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칼럼

파스퇴르의 애국심과 플랑크의 두 번째 업적

[TePRI Report] 세계사 속 과학기술

과학자로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영광 중 하나는 미래 과학의 역사를 짊어지고 오래 존속할 연구기관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것일 성싶다. 파스퇴르와 플랑크는 그런 영광을 실컷 누리는 대표적인 과학자다.

프랑스 화학자 겸 미생물학자 루이 파스퇴르가 1887년 파리에 설립한 파스퇴르 연구소는 오늘날 감염병과 백신에 대한 연구에서 세계 최고로 꼽힌다. 국내에도 한국파스퇴르연구소가 있는데, 이 기관은 프랑스 파스퇴르연구소와 한국과학기술원의 협력으로 2004년에 설립되었으며, 전 세계 24곳의 연구소를 아우르는 파스퇴르연구소 국제 네트워크의 한 부분이다.

‘양자(quantum)’의 개념을 처음 도입한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막스 플랑크 협회는 수많은 막스 플랑크 연구소들을 거느리고 있다. 위치는 주로 독일이지만, 다른 유럽 국가들과 미국에도 막스 플랑크 연구소들이 있어서, 2017년 집계로 총 84곳의 연구기관이 플랑크의 영광을 드높인다.

예컨대 로마에는 막스 플랑크 미술사 연구소가 있다. 이 사례에서 보듯이 막스 플랑크 연구소들이 다루는 분야는 자연과학에 국한되지 않는다. 크게 세 분야를 꼽으면, 생물학/의학, 화학/물리학/기술, 그리고 인간과학(human science)이 그 연구소들의 관심사다. 플랑크가 물리학자였을 뿐 아니라 상당한 정도로 철학자이기도 했음을 감안하면, 막스 플랑크 협회의 폭넓은 관심을 납득할 만하다.

파스퇴르는 잘 알려진 애국자였다. “과학은 조국이 없을지라도, 과학자는 조국을 가져야 하며 자신의 연구가 세상에서 발휘할 수 있는 영향력을 조국에 귀속시켜야 한다.”라는 그의 발언은 10여 년 전 우리나라에서도 그리 유쾌하지 않은 방식으로 회자된 바 있다. 아무도 황우석의 몰락을 예견할 수 없었던 2005년 6월, ‘국민과학자’는 관훈토론회에서 “과학에는 국경이 없다. 그러나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라고 말했다.

역사를 다룰 때 늘 명심해야 하는 바지만, 개별 발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발언의 맥락이다. 파스퇴르의 발언은 프랑스와 프로이센이 맞붙은 전쟁(1870년)의 여파 속에서 나왔다. 프랑스는 패배했고, 승리한 프로이센은 독일을 통일하면서 중부 유럽의 강대국으로 떠올랐다. 당시에 파스퇴르는 50대의 중견 과학자로서 한창 큰 영향력을 발휘할 때였다. 그러니 그의 입에서 저런 애국적 발언이 나온 것을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 전쟁은 조국을 새삼 일깨운다.

오늘날 파스퇴르는 독일의 로베르트 코흐와 함께 병원체 이론을 확립한 생물학자 혹은 의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가 원래 몰두한 연구 주제는 발효, 특히 맥주와 포도주의 발효였다. 그는 1876년에 저서 ‘맥주에 대한 연구’를 출간했는데, 이 책의 독일어 번역을 허가해달라는 요청에 퇴짜를 놓았다. 이쯤 되면 좀 심하다 싶을 수도 있겠는데, 이 행동을 납득하려면 파스퇴르의 정치적 활동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같은 해에 그는 프랑스 상원 의원에 출마했다. 비록 결과는 참담한 낙선이었지만 말이다.

