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칼럼

파리의 가로등

[TePRI Report] 세계사 속 과학기술

문헌 기록을 기준으로 말하면, 유럽 최초의 가로등은 1667년 파리에 설치되었다. 곧이어 암스테르담(1669), 함부르크(1673), 토리노(1675), 베를린(1682), 코펜하겐(1683), 런던(1684)의 길거리에서도 인공조명이 빛나기 시작했다. 물론 최근에 LED로 바뀌는 중인 우리 곁의 가로등처럼 찬란했을 리는 없다. 우리 사찰의 석등처럼 네모난 틀 안에서 처음엔 촛불이, 나중엔 기름 불과 가스 불이 타오른 것이 전부였다.

1667년이면 스피노자가 사망하면서 대표작 ‘윤리학’을 출판한 때로부터 10년 전, 뉴턴의 ‘프린키피아’가 출판되기 20년 전이다. 왜 역사는 바로 그 해를 가로등의 탄생 시점으로 선택했을까? 역사적 사건의 원인들을 빠짐없이 열거하려는 것은 당연히 무모한 시도일 테지만, 한번 재미 삼아 대답을 시도해보자.

유럽 최초의 가로등은 1667년 파리에 설치되었다. ⓒ 게티이미지

유럽의 17세기는 과학사에서는 과학혁명의 곡선이 뉴턴이라는 정점을 향해 가파르게 상승하던 때였지만, 더 큰 맥락에서는 이른바 ‘근대’의 출발점이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문장으로 우리의 집단 기억에 각인된 데카르트(1596-1650)가 바로 17세기 전반기를 대표하는 철학자다. 역사학자 겸 철학자 미셸 푸코도 17세기를 중시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이라는 개념은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의 인간과학들에 의해 구성되었다. 물론 유지되기 어려운 주장이지만, 인간에 대한 관심이 근대에 더 두드러진다는 것만큼은 명백한 사실이다.

같은 17세기지만 그 전반기와 후반기는 사뭇 달랐다. 전반기는 어둠, 후반기는 밝음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부유럽은 1648년까지 30년 전쟁의 참상을 겪었다. 게다가 지금과 정반대로 이른바 소빙하기의 영향으로 유럽의 기후가 몹시 추웠다. 약간 더 이른 16세기에 활동한 네덜란드 화가 피터르 브뤼헐의 겨울 풍경화들은 그 정갈함 때문에 왠지 포근하기도 하지만 당시의 삶이 녹록지 않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오늘날 네덜란드에서 눈을 구경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만, 브뤼헐의 그림 속 네덜란드는 눈과 얼음의 나라다. 팍팍한 삶은 분노를 키우기 마련이다. 17세기 전반기가 마녀사냥의 절정기였던 것은 우연이 아닐 성싶다.

반면에 17세기 후반기는 프랑스의 루이 14세를 비롯해서 ‘태양’으로 자처하는 군주들이 활보하던 시대였다. 지중해권에 머물던 유럽의 패권이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등의 대서양 연안 국가들로 옮겨가는 과도기의 혼란은 30년 전쟁을 통해 대체로 수습되었고 식민지로부터 본격적으로 부가 유입되기 시작했으며 혹독한 추위도 어느 정도 누그러들었다. 바야흐로 낙관론이 고개를 들 만했고, 철학에서는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가 시대의 요구에 부응했다. 이들이 인간의 합리적 능력에 건 희망은 지금 봐도 거대하다. 어쩌면 처음 눈 뜬 사람이 마주한 세상이 가장 생생한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특히 라이프니츠(1646-1716)는 17세기 후반기의 낙관론을 대표한다고 할 만하다. 위대한 수학자이기도 한 그는 오늘날 디지털 혁명의 주춧돌인 이진법을 창안하고 계산기계를 연구했으며 사람들 사이의 모든 분쟁을 명쾌한 계산으로 해결할 가능성을 모색했다. 의견이 엇갈리는 양편이 서로 싸우지 말고 테이블에 마주앉아 “계산해봅시다(calculemus)”라고 합의한 후 모종의 보편 계산법을 실행하여 명쾌한 해답에 도달할 수 있기를 그는 바랐다. 지금도 일부 사람들은 마치 인공지능이 인류의 오랜 문제들을 일거에 해결해주기라도 할 것처럼 낙관론을 펼치는데, 그들은 라이프니츠의 후예라고 할 만하다.

