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칼럼

중국에서 발견되는 동이족

이종호의 과학이 만드는 세상-붉은악마와 치우천황(3)

<치우의 후예들>



동이와 묘족의 시조인 치우가 헌원과 탁록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한족의 시조라고 볼 수 있는 헌원이 중국을 차지하자 치우의 일부 일파는 중국에 동화되고 나머지 일파는 동이로 계속 활동했다고 앞에서 설명했다.



그러므로 치우는 우리 조상이기도 하지만 중국인의 조상도 된다는 주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당연히 동이와 묘족이 어떤 관계이기에 이러한 주장이 나오며 이들이 현재는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상 정확한 기록이 없는 시대의 역사를 정확하게 구성한다는 것처럼 어려운 일은 없다. 우리나라의 일부 역사가 왜곡된 곳이 많다고 지적되는 것도 관련 자료가 많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단원은 KBS-TV 이동식 기자가 쓴 『길이 멀어 못갈 곳 없네』에서 많은 부분을 인용했다.



중국을 대표하는 강은 양자강과 황하이다. 양자강 남부를 고대 중국인들은 월(越)이라 부르면서 자신들과는 다른 민족이 사는 땅으로 간주했다. 중국인들도 자신들의 발상지는 황하이므로 일반적으로 염황족 또는 화하족으로 불렀다. 그러므로 양자강 남쪽의 오늘날 절강성 일대는 화하족의 손이 미치지 않는 땅이므로 ‘백월(百越)’ 또는 ‘백오(百奧)’라고도 불렀다. 이는 중국 중원에서 볼 때 너무 멀고 외지라는 뜻이다.



중국과 다르다고 중국인조차 인정한 월족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중국 학계조차 이견이 많은데 가장 근접한 대답은 월족이 워낙 다양하므로 한마디로 정의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월족은 중국인들로부터 물 위에서 잘 다니고 금속 제련기술이 뛰어났으며 머리를 짧게 자르고 몸에는 문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들 풍습은 중국의 화하족과는 생활습관이나 언어, 문화 등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하튼 월족이 어디서 왔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태평양 인종이 해안을 타고 올라왔다는 설, 남방족의 일족인 삼묘족(三苗族)의 후예, 본래부터 그 땅에 살아왔을 것이라는 토착설이 있고 이들이 모두 합쳐진 혼합설 등이다.



그런데 월족의 조상으로 황하의 홍수를 다스렸다는 우(禹)의 후손이라는 설명이 사마천이 쓴 『월왕구천세가』에 나온다.



‘월왕 구천의 조상은 우의 후예이며 하왕조의 후제 소강의 아들로서 회계(會稽)에 봉해져 우의 사당을 지켜왔다.’



절강성의 소흥 남쪽에 회계산(會稽山, 주 봉우리는 1,195미터의 동백산)이 있는데 중국인들은 지금도 우임금이 중국의 홍수를 다스렸고 제후들에게 논공행상을 했으며 죽어서 이곳에 묻혔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요, 순, 우가 다스리던 그 시대에 홍수가 문제가 된 곳은 양자강이 아니라 황하이다. 지역적으로 보면 하남성, 하북성, 산동성 일대이다. 반면에 우의 사당이 있다는 소흥과 회계산은 모두 양자강 남쪽이다.



학자들이 위의 설명에 신빙성이 없다고 지적하는 것은 당시의 교통 여건 등 제반 상황을 고려할 때 황하에서 수천 리 남쪽인 양자강 남쪽까지 우가 내려와 제후들을 다독거리고 이곳에 묻혔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한나라 시대의 사상가 왕충(王充)이 저술한 『논형(論衡)』에서 왕충은 우임금이 회계에 왔다는 전설이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고 중국인 임화동 박사는 『관자』와 『사기』에서 ‘우는 태산에서 제후를 봉하고 회계에서 왕위를 물려주었다’라는 구절을 근거로 초기의 회계산은 산동 태산 근처에 있었으며 소흥의 회계산은 산동에서부터 그 이름이 옮겨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마천의 『사기』를 액면 그대로 인정한다면 사마천이 그렇게 적은 근거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대답을 중국의 양쇠도(梁釗謟)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과거에 월족은 산동성과 절강성 일대에 살고 있었던 것 같다. 하우가 건국할 때에 동이 지역에 살고 있던 월족이 화하민족의 한 구성원이 되어 하나라를 건설했으므로 동이월족의 전설 중에 그들이 하의 후예라는 얘기가 전해지게 되었다. 그 후 문자로 기록할 때에 월왕 구천의 조상이 우의 후손이라고 쓰게 된 것이다.’



