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칼럼

치우천황은 한국인일까 중국인일까?

이종호의 과학이 만드는 세상-붉은악마와 치우천황(2)

<기원전 1733년의 오행성 결집 현상을 적은 『단군세기』>



일부학자들은 『규원사화』와 『한단고기』를 위서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이들 책에 설명되어 있는 환웅과 단군 시대는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규원사화』를 『두산세계대백과』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저자는 북애노인(北崖老人)으로 청평(淸平)이라는 사람이 지은 『진역유기(震域遺記)』를 읽어보니, 삼국 이전의 역사는 항간에 전하는 여러 가지 설에 비하여 자세하지는 못하나 그런대로 기개(氣槪)가 있었으므로, 이에 따라 저술한 것이 이 책이다.



상권은 조판기(肇判紀)ㆍ태시기(太時紀)ㆍ단군기(檀君紀)로 나누어 상고사를 서술한 다음, 만설이라 하여 여러 경전(經典)에서 느낀 바와 저자 자신의 소감을 피력하였다. 상고사를 특이하게 서술한 점과 압록강 이북을 차지하지 못한 강개(慷慨)가 엿보이는 책이다.



책머리에 ‘상지이년을묘북애노인(上之二年乙卯北崖老人)…’이라 쓴 서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숙종1년(1675)에 저술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단고기』는 1911년 묘향산 단군암에서 선천 사람 계연수가 『삼성기』, 『단군세기(檀君世紀)』, 『북부여기』, 『태백일사』라는 각기 다른 4종류의 책을 필사한 것이다. 이 책에 대해서 『두산세계대백과』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중략) 상하 2편으로 이루어진 『삼성기(三聖記)』는 신라의 승려인 안함로(安含老)와 행적을 알 수 없는 원동중(元董仲)이 쓴 것이다. 환인(桓因), 환웅(桓雄), 단군(檀君)을 중심으로 민족의 기원부터 단군조선의 역사를 간략히 서술하였는데, 1421년에 세조가 전국에 수집 명령을 내린 『삼성기』와 책명이 일치한다. 한인으로부터 7세 단인까지 3301년의 역사와 신시시대의 한웅으로부터 18세 단웅까지 1565년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단군세기』는 공민왕 12년(136) 문정공 이암(李喦)이 전한 내용으로,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이름을 조선이라 칭한 단군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1대 단군 왕검부터 47대 단군 고열가까지 2096년에 걸친 단군 조선의 시기별 역사를 편년체로 싣고 있다.



『북부여기』는 고려 말의 학자 휴애거사(休崖居士) 범장(范樟)이 전한 것으로, 상ㆍ하ㆍ가섭원부여로 구성되어 있는데, 시조 해모수에서부터 6세 고무서까지의 204년과 가섭원부여 108년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단군세기』의 속편이다.



『태백일사』는 이암의 현손이자 조선 중기의 학자인 이맥(李陌)이 편찬했는데, 한국(桓國)ㆍ신시시대ㆍ고려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삼신오제(三神五帝)를 중심으로 한 천지만물의 생성으로부터 단군과 광명숭배, 3조선, 단군 경전, 민족을 드높인 고구려ㆍ발해ㆍ고려의 대외관계사를 서술하고 있다. 전체적인 내용은 단군 이래의 기층문화에 뿌리를 둔 고유신앙을 정신적 기반으로 민족의 자주성과 위대함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서술되었다. 또한 『천부경』과 『삼일신고』가 실려 있다.



『태백일사』에는 1923년에 중국 뤄양(洛陽)에서 천남생(泉男生) 묘지가 발견된 후에야 알려진 연개소문 조부의 이름 자유(子游)가 실려 있다. 나아가 해방 이후에 이루어진 『단기고사(檀奇古史)』의 영향까지 받고 있는 점을 근거로, 이 책을 계승했다는 이유립이 편찬자이며 40년대 후반에 완성되었을 것이라고 지적되기도 하였다.’



여하튼 이 책들은 편찬 년대가 너무나 늦은 면이 있어 사료로서 문제점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아주대학교의 박창범 교수는 『단군세기(檀君世紀)』에 특히 주목했다.



