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칼럼

중국을 이길 수 있다

이종호의 과학이 만드는 세상-사상 최강 고구려의 원동력은 과학(1)

우리나라 사람들이 고구려에 대해 강한 매력을 갖는 것은 현재 중국의 영토로 되어 있는 광대한 지역을 한민족으로 구성된 강한 군대로 마음껏 뛰어다녔다는 데 있는 것 같다. 특히 중국의 수도 북경지역까지 고구려가 진출하였다는 사실은 한민족으로서 깊은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기에 충분하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역사를 읽으면서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삼국을 통일하면서 고구려를 멸망시켰다는 대목이다. 그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고구려 멸망이 국가의 운명을 건 치열한 전투에서 패배했다던가 하는 불가항력적인 것이 아니라 당나라와 전투에서 불패의 신화를 갖고 있던 연개소문이 사망하자마자 그의 아들들 간에 권력싸움이 일어나 국가를 당나라에 바쳤다는 데 원인이 있다는 점이다.



물론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곧바로 당나라와 결별하고 독자노선을 걸었다는 점을 크게 인정하더라도 아쉬움이 배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더욱이 신라 ‘통일’로 영토의 75퍼센트를 잃어 버렸다는 데는 말을 잃는다.



신라 진흥왕 시대인 6세기 중엽 고구려의 영토는 41.1만 제곱킬로미터, 백제는 2.9만 제곱킬로미터, 신라는 8만 제곱킬로미터로 52만 제곱킬로미터이다. 현재 남북한의 면적이 22만 제곱킬로미터이므로 한반도 이북의 만주 땅에만 30만 제곱킬로미터의 영토가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데 신라가 통일한 후인 8세기 중엽 신라의 영토는 13.4만 제곱킬로미터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신라가 가장 강성했던 진흥왕 때의 면적이 8만 제곱킬로미터였으므로 백제의 면적 2.9제곱킬로미터를 합병하고서도 통합된 면적이 13.4만 제곱킬로미터였다면 신라가 통일 후에 실제로 북방 영토에서 늘어난 면적은 2.5만 제곱킬로미터가 채 되지 못한다는 계산이다. 요컨대 삼국 시대의 총면적 52만 제곱킬로미터가 신라 통일 이후에는 13.4만 제곱킬로미터로 줄어들었으므로 삼국통일이라는 명분으로 잃어버린 땅은 무려 38.6만 제곱킬로미터가 된다.



한국인들이 고구려의 멸망을 얼마나 안타깝게 생각하는가는 설문조사의 ‘역사학자 100인이 말하는 우리 역사의 희노애락’의 결과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설문에서는 가장 기뻤던 순간, 가장 슬펐던 순간, 가장 분노했던 순간을 적시했는데 고구려의 멸망은 가장 슬펐던 순간 중 세 번째로 꼽혔다. 한국인들은 가장 슬펐던 순간 첫 번째로 경술국치를 꼽았고 두 번째로 한국전쟁을 선정했지만 이 사건들은 근대에 일어난 일이다. 그러므로 한국 5천 년 역사에서 고구려 멸망을 세 번째로 꼽았다는 것은 고구려의 멸망이 그만큼 한국인들에게 가장 안타까운 역사의 순간이었음을 의미한다.



참고적으로 가장 기뻤던 순간은 8ㆍ15광복, 세종대왕의 한글창제와 6ㆍ10민주항쟁이며 가장 분노했던 순간은 5ㆍ18광주항쟁, 삼전도 치욕, 동학농민군 패배이다.





함석헌 선생의 “신라는 너무 값비싼 값을 주고 통일을 샀으나 그 통일은 참으로 보잘 것 없는 통일이었다. 청천강 이북을 가보지 못한 통일이다. 통일이 아니요 분할이다.”라는 한탄이 더욱 가슴에 닿는다. 그 기저에 깔린 아쉬움은 고구려가 사상 최고의 강대국이자 정복국가였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자신감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오는 고대의 전쟁은 그야말로 영웅담으로 채워져 있기 일쑤다. 용감한 장수 한 명이 나서서 몰려오는 적병을 줄줄이 베어버리는 것은 물론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발사되는 화살 망을 뚫고 달려가 적장을 죽이기도 한다.



그러나 실전에서는 이런 식으로 전투가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용감하고 유능한 장군들이 전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거나 사기를 높일 수는 있지만 혼자서 수만 명의 적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경우는 없다.



그러므로 고구려가 사상 최고의 강력한 국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한두 명의 영웅이 있어서가 아니라 강력한 국가가 될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이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중국은 역사상 광대한 영토를 기반으로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



이 말은 중국처럼 전투에 관한 한 상당한 노하우가 있는 나라가 거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중국은 수많은 전투를 거울삼아 전쟁에 관한 한 수많은 전술 등을 비축하였고 이를 상황에 따라 적시적절하게 운용할 기본 자산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중국은 고구려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장병들을 동원할 수 있었다. 고대 전쟁에서는 장병의 숫자가 전쟁의 승패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가 중국과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맞서 싸울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가 나름대로의 과학적인 전쟁 노하우를 축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1세기 중엽에 소국통합을 기본적으로 끝낸 후 왕성한 정복활동으로 고조선 옛 땅의 수복에 착수했다. 고구려는 태조왕 53년(105) 요동군, 현도군에 대해 일대 공세를 취고 요동지방의 6개현을 함락시켰다. 105년에 진행된 고구려군의 요동공격이 후한에 얼마나 큰 타격을 주었는가는 106년에 후한이 요동지방의 군현들을 대폭 개편한 데서 알 수 있다.