양쇠도의 설명은 동이족과 월족의 관계를 간단하게 설명했는데 한마디로 치우천황이 헌원과 전투할 때 동이에 월족이 포함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에서 설명했지만 요ㆍ순이 원래 동이족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그의 주장에 어느 정도 이해되는 점도 있다. 즉 하나라 때의 회계산은 지금의 절강성 소흥 근처가 아니라 산동성 태산 부근이라는 설명이다. 회계산은 산동에 있으면서 동이월족이 숭배하던 곳인데 후에 산동지구가 화하족에 융합되어 더 이상 월인이라고 부르지 않게 되었고 동이지역에서 절강지역으로 내려 간 월족이 그들의 조상을 생각해서 절강지역에 회계라는 이름을 다시 붙였다는 것이다.



<중국 남부에서 발견되는 동이족의 풍습>



이동식 기자는 위와 같은 설명이라면 중국 남방 지역의 월족과 한국인이 같은 부류라고 추정할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에 주목했다. 우선 고인돌이 한국인과 월족과의 유대 관계를 설명해주는 실마리가 된다고 설명했다.



고인돌은 세계의 3분의 2가 한반도와 만주를 포함하는 지역에 분포되어 있어 동이족의 대표적인 유산이다. 특히 동이족의 고인돌은 다른 지역과는 달리 대부분의 경우 대형 고인돌이 중앙에 있고 그 주위에 소형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학자들은 고인돌 1톤을 옮기는 데 약 10명의 장정이 필요하다고 계산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고인돌의 상판만 해도 200톤이 넘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고인돌을 세울 당시에 2천여 명이 동원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대에 2천명을 동원할 수 있다는 것은 상당한 집단이라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고대의 한 마을의 거주 인원을 150여 명 정도로 간주하므로 장정 2천명을 동원한다는 것은 적어도 40여 개 마을이 협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한 마을에서 50여 명의 장정이 동원된다는 것으로 가정).



고인돌을 고고사적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고인돌에 부장품이 없더라고 청동기로 인정한다는 데 있다. 학자들은 청동기에 들어서서 비로소 국가라는 구조 형태가 성립될 수 있다고 인정한다. 고인돌을 만들기 위해 장정 2천명을 동원하기 위해서는 초보적인 위계질서나 제도가 갖추어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인돌의 건립 상한선이 중요한데 우리나라 전역에서 속속 확인되고 있는 고인돌 중 가장 오래된 것은 무려 5∼6천 년 가까이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기는 동이족이 중국의 화하족과는 전혀 다른 문명을 독자적으로 영위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양자강 남쪽의 절강성에서 2004년까지 50여 기의 고인돌이 발견되었다고 중국학자 소석(昭晰)은 발표했다. 고인돌이 가장 많이 발견된 곳은 온주(溫州) 서안시(瑞安市) 강변의 구릉과 산중턱 해발 90∼120m의 높은 대지에 분포하고 있다. 절강성의 고인돌은 덮개돌의 한쪽 면 밑으로만 지석이 받치고 있거나, 묘문(墓門)이 마련되어 있는 등 다른 지역의 고인돌과는 색다른 모습도 있지만 형태상 우리나라의 남방식과 유사하다. 이들의 연대는 우리나라 고인돌의 초창기 연대보다는 다소 늦은 서주(西周, 기원전 1046~771년) 초기부터 춘추시대 말기로 추정한다.



지역적으로 다소 떨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같은 유형의 고인돌 문화가 발견된다는 것은 고인돌을 만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같은 생각과 풍습을 갖고 있다고 추정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 아니다. 인간의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의식 중에 하나인 사자를 매장하는 방법은 고대로부터 쉽사리 도입하거나 변경할 수 있는 풍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고인돌과 같은 형태의 고인돌이 절강성에서도 발견된다는 것은 오히려 학자들을 고민에 빠뜨렸다. 한반도에서 절강성으로 가려면 과거에 동이지역이라고 간주되는 산동성을 통과해야 하는데 이들 지역에서 고인돌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산동성에서 동이족의 근간이라고 볼 수 있는 고인돌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은 산동성을 동이족의 영역으로 간주한다는 것에도 큰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학자들이 산동성에서 분명히 고인돌이 존재할 것으로 예상하면서도 증거가 발견되지 않아 애태우던 차에 1993년 신화통신은 산동성 문등시 고촌진에서 2미터 크기의 고인돌이 있다는 것을 보도했다.



이 발견은 우리나라부터 산동성을 거쳐 양자강 남쪽으로의 고인돌까지 연계될 수 있다는 자연스런 설명도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 계기가 되었다는 데 더욱 큰 중요성이 있다. 중국의 원리(苑利) 교수는 매우 주목할 만한 가설을 발표했다. 그는 「한반도와 중국 소수민족의 문화관계 비교」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중국의 신화에서 치우는 황하 중심의 염황족에 밀려난 묘족(苗族)의 선조다. 이 묘족은 4000년 전 발해 북쪽 연안에 살다가 남쪽 하북성 삼하현으로 쫓겨간 민족으로 오늘날 중국 남쪽의 5개 성을 중심으로 살고 있다. 이들은 예맥족과도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중략) 이들은 한반도 일대의 북맥(北貊)과 회하(淮河, 지금의 강소성 일대) 지방에 살던 남맥(南貊)으로 북맥은 3500여 년 전에 한반도로 건너갔다. 반면에 남맥은 진나라가 망하면서 그 유민들 중 한 부류는 한반도로 건너갔으며 또 한 부류는 운귀고원(雲貴高原, 오늘날의 운남성과 귀주성 일대의 고원)으로 쫒겨가 백족(白族)이 되었다. 이 민족을 중국에서 백월민(白越民) 또는 월족(越族)이라 부른다.’