『단군세기』와 『단기고사(檀紀古事)』에는 기원전 1733년의 오행성 결집 현상 등 천문현상이 적혀 있는데 이를 컴퓨터로 분석한 결과 기록보다 1년 전인 기원전 1734년에 오행성 결집 현상이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1년의 오차는 3700년 전과 현재의 시간계산법의 차이로 생기는 오차로 거의 정확한 수치이다. 박 교수는 천문현상 기록을 근거로 이들 책의 신빙성을 지지했다.



독립기념관장 김삼웅도 『한국사를 뒤흔든 위서』에서 『한단고기』의 경우 비록 내용과 용어의 일부가 후세의 것이라 해도 책 자체를 완전히 위서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적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 관련 학자들이 모든 한국인이 납득할 수 있는 결론을 낼 것으로 생각되므로 더 이상 상술하지 않는다.



<중국에서 부활되는 치우>



중국에서는 그동안 황제만 시조로 모시다가 1980년대부터 염제(炎帝)를 포함해 중국인은 염·황(炎黃)의 자손이라고 선전했다. 그러더니 1990년대에 와서는 탁록현 반산진의 황제성과 황제천이 인접한 평원에 있는 ‘중화삼조당(中華三祖堂)을 건립하면서부터 황제·염제·치우제의 삼시조시대(三始祖時代)를 선전하고 있다.



치우천황의 능은 1997년, 중국 산동성의 문상현 남왕진에서 발견되었다. 탁록현의 탑사촌에도 치우릉이 있는데 이곳에는 치우의 머리 부분이 묻혀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한편 『사기집해』와 『漢書』에는 ‘치우의 무덤은 동평군 수장현 감행성에 있으며 높이는 일곱 길(70자)이고, 백성들이 매년 음력 10월에 제사를 지낸다. (중략) 팔다리 무덤은 산양군 거야현에 있다’고 적었다. 진태하 박사는 ‘치우는 신체부위별로 3곳에 분산 매장되어 있다’고 알려진 것을 근거로 치우릉이 문상현에 있다고 주장했다.



중국에서 치우릉을 복원하는 등 이민족으로 여기던 치우를 시조로 거론하는 것은 특별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한족(漢族)외에 55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오늘날의 다원적 중국을 이끌기 위해서는 과거의 역사관 즉 한족 위주의 역사에서 탈피하여 다민족 역사를 포함시켜야 한다.



이에 대해 주변 국가들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는 것은 사실이다. 박성수 교수는 중국이 황제는 물론 치우까지 자기네 조상이라고 하며 해마다 제사를 지내는 것 자체가 역사 왜곡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강원대학교의 박정학 교수는 치우가 중국의 조상이라면 그가 다스린 ‘구려’와 그 후신인 고구려는 자연스럽게 중국 역사에 편입되고, 치우의 영역과 법통을 이어받은 고조선 역사마저 중국에 귀속될 수 있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물론 중국학자 모두 갑작스러운 역사관의 전환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중국의 문자학자 이경재는 치우를 놓고 중국에서 벌이고 있는 역사왜곡에 따끔한 일침을 놓았다.



‘무공 방면에서는 제하(諸夏)가 승리했으나 문화 방면에서는 동이에 동화되었다. (중략) 대저 동이는 과연 어떠한 사람들인가. 곧 화목 자상하고 무력보다 예술을 숭상하는 사람들이었다. 그 대표적 인물을 들면 순(舜) 임금이다(맹자는 순임금을 동이인(東夷人)이라 말했다). 지인(至仁) 지효(至孝)해 남에게 천하를 양위한 것은 참으로 고금 중외에 다시 없는 지극히 성스러움인 것이다. (중략) 우리나라(中國) 문자는 동이인이 다 창조한 것이라 볼 수 있는데 설(契)이 널리 보급했기 때문에 조자의 공이 설에게 돌아가게 된 것이다. 동토와 서토의 고문을 대략 비교해보면 곧 동이가 문자의 지혜에 대해서는 서하(西夏)보다 우수하고, 동이인이 먼저 교육권을 장악했으므로 제하(諸夏)가 모두 동이의 문화를 받아들였다.’



