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칼럼

최초 수상자가 세운 최다 수상 단체

[노벨상 오디세이] 노벨상 오디세이 (124)

제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4~1918년엔 노벨상 수상자 선정이 원활하지 못했다. 특히 평화상의 경우 이 기간 동안 수상자 선정이 단 1회만 이루어졌다. 1917년에 구호단체인 국제적십자위원회(ICRC)가 상을 받은 것이다.

당시 ICRC는 전쟁 발발 2주 만에 수백 명의 자원봉사자들로 전쟁 포로를 추적하는 조직을 구성했다. 이들은 연합군은 물론 독일군과 일본군으로부터도 포로 명단을 입수해 혈육의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던 참전군인 가족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ICRC 단원들이 포로수용소까지 직접 찾아가자 전쟁 포로에 대한 인권침해 사례도 덩달아 줄었다. 제네바 ICRC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던 이 포로 명단은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국제적십자회(ICRC)를 창설해 제1회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앙리 뒤낭. 이후 ICRC는 노벨 평화상을 3회 수상했다. ⓒ Public Domain

제2차 세계대전 때는 포로들의 편지를 고향의 가족에게 전해주는 일을 ICRC가 담당했다. 1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토대로 구체화된 포로 대우에 관한 감시 활동은 물론 전쟁으로 인해 피해를 입는 민간인들을 보호하는 역할까지 했다. 2차 세계대전 기간이던 1939~1943년에도 노벨 평화상 수상자 선정이 없었지만, 그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ICRC는 1944년에도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창립 100주년인 1963년에는 적십자사 연맹(LRCS)과 함께 또다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총 3회의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것이다. LRCS는 1919년에 설립된 각국 적십자사의 연합 조직이다.

1863년에 ICRC이 창설된 건 스위스의 실업가 앙리 뒤낭의 제안 덕분이었다. 그는 자신이 알제리에 세운 제분회사가 자금난에 시달리자 1859년 6월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를 찾아갔다. 알제리를 식민 통치하고 황제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였다.

솔페리노에서 긴급 구호 활동 시작

하지만 북이탈리아 전선에서 오스트리아와 격전을 벌이고 있던 터라 나폴레옹 3세를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 앙리 뒤낭은 돌아오는 길에 솔페리노에서 수많은 부상병들을 목격하고 주민들과 함께 교회에 임시 병원을 설치하는 등 긴급 구호 활동을 펼쳤다.

1862년 그는 당시의 경험을 ‘솔페리노의 회상’이라는 책에 담아냈다. 그는 자비로 발간한 그 책에서 두 가지를 제안했다. 전시에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도울 수 있는 중립적인 민간 봉사 단체를 만들 것과 그 단체의 활동을 보장하는 국제조약을 체결하자고 했던 것.

반향은 컸다. 1963년 10월 뒤낭을 비롯한 5명의 위원으로 ICRC가 창설된 데 이어 이듬해 10월에는 미국과 유럽 등 16개국 대표가 스위스 제네바에 모여 전쟁 중 부상자 보호를 위한 제네바협약을 체결했다.

이후 모든 인도적 활동으로 영역을 넓힌 ICRC는 수많은 분쟁 지역에서도 다양한 구호 활동을 펼쳤다. 현재 무력충돌 지역에서는 ICRC, 평화시의 재해재난 지역에서는 국제적십자사연맹(IFRC)이 주도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

흰 바탕에 붉은색 십자가를 새겨 넣은 적십자 깃발은 스위스 국기의 색을 반대로 한 것이다. 뒤낭의 조국이자 제네바협약을 탄생시키는 데 큰 공헌을 한 스위스에 감사를 표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슬람 국가인 터키는 1876년 러시아와 전쟁을 할 때 이 적십자 깃발 대신 붉은 초승달을 새긴 깃발을 사용하고 단체명도 적신월사로 바꾸었다. 적십자 깃발이 십자군 전쟁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다른 이슬람 국가들도 적신월을 사용하자 IFRC는 1929년 제네바협약을 통해 적신월 깃발의 사용을 공식 인정했다.

종교까지 뛰어넘는 ICRC의 이념

1903년 적십자조약에 가입한 우리나라는 1905년 고종 황제 칙령에 의해 대한적십자사를 창설했다. 일본의 강제합병으로 부침을 거듭하던 대한적십자사는 1949년에 정식으로 재건됐다. 임시정부 시절부터 독립군과 해외동포를 위해 인도적 활동을 벌인 대한적십자사는 한국전쟁, 4‧19혁명, 광주민주화운동, 태안기름유출사고 등의 현장에서 큰 역할을 담당했다.

2007년 7월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세력에 의해 한국인들이 납치되는 인질 사건이 일어났다. 그때 아프간의 적신월사가 기독교도인 한국인 인질 일부를 석방시키는 데 큰 도움을 줬다. 이 일은 아군과 적군은 물론 종교까지 뛰어넘는다는 ICRC의 이념을 구현했다는 점에서 큰 울림을 주었다.

한편 ICRC를 위해 전 재산을 날리고 빈털터리가 된 앙리 뒤낭은 조직 내분으로 ICRC 회장 자리에서도 물러나 1867년 프랑스 파리로 갔다. 그곳에서 집필활동과 적은 연금을 받으며 그는 말년을 가난하게 살았다.

하지만 그는 삶을 마감할 때까지 평화주의 사상을 주장하며 한 평생을 봉사하며 살았다. 이 같은 박애정신과 평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1901년 제1회 노벨 평화상 수상자가 되었다. 앙리 뒤낭의 노벨상 수상까지 합치면 ICRC은 무려 4회나 노벨상을 수상한 셈이 된다.

한 의사의 배려로 그는 1910년 사망할 때까지 약 18년간 알프스가 보이는 양로원에서 생활했다. 현재 이 양로원은 앙리 뒤낭 박물관으로 변신해 많은 이들이 찾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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