요컨대 17세기 후반기는 유럽인들이 근대와 이성이라는 새로운 횃불을 들고 오랜 어둠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한 때라고 할 수 있다. 1667년 파리의 가로등이 대표적이긴 하지만, 일상생활에서의 인공조명 사용도 이 시절에 본격화됐다. 이른바 ‘밤 생활(night life)’이 개척되기 시작한 것이다. 어스름해지면 서둘러 조촐한 마지막 식사를 한 후 잠자리에 들던 사람들이 촛불을 켜고 둘러앉거나 가로등이 켜진 거리를 걸어 술집이나 극장에 가기 시작했다. 그런 ‘밤 생활’을 얼마나 누리는가는 소득 수준과 직결된 문제였다.

‘밤을 가로질러’의 저자 에른스트 페터 피셔가 인용한 17세기 후반기의 어느 글은 이렇게 전한다. “200년 전에 파리 사람들은 하루 중에 가장 잘 차린 식사를 정오 즈음에 먹었다. 지금 파리의 수공업자는 그런 정식을 2시에 먹고, 상인은 3시, 공무원은 4시, 벼락부자는 5시, 장관은 6시에 먹는다.”

어둠을 향해 나아가는 횃불은 강렬한 명암의 대비를 일으킨다. 이 시절, 그러니까 미술사에서 말하는 바로크 시대의 회화에서 어둠이 능동적 요소로 활용되고 명암의 대비가 뚜렷해지는 것은 아마도 인공조명의 일상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대표적인 화가로 렘브란트(1606-1669)가 있다.

17세기 후반기부터 일상생활에서의 인공조명 사용이 본격화됐다. ⓒ 게티이미지

그는 오랜 세월에 걸쳐 수많은 자화상을 그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빛과 어둠의 얽힘을 마주한 사람은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것일까? 근대철학의 일반적인 경향을 감안하면,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빛과 어둠이 도시에서 만난 것은 바로크시대가 처음이었을지 몰라도, 지구상에서 빛과 어둠은 낮과 밤이라는 이름으로 늘 서로의 꼬리를 무는 한 쌍이다. 요새처럼 겨울이 오고 성탄절이 가까워지면, 밤의 세력이 강해질 대로 강해져 마치 낮을 몰아내기라도 할 것처럼 느껴진다. 오래전 동굴에서 생활하던 우리의 조상들은 그런 밤을 훨씬 더 위협적으로 느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니 동지가 지나고 며칠 후 다시 낮이 길어진 것을 실감할 때의 기쁨은 얼마나 극적이었겠는가!

많이들 알다시피 성탄절의 정확한 날짜는 예수의 생일과 아무 상관이 없다. 그 명절은 원래부터 유럽 곳곳에 있던 동지 축제와 새로운 기독교가 융합하여 생겨났다. 밤을 이긴 낮을 기리는 옛 축제가 죽음을 이겼다는 예수의 탄생을 기리는 새 축제로 변모한 것이다.

성탄절에는 곳곳에서 LED 장식 등이 전나무 모형을 휘감고 반짝인다. 교회에 다니는 일부 아이들은 연극 무대에 올라, 숙박할 곳을 찾아 헤매는 예수의 부모를 연기할 것이다. 형편이 된다면, 환한 무대조명이 그들을 비출 텐데, 그것도 바로크시대의 유산이다. 자연조명이 꺼진 밤에 인공조명을 켜고 연극을 하는 관행도 17세기 후반기에 시작되었다.

* 이 글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서 발간하는  ‘TePRI Report’ 로부터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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