한편 송호정 교수는 치우천황에 대한 한국인들의 맹목적인 믿음을 경계했다. 중국의 시조와 관련된 신화와 전설을 우리 민족과 관련된 실제 역사로 인식하게 된 배경에는 우리 역사를 오래 되고 우월한 것으로 보고 싶어 하는 국수주의적 역사인식이 밑바탕에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송교수는 치우가 한국인인가 중국인인가라고 논쟁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실재하지도 않은 인물을 놓고 민족성을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박정학 교수는 치우를 한(漢)족의 시조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이미 ‘중화족’ 속에 포함된 동이와 묘족의 조상인 것은 분명하므로 치우는 우리의 조상이기도 하지만 중국인의 조상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이와 같은 설명은 치우가 중국인들의 본류라는 헌원과 전쟁을 한 동이족의 시조라 하더라도 시기가 기원전 27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데다가, 치우를 진시황제 이후에 나오는 동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수는 없다는 의견과도 일견 상통하는 면이 있다.



여하튼 우리나라에서 치우천황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02년 월드컵 때문이기는 하지만 치우에 대한 믿음은 생각보다 깊이 뿌리내려 있었다는 설명도 있다.



우선 한강 ‘뚝섬’의 경우, 본래 치우 사당을 모셨기 때문에 ‘치우기(旗)’를 뜻하는 둑(쇠꼬리나 꿩꽁지로 꾸민 깃발을 의미)자를 써서 ’둑도‘ 즉 ’둑섬‘이라고 불렀던 것이 경음화되어 ’뚝섬‘으로 변했다고 설명한다.



조자용 박사에 의하면 근래까지 뚝섬에 있는 둑신사에 대형 두루마리가 있었는데 이 두루마리에 치우와 황제의 탁록대전을 그린 대형 벽화가 있었다고 적었다. 두루마리의 높이는 6척, 길이는 무려 36척이나 되지만 이 벽화는 광복 전까지는 전해 내려왔으나 지금은 보관처를 알 수 없다고 한다.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8세기경의 녹유귀면와(綠油鬼面瓦)도 치우상으로 추정한다. 일부 학자들은 장승에도 치우상이 변형된 것이 있다고 하며 치우부적, 도깨비, 치우투구, 치우깃발, 기우제신 등은 모두 치우에서 유래했다고 설명한다. 특히 도깨비는 중국과 일본에도 있지만 한국의 도깨비만이 소뿔이나 자신감에 넘치는 치우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는 설명도 있다.



육군사관학교에 보관된 옛날 투구에도 치우상이 그려져 있는데 전투에 출전하기 전에 치우를 군신으로 모셨던 치우사당에서 먼저 승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던 데서 연원한다고 한다.



붉은 악마의 상징으로 치우천황을 그려 넣은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한다. 치우천황은 그 자체로 승리를 상징하는 인물인 데다가 사악한 기운을 쫓고 강렬한 투쟁 정신을 돋우는 이미지를 갖고 있으므로 붉은 악마 응원단에서 그를 한국 축구의 승리를 지켜주는 상징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동이는 누구인가〉



치우천황을 이야기하면 동이(東夷)가 반드시 따라다니므로 동이가 무엇이냐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동이(東夷)’를 한자로 풀이하면 ‘동쪽 오랑캐’란 의미로 고대 중국인들이 세계의 중심에 위치해 있다는 이른바 중화사상(中華思想)에 기초하여 그들의 동방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 사용한 별칭이다. 중국 동북부에 살던 민족들이 스스로 동이라고 부르지는 않았으나, 중국인들에 의해 동이라 불려졌기 때문에 동이는 우리의 고대사를 거론하려면 반드시 등장하는 단어로 볼 수 있다.



중국사에서 동이는 두 가지 의미로 쓰인다. 광의의 동이는 고대 중원의 동쪽인 산동 반도와 회하(准河)유역 일대의 종족을 가리키며 협의의 동이는 한족(漢族)의 세력이 확대된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한 후를 의미한다.



광의의 동이보다 후대에 나오는 협의의 동이는 일반적으로 중국의 동쪽인 만주에서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 이르는 민족을 총칭한다. 협의의 동이일 경우 중국의 사료에 의하면 연경(燕京) 즉 오늘의 북경에서 조금 동쪽인 만리장성이 끝난 곳, 즉 산해관부터 동이지역이다. 물론 동이를 종족의 칭호가 아니라 정치적인 용어의 개념으로 인식하기도 한다는 것을 첨언한다.



