이면서 동시에 입자일 수는 없기 때문에 이 두 개념은 상호 배타성을 지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보적 관계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보어는 양자론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자주 상보성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닐스 보어가 옳았다. 동일한 실재에 대한 이원론적인 기술방법은 이제 더 이상 모순이 아니다. 왜냐하면 기술방법상에서 야기되는 모순을 포괄해 버리는 수학적 공식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파동방정식이다. 양자론을 이해하기 위한 과정에서 진정한 난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통해서 드러난다. 즉, 원자상태에서 ‘실제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다. 여기서 ‘실제적’이라는 표현은 양자론이 고전적 개념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러한 암시가 양자론에서 가장 중요한 확률함수를 낳았다.



확률함수는 원자상태에 대한 인간의 주관적 인식을 표현하는 경향성, 혹은 가능태를 표시하는 수학적 표현이다. 우리는 관찰의 결과를 완전하게 객관화할 수 없다. 두 관찰 행위 사이에 발생하는 차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관찰하는 방식에 따라 결과의 차이가 생긴다면, 이는 곧 과학이론에 주관주의가 개입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확률함수는 양면성을 포함하고 있다. 하나는 객관적인 사실 자체이고 또 한 가지는 그 사실을 관찰하는 관찰자의 인식 과정이다. 즉, 확률함수는 경향성이라는 객관적 요소와 불완전한 인식이라는 주관적 요소를 함께 갖고 있다.



확률함수는 초기 상태에 확률 단위값(즉 확률적이 아닌 완전히 확실한 값)이 부여될 때만 객관적 사실을 나타낸다. 운동하는 전자의 위치와 속도를 관찰한다고 할 때, 이 때의 ‘관찰’이란 의미는 당시의 실험상황 내에서만 정확성을 갖는 관찰을 의미한다. 즉 다른 사람이 다른 상황에서 관찰했을 때 더 정확한 값을 얻을 수도 있다. 실험 과정에서 생기는 오차는 전자 자체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전자에 대한 관찰자의 인식이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같은 인식의 불완전성 혹은 인식의 주관성을 확률함수로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다. 확률함수의 해(solutions)를 철학적 용어로 기술하면,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변한 결과를 의미한다. 확률함수는 양자론의 중심개념이다. 뉴튼 역학과는 달리, 확률함수는 어떤 사건들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관찰과정에서의 가능사태 전체조합을 표현한다.



우리는 왜 원자세계를 반드시 객관적으로 기술해야만 하는가? 고전물리학은 우선 신념에서부터 출발했다. 혹 어떤 이는 환상에서부터 출발했다고 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 즉 인간이 없더라도 이 세계는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한다. 런던은 우리가 그것을 보고 있든지 그렇지 않든지 상관없이 존재한다. 고전물리학은 인간의 주관과 별개로 세계가 존재할 수 있다는 신념을 추상화한 바로 그것이다. 코펜하겐 해석에서는 과거와 같이 주관과 객관의 엄격한 분리를 주장하지 않는다. 완전한 객관성이란 환상일 수도 있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양자론은 패러독스에서 출발했다. 분명한 것은 객관성이란 표어 아래 인간 정신이 매몰될 수는 없다는 점이다. 바이제커가 이런 말을 했다. “자연은 인간에 앞서 있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과학에 앞서 있다.” 앞 문장은 고전물리학의 정당성을 뒷받침하고, 뒤의 문장은 양자론의 패러독스를 인정한다. 우리가 관찰하고 있는 것은 그 자체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인간의 자연에 대한 질문방식 속에 나타난 자연이다. 물리학에서 우리의 과학적 작업은 자연에 대하여 어떤 방식으로 질문을 해야 할 것인가를 포함하고 있다. 자연은 우리와 떨어져서 멀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은 존재의 드라마다. 그 속에서 인간은 배우도 되고 관객도 된다. 자연은 나와 관계될 때 진정한 모습을 드러낸다.



실체의 규명은 철학적 탐구의 주된 과제인데, 만약 오늘날의 결과를 과거 철학의 언어로 표현하고자 한다면, 질량과 에너지는 동일한 실체에 대한 두 가지 서로 다른 형태라고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실체개념의 불변성은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 현대물리학은 어떤 면에서 ‘변화 자체가 만물의 근원적 원리’라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상과 같은 맥락을 지닌다. 원자론의 시초는 레우키푸스와 데모크리토스에 의한 고대 유물론이었다. 고대의 자연철학은 경험적 태도를 많이 결여하고 있지만 현대 과학적 사유에 근접한 많은 문제를 제기한다. 철학에서의 인식론과 존재론의 문제는 이제까지 그러했듯 앞으로 과학에서도 주된 근본 문제가 될 것이다. 철학과 과학이 서로 등을 돌리지 않고 함께 나아갈 때 패러다임을 바꾸는 위대한 성과를 낳을 수 있다. 닐스 보어를 비롯해 물리학을 뒤흔들었던 20세기 초반의 과학자들, 하이젠베르크가 그것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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