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칼럼

통계역학의 개척자였던 볼츠만의 죽음

[TePRI Report] 세계사 속 과학기술

대중들은 물리학자 하면 대뜸 아인슈타인을 떠올리곤 하지만, 물리학계 내부에서는 최소한 아인슈타인에 못지않게 존경받는 인물들이 꽤 있다. 니체와 동갑으로 1844년에 태어난 루트비히 볼츠만이 대표적인 예다. 볼츠만은 시스템의 거시적 속성들을 미시적 상태들과 확률에 기초하여 설명하는 물리학 분야인 통계역학을 개척하고 엔트로피를 정의하는 공식 S = k lnW을 세우는 등의 업적으로 불멸의 지위에 올랐다.

루트비히 볼츠만  ⓒ위키백과

루트비히 볼츠만 ⓒ위키백과

이 공식이 말해주는 바는 엔트로피(S)는 미시 상태들의 개수(W)의 자연로그에 볼츠만상수(k)를 곱한 값과 같다는 것이다.

즉, 특정한 거시 상태의 엔트로피는 그 상태를 구현할 수 있는 미시 상태들의 개수가 많을수록 더 높다. 볼츠만 본인과 측근들이 느끼기에도 자랑스러웠던지, 오늘날 그의 묘비에는 저 엔트로피 공식이 새겨져있다. 이 인물이 물리학계 내부에서 어떤 평가를 받는지 짐작하게 해주는 슈뢰딩거의 증언이 있다. 슈뢰딩거는 양자물리학의 확립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공로로 1933년에 노벨상을 받은 위대한 물리학자다.

그가 쓴 유명한 에세이 ‘생명이란 무엇인가’와 ‘정신과 물질’을 함께 묶은 책(우리말 번역본 ‘생명이란 무엇인가, 정신과 물질’)에 부록처럼 덧붙인 자서전적인 글 ‘내 삶의 스케치’을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위대한 루드비히 볼츠만은 내가 1906년 빈 대학(내가 다닌 유일한 대학이다)에 입학하기 직전에 두이노에서 슬픈 최후를 맞았다… 그 후(1907년) 지금(1960년)까지 나는 물리학에서 볼츠만의 이론보다 더 중요하다고 느낀 이론이 없다. 플랑크며 아인슈타인이 있다 해도 말이다.”

요컨대 슈뢰딩거가 보기에 볼츠만은 양자 개념을 고안한 플랑크와 상대성이론을 개발한 아인슈타인을 능가하는 물리학자다. 또한 명시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슈뢰딩거는 양자물리학의 뼈대를 세운 자신보다도 볼츠만을 더 높게 평가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담이지만, 이렇게 물리학계 안팎의 평가가 심하게 엇갈리는 또 한 명의 인물로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을 언급할 만하다. 대중들은 ‘맥스웰’을 즉석커피 브랜드로만 기억할 가능성이 높지만, 대학교에서 전자기학 강의를 들어본 사람이라면 ‘맥스웰 방정식’ 앞에서 경탄한 경험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맥스웰 방정식이란 전자기학 전체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는 네 개의 방정식을 말한다. 물리학과 학생은 2학년이나 3학년 때 맥스웰 방정식을 배우면서 거의 누구나 경이로움을 느낀다. 모든 전자기현상을 이렇게 간단한 방정식 네 개로 설명할 수 있다니! 정말이지 그 방정식들은 자연이 수학적 구조를 띠었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로 다가온다. 그것들을 보면 “자연이라는 거대한 책은 수학의 언어로 쓰여 있다.”라는 갈릴레오의 말을 실감하게 된다.

맥스웰과 볼츠만은 인연이 없지 않다. 이른바 ‘맥스웰-볼츠만 분포’는 먼저 맥스웰에 의해 수학적으로 도출된 후 볼츠만에 의해 더 심층적으로 연구되었다. 맥스웰-볼츠만 분포 함수는 열평형에 이른 기체 시스템 속 입자들의 속도가 어떤 분포를 이루는지 알려준다.