중국인들이 동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매우 오래된다. 중국 은허에서 출토된 갑골문에는 은의 무정(武丁, 기원전 1324∼1266)이 동이를 정벌하느냐 마느냐로 그 가부를 점친 갑문(甲文)이 있으므로 동이족이 무정(武丁)시대 이전에 중국의 동북방에 거주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좌전(左傳)』에 의할 경우 상(商)의 멸망은 결국 동이족 때문이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으며 갑골문, 청동기 명문에서도 이와 같은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상(商, 은)이 기원전 11세기경 주족(周族)이 중심된 여러 종족의 연맹 세력에 의해 멸망하고 서주(西周)시대가 열렸다. 동이는 끊임없이 중국 역사 속에서 활동을 전개하였다.



주공(周公) 단(旦)은 어린 성왕(成王)을 대신하여 섭정하였다. 단(旦)은 동이에 대한 대대적인 전쟁을 벌여 치열한 전투 끝에 승리한 지역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주(周)왕실의 친척과 공신을 대규모로 분봉하였다. 이때 봉해진 나라가 산동(山東)과 강소(江蘇) 지역의 노(魯), 제(齊), 초(楚) 등의 나라이다. 노나라에 살았던 공자(孔子)와 맹자(孟子) 등을 동이족이라고 주장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이후 서주(西周)시대의 동이는 그들 지역에 분봉된 제후국들과 치열한 병탈의 과정을 겪었다. 서주(西周)시대에 주(周)의 제후국과 토착민 동이 사이에 있었던 대표적인 대결이 제(齊)와 래이(萊夷), 주(周)와 회이(准夷)와의 전쟁이다. 래이(萊夷)는 중국 동부 연해 지역에 거주하던 동이족의 한 지파로서 산동에 거주했던 토착민(주로 목축업과 농사를 지었음)이며 회이(准夷)란 준수(準水) 유역에 위치했던 종족이다.



제와 혈전을 벌였던 래이(萊夷)는 제나라 영공(靈公) 15년에 완전히 멸망하였다. 회이(准夷)도 노(魯)와 대립적인 관계에서 점점 밀접한 관계로 변화되며 동화되었다. 춘추(春秋)시대에는 서이(徐夷)가 등장하는데 서이(徐夷)는 산동에 존재하던 동이 중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한 나라였다.



서이(徐夷)가 한민족으로부터 주목을 받는 것은 서언왕(徐堰王)의 설화가 고구려 주몽의 난생설화(서군(徐君) )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이 설화의 내용을 보면, 궁인이 임신하여 알을 낳았으므로 상스럽지 못하다 하여 강가에 버렸더니 독고모(獨孤母)의 개가 물고 들어왔다. 그가 알을 따뜻하게 하였더니 마침내 아이가 태어났는데 이 아이가 바로 서언왕이라는 내용이다.



『후한서(後漢書)』에 ‘서주(西周) 강왕(康王) 때 서이(徐夷)가 스스로 왕임을 천명했다. 그는 ‘구이(九夷)를 거느리고 종주(宗周)를 쳐서 황하의 상류까지 이르렀으며 국토가 사방 500리에 달했고 조회하는 나라가 36국이나 되었다’라는 기록을 볼 때 당시에 매우 강성한 나라였음을 알 수 있다. 임승국은 서언왕이 주나라 목왕(穆王, 기원전 1001∼947)과 일대 결전을 벌였는데 이 당시 서언왕이 할거한 곳은 회수(淮水)와 대산(垈山) 사이의 회대(淮垈) 지역으로 중원 대륙에서 가장 기름진 평야라고 설명했다.



중국 문헌에서 동이는 ‘이(夷)’, ‘동북이(東北夷)’, ‘구이(九夷)’, ‘구려(九黎)’, ‘사이(四夷)’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된다. 그러나 동이보다 이(夷)가 먼저 일반화한 것은 이(夷)가 어떤 특정한 민족을 가리킨 고유명사가 아니라 고대 중국인들이 자신들과는 다른 이질집단을 통틀어 부른 명칭이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인들은 문화가 높은 지역을 ‘하(夏)’, 문화가 높은 사람 혹은 종족을 ‘화(華)’라 칭하고 화하(華夏)를 합해서 중국이라 칭했다.