고구려 초창기의 전쟁은 주로 태조왕의 동생 수성(遂成, 차대왕)이 전담했는데 그는 고구려의 전략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구려 땅의 넓이와 인구가 한나라에 미치지 못하나 고구려는 큰 산과 깊은 골짜기의 나라이므로, 웅거하여 지키기에 편리하여 적은 군사로도 한의 많은 군사를 방어하기에 넉넉하며, 한은 평원광야의 나라이므로 침략하기가 용이하다. 고구려가 비록 한꺼번에 한을 격파하기는 어려우나 자주 틈을 타서 그 변경을 시끄럽게 하여, 피폐하게 한 뒤 이를 격멸하면 우리가 중국을 이길 수 있다.”



차대왕의 이 말은 고구려가 중국을 멸망시키는 것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 고구려의 인물이 이렇게 호방한 말을 했다는 것이 다소 의아할지 모르지만 차대왕은 결코 허세로 말한 것이 아니다.



고구려의 중국에 대한 공격은 계속되어 118년에는 고구려군이 ‘예맥’의 군사들과 함께 한나라 현도군을 습격하고 화려성을 공격하였다.



고구려의 공격에 참을 수 없었던 후한의 안제(安帝)는 기원 121년 유주자사 풍환, 현도군수 요광, 요동태수 채풍에 명하여 고구려를 공격케 했다. 이때도 태조왕은 동생 수성을 보내 역습하게 했다.



수성은 기만 작전을 구사해서 승리를 거두었다. 즉 사신을 보내 항복하는 척하면서 풍환과 요광의 군사를 묶어두고는, 비밀리에 잠입한 3천명의 군사로 현도군과 요동군을 기습 공격케 하여 성곽을 불사르고 2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이에 놀란 요동태수 채풍이 다급하게 군사를 거느리고 신창(新昌)으로 나와 싸웠지만, 고구려군의 예봉을 꺾지 못하고 전장에서 살해되었다. 공조연 용단, 병마연 공손포가 몸으로 채풍을 보호했지만 끝내 막아내지 못하고 모두 죽었다고 하니 당시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한(漢)으로서는 치욕스러운 패배였고 고구려로서는 대(對) 중국 투쟁사에 길이 남을 전설적인 승리였다.



그런데 진수(陳壽, 233?279)가 편찬한 『삼국지』<위지동이전>은 고구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고구려는 높은 산과 깊은 계곡이 많고, 평원과 호수가 적었다. 고구려 사람들은 산과 계곡을 따라 살면서 계곡물을 마신다. 좋은 밭이 없어 비록 힘써 농사를 지었지만 배불리 먹기에는 식량이 퍽 부족하다. 그들의 풍속은 음식을 절약하면서 궁전이나 주거지를 성대하게 짓기를 좋아한다. (중략) 그곳 사람들의 성정은 사납고 급하며 약탈과 침략을 좋아한다.’



위와 같은 내용대로라면 고구려가 건국되어 멸망할 때까지 거의 700여 년 동안 막강한 전력을 보유하면서 중국과 대등한 전투를 했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는 존재했고 중국과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맞싸워 승리했다. 그 비결이 무엇인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결론을 먼저 말한다면 고구려가 사상 최강의 국가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가 당시의 최첨단 무기를 기반으로 하는 과학 국가인 동시에 다른 나라가 갖지 못한 전쟁의 잇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주력부대는 ‘개마무사(鎧馬武士)’로 구성되어 있었다. ‘개마(鎧馬)’란 기병이 타는 말에 갑옷을 입힌 것을 말하며 개마에 탄 중무장한 기병을 ‘개마무사’라고 불렀다. 오늘날의 우리들은 개마무사라는 단어에 익숙하지 못하지만, 함경도에 있는 개마고원이 고구려의 개마무사들이 말 달리던 곳이라는 점에서 유래한 지명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개마무사라는 단어는 과거에 우리 민족에게 매우 익숙한 단어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의 개마무사는 말과 기사 모두를 강철로 된 갑옷으로 무장했는데, 이 개마무사가 5.4미터가 넘는 창을 어깨와 겨드랑이에 밀착시키고 말과 기사의 갑옷과 체중에 달려오는 탄력까지 모두 합하여 적에게 부딪치면 보병으로 구성된 적군의 대형은 무너지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최강의 공격력과 장갑을 자랑하는 개마무사의 주 임무는 적진돌파와 대형 파괴다. 개마무사는 현대로 치면 탱크와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말조차 강철로 된 장비로 무장시켰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사실 기병이 아무리 용맹하더라도 말이 부상당한다면 전투력이 저하될 수밖에 없으므로 말의 안전은 기병 못지않게 중요하다. 그런데 고구려 기병의 경우에는 말까지 갑옷으로 무장시켰는데, 고구려와 동 시대에 말과 사람을 위한 갑옷을 강철로 만든다는 것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를 위해서는 개마를 만들 수 있는 철기문명의 수준과 아울러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고구려가 사상 최강의 전투력을 소유하고 한민족 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영유한 것이 결코 우연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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