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칼럼

인류문명의 미래: 운명인가 선택인가

[과학명저 읽기] 과학명저 읽기 37

지질학적 시간 단위 속에서 인류문명의 미래가 어떤 방식으로든 붕괴로 마무리되리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어떤 문명권은 변화해 가며 수천 년 동안 유지되어 왔고, 또 어떤 문명권은 흔적도 없이 또는 흔적만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생리학자로서 학문적 경력을 시작했던 저자 다이아몬드는 <문명의 붕괴>에서 비슷해 보이는 환경 조건 속에서 살아남은 사회 조직들과 그렇지 못했던 사회 조직들을 분석하여 그들이 생존에 실패하기도 하고 성공하기도 하는 차이를 찾아내려 시도한다. 그 과정에서 한 사회조직 즉 문명을 붕괴시키는 다섯 가지의 힘을 추출해 낼 수 있었다.

우선 환경의 파괴, 기후의 변화, 주변의 적대적인 세력, 우호적인 교역 세력의 영향 등 네 가지 힘들 중 두 세 가지가 특정 문명의 붕괴에 중요한 요인이 되곤 했음을 찾아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 붕괴된 문명의 모든 사례에서 환경의 변화에 대한 대응방식에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대부분의 경우 환경에 대한 대응 방식에 따라 그 사회가 붕괴되지 않을 수 있는 길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작업 즉 과학으로서의 인류문명학이 인류의 성공적인 미래를 위해 어떤 지침을 보여주고 있는지를 제시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외진 유인도 이스터 섬의 거대한 석상 이야기는 인류문명의 미래를 위해 극적인 비유를 제공해 준다. 칠레 해안으로부터 3천700킬로미터, 가까운 섬으로부터도 2천10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이스터 섬의 거대한 석상은 18세기 초 유럽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이래 오랫동안 이해하기 힘든 기술적 의문의 대상이었다. 바퀴도 사용하지 않고, 가축도 없으며, 금속 도구는 물론 변변한 나무 한 그루 없는 헐벗은 섬의 소수 거주민들이 어떻게 수십 톤에서 수백 톤에 달하는 수백 개의 거대한 석상을 세울 수 있었을까?

20세기에 들어 화분분석이나 동위원소분석 그리고 인류학적 발굴 작업 등을 통해 이 섬에 늦어도 900년경부터 많게는 3만 여 명이 살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현재의 풍광과는 달리,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던 무렵에는 여러 종의 거대한 수목이 섬을 뒤덮고 있었고, 거대한 석상은 십여 부족들이 경쟁적으로 제작했다는 사실도 확인 할 수 있었다. 결국 이스터 섬의 거석문명을 붕괴시킨 힘은 적대적인 세력의 힘이나 우호적인 세력의 상실 또는 극적인 기후 변화가 아니라, 삼림의 파괴라는 단순해 보이는 환경요인으로 인한 결과였다.

세계 여러 지역으로 진출했던 바이킹은 도처에 흔적을 남겼다. 영화에서 보게 되는 해적이 아니라 농부나 상인으로서의 바이킹 역시 유럽 전역에 그 언어와 기술적 흔적을 남겼다. 북대서양의 작은 섬들이나 아이슬란드에서는 천여 년 째 그 조직을 유지하고 있기도 하다. 반면 바이킹은 북아메리카에 정착하려던 시도를 십여 년 만에 포기했다. 적대적인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위협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역사학자나 고고학자들은 그린란드에서도 수천 명 정도의 바이킹들이 생활했던 근거지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린란드에는 바이킹 이전에 이누이트들이 이주해 살고 있었지만, 아메리카 인디언들만큼 강하고 적대적인 이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상당히 호화로운 성당까지 짓고 살아가던 수천 명의 바이킹이 왜 그 지역을 포기했을까. 역사학자들은 중세 소빙기의 추위를 견디다 못해 이들이 그린란드를 철수했으리라는 정도를 상상할 수 있었다.

과학자인 저자는 그린란드의 토질이 얼핏 보기와는 달리 바이킹의 본토와는 달리 농경에 적합하지 못했는 사실도 적시한다. 그렇지만, 바이킹들이 이누이트보다 생리적으로 추위에 약했을까? 이누이트 사람들은 그 추위를 견디고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의 사회조직을 유지하며 살아오고 있지 않은가?

저자는 규모에 비해 너무 커 보이는 바이킹의 교회건물 터에 주목한다. 바이킹이 유럽인으로서의 문화적 정체성, 기독교인으로서의 종교적 정체성에 과도하게 집착하면서 유연하게 이누이트와 교류하고 또 그들로부터 배우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는 관찰이었다. 즉 그린란드의 이누이트 족은 환경에 적응하면서 살아남을 수 있었고, 그 곳의 바이킹 사회조직은 잘못된 생활양식을 선택함으로써 붕괴되었다는 분석이다.

이런 이야기들이 현대문명에 어떤 성찰을 제공해 주는가. 이스터 섬에서 마지막 남은 나무를 베어내던 1600년경의 이스터 주민은 나무가 없는 섬의 미래를 예상하지 못했을까? 다이아몬드는 그 사람이 아마도 섬 환경의 변화를 그리 절실히 느끼지 못했으리라고 본다. 현대인들이 한 해 한 해 나빠지고 있는 환경의 변화를 정상적인 상태로 느끼듯이, 또 50여 년 전의 자연 풍광은 대중의 기억에서 상실되고 말듯이, 마지막 한 그루의 나무를 베어내던 이스터 사람 역시 대단한 변화를 감지하지는 못했으리라는 것이다.