여하튼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산동의 동이들은 점점 중국인들에게 밀려 제후국에 예속되면서 그들 고유의 문화는 중국 문화에 흡수되기 시작하였는데 이 과정을 완성시킨 사람이 기원전 221년 진시황제이다. 그는 중국 천하를 통일시켜 전국(戰國)시대를 마감시키면서 중국을 통일하자마자 이전까지의 국가와는 전혀 다른 의미의 통일 제국을 세웠다.



진시황제가 통일한 중국 영역은 동으로는 조선(朝鮮), 서로는 임·조·강중(臨·洮·羌中), 남으로는 북향호(北嚮戶), 북으로는 황하의 북단, 동북은 요동과 국경을 접하는 거대한 영토로 오늘날 중국 대륙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따라서 서주(西周)시대부터 중국인들에게 동화하기 시작한 중국 대륙 안의 동이들은 진나라의 출현으로 중국민족으로 완전히 흡수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학자들은 중국이 자랑하는 요임금과 순임금이 동이족이라고 추정한다. 요임금도 순과 같은 산동 출신인 데다 둘이 한 동네 사람으로 자신의 아들이 능력 부족이므로 치수에 능한 순으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토록 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공자가 『서경』에서 ‘순임금은 중국에는 전혀 없던 신명(神明)에 제찬보본하는 예식을 마련했다’고 기술했고 맹자도 ‘순임금은 동이 사람이다’라고 썼다.



공자와 맹자가 말하는 인의(仁義) 사상의 원천이 요순이고 이들이 동이라면 공자와 맹자가 이상으로 삼은 국가는 동이국가라고 볼 수밖에 없다. 특히 유승국은 중국의 『산해경』에서 조선이 군자의 나라라고 일컬어지고 있음을 지적했다.



고조선은 중국 요ㆍ순시대와 은ㆍ주시대에 중국 본토의 일부 지역과 만주, 한반도 전역에서 활약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선이 주력이 된 한(韓)족과 주(周)가 주력이 된 한(漢)족 간에 대립이 생겼고 결론적으로는 주나라가 은나라를 제압했다. 당연히 주나라는 동이족을 정복했으므로 동이족이 주력인 은나라를 한(漢)족의 역사로 간주했는데 공자도 그 설명에 동조했다. 공자는 『춘추』에서 은나라와 동이족을 밀어내고 중국의 정통은 동이가 아니라 한(漢)족 중심의 주나라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는 매우 모순적인 발언을 했다. 공자는 자기의 주장이 여러 나라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자 “구이(九夷, 조선)로 가야겠다”고 말했다. 제자들이 공자의 말에 “고루하면 어쩌겠느냐”고 질문하자 “조선은 군자불사지국”이라고 말하면서 조선이 고루한 곳이라는 것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렇다면 동이가 군자의 나라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주나라는 중심세력이라고 주장한 공자의 진정한 뜻은 무엇인가에 의아심을 품을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언론인 최태영은 공자 시대에 비로소 한(漢)족 중심의 중국 역사시대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북애도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공자 시절에는 주나라가 이미 쇠퇴하고 여러 외족의 침입이 그치지 않았고 그 중에서 동이인 한족(韓族)의 위세가 자못 강했다. 그러므로 공자는 외족을 물리치고 주나라를 높이기 위해 『춘추』를 저술했다. 만약 공자가 당시에 동이의 주력 지역에서 태어났다면 동이를 중심으로 삼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단국대학교의 기수연 박사는 한대(漢代) 이후 동북지역에서 나타나는 동이를 그 이전 시기 산동 일대에서 존재했던 동이와 같은 계보로 묶을 수는 없다고 설명한다.



하와 은나라를 동이족이 원류인 한민족이 세웠고 한자도 동이가 살던 산동 지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한자 역시 ‘한민족이 만든 것과 다름 아니다’라는 비약도 있지만 이들 중 상당수가 후대에 중국에 동화되어 중국인으로 자리 잡았으므로 이들 모두를 한민족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은 무리한 설명이라는 지적이다. 공자와 맹자가 동이이기 때문에 한민족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한편 동이(東夷)가 동쪽의 오랑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동쪽의 활을 잘 쏘는 민족이라는 설명도 있음을 첨언한다. 이(夷)자는 원래 활은 평상시에 활줄을 빼놓았다가 유사시에 걸어서 쏘는 생활을 한 사람들의 상형자라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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