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기획·칼럼

프랑스 대혁명을 만나다

<1789년 테니스 코트의 서약>

역사적 사실을 다룬 그림들 중 가장 많은 주제는 바로 ‘프랑스 대혁명’이다.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 습격은 프랑스 대혁명의 상징이자 현재 프랑스 국경일이다. 바스티유 감옥의 습격은 루이 16세와 그의 국민들 사이에 돌이킬 수 없었던 불화가 원인이었다.하지만 프랑스 혁명의 기운은 1700년대 들어서 몽테스키외와 루소의 진보적이며 자유로운 이상을 중심으로 사회 정치적인 비약적 발전을 이끌었다. 특히 루소의 계몽주의 운동은 18세기 프랑스 문인, 과학자, 사상가들이 지지하면서 유럽의 엘리트 계층을 사로잡았다.

자유주의 사상이 엘리트 계층과 시민들을 사로잡으면서 절대 왕정에 대한 불만이 쌓이게 되었고, 결국 1789년 6월 20일 제 3계급 대표자들이 프랑스 헌법 제정에 관해 서약하기에 이른다.

루이 16세는 국민회의가 다시 열리지 않도록 3부 회의가 열리는 회의장을 찾아 왕실 병사들을 시켜 모임을 차단한다. 하지만 제 3계급의 대표와 성직자들이 회의장 대신 베르사이유의 테니스 코트에서 만나 ‘헌법을 제정하고 사회 질서가 회복될 때까지 해산하지 않을 것’을 서약했다.

당시 프랑스 절대주의 체제의 전통적인 삼부회 조직은 왕의 자문조직으로 성직자, 귀족, 평민 등 3개 계급의 대표들로 구성되었다. 1302년 필리프에 의해 설치된 이 기구는 1615년에 소집된 것이 마지막이었다. 루이 16세는 1789년 국가의 심각한 재정적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삼부회를 다시 소집했다.

제 3계급은 성직자, 귀족이 아닌 모든 사람이 이 계급에 속해 있었다. 실제로 전 인구에 98%가 해당되었다. 삼부회의 진정서는 불평불만을 기록한 것으로 삼부회의 대표들에게 보내는 국민들의 제안과 요구가 담겨 있었다.

루이 16세가 심각한 국가의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가 1774년 왕위에 오르자 1778년 영국에 대항해 일어난 미국의 독립전쟁에 개입해 재정이 악화되었다. 더군다나 국토의 35%가 넘는 토지를 소유함으로써 막강한 부를 가지고 있던 성직자와 귀족은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특권이 있었으며, 세금 부담은 오로지 제 3계급에게만 해당되었다. 제 3계급의 세금 부담은 경제 발전을 둔화시키고 만성적인 가난에 시달리게 하는 원인이 된다.

-1790년~1791년, 캔버스에 유채, 65*88.

<1789년 테니스 코트의 서약>-1790년~1791년, 캔버스에 유채, 65*88. ⓒ 파리 카르나발레 박물관 소장

프랑스 대혁명의 시작을 알렸던 프랑스 헌법을 제정한 베르사이유의 테니스 코트에서의 서약을 그린 작품이 다비드의 <1789년 테니스 코트의 서약>다.

화면 중앙 탁자 위에 서 있는 남자가 국민회의 의장 장 실뱅 바이다. 그는 서약서를 읽고 있다. 탁자 위의 남자 아래 흰색 옷을 입은 신부가 두 명의 남자를 끌어  안고 있다. 흰색 옷을 입은 사람은 가톨릭 신부이며, 그의 손을 잡고 있는 남자는 시토회의 수도사 돔 제를이고(실제로 6월 20일의 모임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중앙에 두 사람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남자는 신교도 목사인 리보 생테티엔이다. 세 사람이 포옹하고 있는 모습은 종교적 관용의 시대가 도래 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화면 오른쪽 하단 의자에 앉아 팔짱을 끼고 앉아 있는 남자가 국민회의 의원이지만 반대했던 요제프 마르탱 도치다. 다비드는 팔짱을 끼고 있는 그의 모습을 통해 부끄러워 의기소침한 모습으로 묘사했다. 하지만 실제로 마르탱은 의회에서 자신의 의견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창밖으로 몸을 내민 사람들은 서약에 대해 대중들의 관심이 많다는 것을 나타낸다.

자크 루이 다비드<1748~1825>는 프랑스 대혁명을 그린 중요한 예술가 중 한 사람으로, 그는 예술을 통해 사회, 정치적 가치를 강조하고자 했다. 다비드는 1790년 헌법을 위한 동지회<자코뱅당>으로부터 이 사건을 기념할 작품 제작을 요청받아 당원 전부를 모두 담을 수 있게 거대하게 그릴 예정이었다. 하지만 자금 부족과 정치적 기류로 인해 다비드는 이 작품을 작게 제작한다.

테니스 코트에서 서약이 있은 3일 후 1789년 6월 23일 논쟁이 일어난다. 루이 16세는 삼부회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해산하라고 명령했지만 제 3계급의 대표자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한 시간이 지나자 왕의 의전 장관인 앙리 에브라르 드 드뢰 브레제는 왕의 지시를 다시 전하고자 회의장으로 돌아왔지만 제 3계급의 대표 미라보 백작이 ‘우리는 인민의 뜻에 의해 이곳에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총검에 찔려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곳을 떠날 수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루이 16세의 삼부회 소집은 제 3계급의 대표들에게 유리한 기회가 되었고, 결국 루이 16세는 새로운 국민회의의 싹을 없애버리려고 했지만 그들의 완강함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19세기(년도 미상), 캔버스에 유채, 71*104.

<미라보와 드뢰 브뢰제>-19세기(년도 미상), 캔버스에 유채, 71*104. ⓒ 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

1789년 6월 23일, 미라보 백작과 의전 장관과의 논쟁을 그린 작품이 프라고나르의 <미라보와 드뢰 브뢰제>다.

화면 왼쪽 오른팔을 들고 긴 의자 위에 서서 입구 쪽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가 미라보 백작이다. 미라보 백작은 천장에서 쏟아지는 빛을 받고 있다. 빛은 그가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을 상징한다. 주변 인물들이 국민회의 의원들로 미라보 백작을 바라보면서 오른팔을 들고 있는 것은 미라보 백작의 주장을 지지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미라보 백작은 자유주의자이자 웅변가로, 귀족 출신이었지만 제 3계급의 대표로 선출되어 국민회의를 설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입구 쪽에 양팔을 벌리고 서 있는 인물이 의전 장관 드뢰 브레제 후작이다. 그가 두 팔을 벌리고 있는 것은 제 3계급을 향해 왕의 지시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을 나타낸다. 하지만 미라보 백작의 반론을 들어야만 했다.

기록에 의하면 드뢰 브레제가 미라보의 답변을 보고하기 위해 루이 16세에게 갔는데, 왕은 미라보 말에 대해 ‘그것이 어떻든 무슨 상관이냐? 그대로 나둬라.’라고 외쳤다고 한다.

알렉상드르 프라도나르<1780~1850>의 이 작품에서 배경의 건물은 베르사이유에 있는 므뉘 플레지르로 이 곳은 삼부회가 실제로 열렸던 곳이다. 프라고나르는 미라보 백작을 향해 모자를 들고 있는 국민회의 의원들의 자세나 태도를 통해 당시 논쟁을 과장되게 표현하고 있다. 실제로는 미라보 백작에 주장을 지지하기는 했지만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하지는 않았다.

(2512)

뉴스레터 구독신청
태그(Tag)

전체 댓글 (0)

과학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