맥스웰-볼츠만 분포 ⓒ위키백과

맥스웰-볼츠만 분포 ⓒ위키백과

더 나아가 맥스웰과 볼츠만은 당대 물리학자들 중에서는 드물게 미시적 입자(대표적으로 원자)의 실재성을 옹호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예컨대 기체 시스템이 정말로 존재하는 미시적 입자들로 이루어졌다고 믿었다. 비록 당시에는 기술이 부족하여 그 입자들을 실제로 관찰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반면에 볼츠만의 빈 대학교 동료 에른스트 마흐를 비롯한 많은 물리학자들은 그런 미시적인 입자들을 단지 이론적 구성물로 간주했다. 즉, 미시적 입자들은 데이터를 해석하고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이론적 보조수단일뿐이며, 그 입자들이 거시적 기체 시스템과 마찬가지로 실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이었다.

철학적으로 보면, 실재론과 구성주의가 맞섰던 셈인데, 이 대립은 앞선 인용문에서 슈뢰딩거가 언급하는 볼츠만의 ‘슬픈 최후’와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볼츠만은 1906년 여름휴가를 두이노에서 보내고 예정대로 복귀하기 하루 전에 호텔방에서 목매어 자살했다. 그가 유서를 남기지 않았으므로, 자살의 원인을 명확히 알 수는 없다.

그래서 이런저런 추측들이 제기되는데, 그중 하나는 볼츠만의 자살을 당대 지식인들의 원자론 거부와 관련짓는다. 비록 이 추측을 입증하는 직접 증거는 없지만, 원자론 반대자들과의 논쟁이 볼츠만을 괴롭혔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 반대자들의 우두머리 격인 철학교수 에른스트 마흐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강의를 할 수 없게 된 후, 볼츠만은 1903년 가을부터 마흐의 자연철학 강의를 승계했다. 원자론 반대자들과 대결하느라 이미 철학자와 다름없었던 볼츠만은 그 강의를 계기로 더욱 철학에 몰두했다. 당연히 강의에서도 그는 미시적 입자들의 실재성을 철학적으로 옹호하기 위해 애썼을 것이다.

그러나 당대의 철학적 대세는 마흐였다. 마흐에 따르면, 오로지 감각적 데이터만 실재하며, 무릇 이론은 감각적 데이터를 효율적으로 이해하고 관리하기 위해 우리가 구성하는 도구다. 마흐는 물리학자이기도 했지만 주로 철학자였다. 아무래도 물리학이 전공이어서 정교한 철학적 논증에 능하지 않았을 볼츠만에게 마흐는 벅찬 상대였을 것이 틀림없다.

볼츠만은 1906년 초에 건강 악화로 강의를 할 수 없게 되었고 5월에 ‘중증 신경쇠약’으로 병가를 받았다. 얼마 후 아드리아해변으로 여름휴가를 떠난 그가 말없이 자살한 날은 9월 5일이었다.

원자론 논쟁이 이 슬픈 최후의 결정적 원인이었다고 추측하는 것은 무리인 듯하다. 본래 볼츠만은 신체적 정신적으로 병약했다. 오래전부터 그를 괴롭혀온 온갖 질환이 그를 자살로 이끈 주요 원인일 테고, 원자론 논쟁의 역할은 이미 위태롭던 그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는 것에 다소 기여하는 정도였을 것이다.

오늘날 원자를 비롯한 미시적 입자들은 태양이나 달과 다를 바 없이 확고한 실재성을 인정받는다. 원자가 정말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진지하게 던지는 사람은 없다. 혹시라도 있다면, 그는 태양이나 달의 실재성마저도 의심하는 극단적인 구성주의자일 것이다. 그렇다고 오늘날 철학계의 대세가 실재론이라고 할 수는 없을 듯하다. 실재론의 세력이 볼츠만의 시대보다 더 강해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말이다.

물리학계에서 마흐는 초음속 단위에 자기 이름을 남긴 것 말고는 흔적이 없다시피 하다. 반면에 볼츠만은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로 꼽힌다. 마흐와 볼츠만은 개인적으로 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 이 글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서 발간하는  ‘TePRI Report’ 로부터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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