윈리 교수의 설명은 중국에서 백이(白夷)라고 부르는 일족이 맥족인데 북맥은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 일찍부터 진출했고 회하와 양자강 일대에 살던 남맥은 일부가 한반도로 들어가고 다른 일부는 운남성으로 들어가 이들이 백족 또는 월족으로 불렸다는 것이다. 요컨대 양자강 일대에 살다가 운남성으로 들어간 백족과 우리나라로 들어간 북맥은 같은 민족이라는 것이다.



<토템도 달라>



정확한 기록이 없는 경우 민족의 기원을 찾는 방법 중에 하나가 그들의 토템(totem)이 무엇이냐도 중요한 관건이다. 고대 사회에서 같은 민족끼리 어떤 상징적인 동물을 숭상한 것을 토템이라고 한다.



그런데 화하족인 중국민족은 용을 토템으로 삼았고 동이족인 한민족은 새를 토템으로 삼았다. 그래서 중국인은 지금도 용의 자손이라고 믿고 있으며 용은 곧 중국인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황하문명의 상징이라고 간주한다(이형구 박사는 가장 오래된 용의 형상이 발해연안 북부의 대릉하 유역과 서요하 유역에서 출토되었다고 지적했다).



이동식은 과거에는 월족이 뱀을 토템으로 하고 있었지만 근래에는 월족의 토템도 새라고 발표된다는 점에 주목했다. 중국의 임화동 박사는 월나라 하모도 유적지에서 발굴된 유물 등 여러 자료를 근거로 월족의 토템은 새라고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월의 땅 심산에는 새가 있는데 비둘기와 같고 푸른색으로서 아조라고 부른다. (중략) 월나라 사람들은 이 새를 월축의 조상이라고 한다.’



월족이 새를 토템으로 삼았다는 것이 심상치 않다는 것은 절강성 여향현 양저에서 발견된 양저유적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연대는 기원전 3300~22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곳에서 벼농사를 위주로 했고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삼베옷은 물론 누에로 만든 옷도 나왔다.



그런데 이들 문화유적 중에서도 동이족 문화의 특징을 갖고 있는 유물들이 발견됐다. 종(琮)과 벽(壁)이라는 옥기이다. 벽은 옥을 편편하고 둥글게 깎은 것이고 종은 가운데 동그란 구명을 뚫고 측면을 사각형인 통 모양으로 만든 것이다. 벽은 하늘에 제사지낼 때 사용하고 종은 땅의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에 사용된다고 『주례』에도 적혀 있다.



그런데 옥으로 만든 종의 상부에 새가 한 마리 앉아 있는 형상이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에 있는 솟대와 꼭 같은 그림이다. 산동성의 용산문화에서도 새가 발견되는데 용산문화는 곧 동이족의 문화이다. 동이족의 풍습으로 간주하는 솟대가 양저문화의 유적에서도 발견된 것이다.



양저문화에서 나온 옥은 2004년까지 중국에서 가장 연대가 오래된 것이다. 옥은 양저문화보다 앞선 시기에 산동지방에서 발달했던 동이족의 이른바 대문구문화유적에서도 발견됐고 추후에 동이족이 세운 나라로 알려진 은나라 유적에서도 나왔지만 선사시대에는 양저문화에서 가장 많이 발견된다.



특히 한국인들이 가장 영험스런 새로 인식하는 봉황에 대해서도 『설문해자(說文垓字)』에서 ‘봉(鳳)은 신조(神鳥)로 동방의 군자의 나라에서 나왔다’고 적혀 있다. 동방의 나라란 동이족을 뜻한다. 봉황은 어질고 현명한 성인과 함께 세상에 나타나는 새로 알려져 있는데 수컷을 봉(鳳)이라하고, 암컷을 황(凰)이라고 한다. 그러나 본래는 암수를 구분하지 않고 ‘鳳’자만을 사용하였다.



양저문화보다 최소한 2000년 앞선 하모도문화에서도 새가 나온다. 하모도문화도 새를 토템으로 삼았다는 뜻으로 이는 절강성 북부를 대표하는 두 고대문화가 모두 새를 토템으로 하고 있는데 이것은 고대 신석기시대의 양자강에서도 동이족의 토템을 지키는 부족이 살았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큰 틀에서 동이족 전체가 토템으로 새만 신봉한 것은 아니라는 지적도 있음을 첨언한다. (계속)

(5341)

뉴스레터 구독신청
태그(Tag)

전체 댓글 (0)

과학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