이스터 섬 사람들은 왜 그리도 열심히 나무를 잘라 냈을까. 주거공간을 따스하게 하거나 음식을 하는데도 나무가 필요했겠지만, 미래의 방문자들을 놀라게 할 그 거대한 석상을 운반하는 도구로 가장 많은 나무가 사용되었다. 거대 석상을 만들지 못하는 사람들은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던 듯하다. 마찬가지로 규모에 어울리지 않게 큰 교회를 지니고 있던 그린란드의 바이킹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석유자원이 한정되어 있음을 알면서도 대형 승용차를 구입하는 현대의 운전자들의 행태는 또 어떨까. 에너지를 이용하는 모습에서나 종이를 쓰는 모습에서나, 현대문명의 미래는 실패한 사회조직의 전철을 밟고 있는 게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다이아몬드는 필사적으로 현대문명의 붕괴가 피할 수 없는 운명은 아니라는 시나리오를 구상한다. 대부분 붕괴된 문명의 경우, 그 붕괴를 피할 수 있는 선택의 길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스터 섬과 비슷한 정도로 외부와 격리되어 있던 뉴기니 고지대 사람들은 천여 년 이상을 지속 가능한 형태의 농경을 유지하며 과밀해 보이는 인구를 지탱해 가며 살아왔다. 같은 섬을 나누어 살아가고 있는 도미니카 공화국과 아이티 사람들은 현재 아주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두 국가 사람들이 살아가는 환경의 차이는 다른 어떤 지리적 환경적 조건의 차이보다도, 두 국가를 운영하는 사람들의 선택과 의지의 차이에 기인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지난 이십여 년 사이에 미국을 주도해 온 사람들의 선택은 불행히도 도미니카 공화국보다는 아이티에 가깝다고 다이아몬드는 진단한다. 사회의 일부계층이 울타리를 치고 경비원과 정원사를 고용하여 대부분의 아름다운 경관이나 해변 등을 독점하고 자원을 제한 없이 헤프게 쓸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게 미국 사회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세기 초 대통령 선거 중 플로리다 주에서 수백 표 정도의 표를 공화당 측이 더 얻었던 사건이 사태를 악화시켰다.

그 결과 고어 대신 부시가 대통령이 되면서 미국의 환경 및 경제 정책을 도미니카 공화국보다는 아이티와 비슷한 방향으로 이끌었다. 그런데, 이로부터 저자는 역으로, 수 백표 정도의 투표 차이로 미국의 환경 정책이 결정적인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음을 보여주었던 사건으로 볼 수도 있다며 희망의 끈을 읽어낸다.

인류 문명의 붕괴를 막기 위해서는 환경에 대한 충격을 줄이기 위해서 부유한 사람들이 ‘소비 가치와 생활수준’을 양보해야 한다는 불가능 해 보이는 과제가 놓여있음을 저자는 인정한다. 아직 절제가 필요 없는 소비생활을 누려보지 못한 더 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꿈을 꾸지 말도록 설득하는 것은 더더구나 불가능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인류 문명의 붕괴 즉 삶을 지탱해 주는 환경의 파괴에 저항할 수 있는 길들을 간곡한 자세로 제안한다.

그의 첫 번째 책 <총 균 쇠>가 지난 여름 과학명저로 소개되었는데, 대학 도서관에서 수년째 가장 많이 대출되었다는 보도 때문이었다. 사실 그 책은 고색창연한 유럽 중심주의적 환경 결정론이라는 허술한 가정들과 추측들 그리고 억측들로 인해 까다로운 독자들에게 그리 ‘과학적’이라는 인상을 주지는 못했다.

이 책 <문명의 붕괴>에서도 비슷한 추론들과 넘기 힘들어 보이는 논리들 사이의 괴리가 느껴진다. 하지만 저자가 강조하는 인류의 환경과 미래를 공부하는 그의 ‘과학’이 우리의 삶에 성찰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성찰의 실마리들을 제공해 주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현란한 상상력과 매끄러운 문체 외에도, 이 책에서 독자는 인류의 환경 문제를 현장에서 보도하듯 과감하게 파헤치는 저자의 충정을 함께 느낄 수 있다. <총 균 쇠>의 영문판 제목의 부제는 ‘Fates of Human Societies’였으며, <붕괴>의 부제는 ‘How Societies Choose to Fail or Succeed’였다. <총 균 쇠>를 읽은 독자들이라면, 또는 이야기를 들어 본 독자들이라면, 비슷한 상황을 운명으로 그려 내는 것과 선택으로 그려 내는 서술의 차이를 확인 해 볼 것을 권한다.

얼핏 독자를 압도하는 듯 느껴질 책의 분량은 정말이지 문제가 안 된다. 독자들에 따라서는 “좋은 일자리를 찾아낼 희망이 있는 건강한 사회(710쪽)”로 표현되는 한국 이야기가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래도 실팍한 내용과 감동에 더해 얼마나 쉬이 읽히는지 놀라게 될 것이다.





소개도서: 재레드 다이아몬드, 강주헌 옮김, <문명의 붕괴>, 김영사, 2007/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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