파스퇴르는 1876년 ‘맥주에 대한 연구’라는 책을 출간했다. ⓒ게티이미지

독일의 자연과학 연구소들에는 ‘막스 플랑크’라는 이름이 다 붙어있다고 생각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만큼, 독일의 제도권 과학계에서 플랑크의 지위는 압도적이다. 하지만 그는 파스퇴르처럼 열렬한 애국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다음과 같은 그의 발언은 그가 집단주의적 애국심에 상당히 적대적이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게 만든다.

“과학은 장례식이 열릴 때마다 한 걸음씩 진보한다.”

장례식이란 구세대 과학자의 죽음을 뜻한다. 이런 말을 남긴 것을 보면, 플랑크는 선배 과학자들의 완고함 앞에서 꽤나 절망했던 모양이다.

파스퇴르와 플랑크의 차이는 어느 정도 개인의 기질에서 비롯되었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시대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1822년생인 파스퇴르는 제국주의적 애국심으로 물든 빅토리아시대를 살다가 1895년에 사망했다. 그의 생애 동안에 프랑스 과학계는 오랜 앙숙인 영국 과학계뿐 아니라 새롭게 떠오르는 독일 과학계와도 경쟁해야 했다.

반면에 플랑크는 독일 과학계의 실력이 이미 상당히 탄탄해진 1858년에 태어나 나치의 광란과 2차 세계대전의 참상까지 경험하고 1947년에 사망했다. 플랑크가 파스퇴르처럼 애국심을 품고 과학자의 조국을 강조했다면, 그것이 오히려 놀라운 일일 터이다.

파스퇴르는 아직 노벨상이 없던 시절의 인물이어서 수상의 기쁨을 누리지 못했지만, 플랑크는 열을 받아 뜨거워진 물체가 내는 빛의 에너지-진동수 분포를 설명하기 위해 ‘양자’의 개념을 도입한 공로로 1918년에 노벨상을 받았다. 당연히 이것이 그의 최대 업적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에 못지않게 큰 둘째 업적이 있다고 말한다. 그 업적은 그가 아인슈타인을 발탁한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진짜 천재인지 아니면 그냥 괴짜인지를 놓고 과학계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1905년, 플랑크는 스위스 특허청 직원이었던 그를 베를린으로 불러 과학자로서 일할 기회를 주었다.

플랑크는 스위스 특허청 직원이었던 아인슈타인에게 과학자로서 일할 기회를 제공했다. ⓒ 게티이미지

이것은 아주 흥미로운 선택인데, 왜냐하면 플랑크의 ‘양자’가 가설적 개념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엄연히 실재함을 최초로 보여준 인물이 아인슈타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플랑크가 자신을 편든 아인슈타인을 기쁘게 발탁한 것일까? 만약에 그렇다면, 당연한 발탁, 전혀 흥미롭지 않은 발탁일 것이다. 진실은 정반대다. 플랑크는 내심 ‘양자’의 개념이 폐기되거나 대폭 수정되기를 바랐다. 어쩌다 보니 ‘절망의 몸부림’으로 에너지의 불연속성과 ‘양자’를 제안하긴 했지만, 플랑크 본인도 그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런데 신세대의 젊은이 아인슈타인이 이른바 광전효과에 대한 설명을 통하여 ‘양자’를 빼도 박도 못할 실재로 확립했고, 어느새 구세대가 된 플랑크는 내심 못마땅했을 것이 틀림없는 그 젊은이가 새로 내놓은 특수상대성이론의 잠재력을 믿고 그를 발탁한 것이다. 이 어찌 흥미롭지 않을 수 있겠는가. 플랑크가 말한 ‘장례식’은 그 자신의 장례식일 수도 있다는 점을 주목하라. 다행히 그는 진짜 장례식을 맞이하기 전에 이를테면 사상적 장례식을 감내함으로써 구세대 과학자로서는 예외적으로 과학의 진보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역사는 흐르고, 장례식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오늘날의 수많은 막스 플랑크 연구소들은 플랑크의 첫째 업적보다 둘째 업적을 더 많이 기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 이 글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서 발간하는  ‘TePRI Report’ 로부터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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