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생존을 위해 선택한 것은?

[허구에서 바라본 전염병] (4) 정유정 ‘28’

병은 ‘빨간 눈’을 하고 나타났다. 환자들의 눈 흰자위는 핏빛이었다. 안구 자체가 선지 덩어리처럼 보였다. 눈꺼풀과 눈두덩은 고름이 차올랐고 자줏빛으로 물들었다.

사람과 개, 모두가 죽어갔다. 아이스링크는 거대한 장례식장이 됐다. 격리자들은 트레일러에 갇혀 죽어갔다. 군인들은 전염병으로 봉쇄된 도시를 벗어나려는 시민들을 향해 발포했다. 강간, 살인, 약탈 등 전염병보다 더 무서운 것은 사람들의 광기였다.

정유정 작가의 장편소설 ‘28’은 치사율 100%, ‘빨간 눈 괴질’이라는 신종 인수공통 전염병이 발발한 한 도시를 봉쇄하면서 일어나는 28일간의 재난 상황을 치밀하게 그려낸다.

인간과 개가 함께 걸리는 신종 전염병이 발발한 도시

소설 ‘28’의 배경이 되는 화양은 다섯 개 산과 열두 개 봉우리 안에 들어앉은 분지 도시다. 주인공 재형은 화양시 백운산 기슭에서 유기동물보호소이자 동물병원이기도 한 드림랜드를 운영하는 수의사이다. 그는 알래스카 교포 1.5세대로 알래스카에서 한국으로 돌아와 S대 수의학과를 졸업하고 유기견 구조에 청춘을 바치고 있는 중이다.

정유정 작가의 소설 ’28’은 개와 인간이 함께 걸리는 전염병이 발생한다면 어떤 결과가 생길까 하는 의문에서 시작된 이야기다. ⓒ 김은영/ ScienceTimes

그가 유기견을 구조하며 맞닥뜨린 병의 정체는 사람과 동물이 함께 걸리는 전염병(인수공통 전염병)이었다. 시내에는 ‘빨간 눈’을 한 환자들이 하나둘 늘어났고 이들은 ‘빨간 눈’을 한 후 한나절 정도면 갑자기 40도가 넘는 고열에 시달리다가 이삼일 안에 폐출혈로 사망했다.

개들이 먼저 병에 걸렸다. 그 무렵 창고에 갇힌 개들에겐 몹쓸 일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하나둘, 차차 한꺼번에, 기침하고 냄새 고약한 콧물을 흘리고 설사를 하고 턱과 다리를 떨면 쓰러졌다.

처음 ‘빨간 눈’ 병이 세상에 드러난 건 시내 아파트에서 개들을 번식견으로 사육하던 한 남자를 구조하면서였다. 개 장수가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실려 간 후 그를 구조한 119 구급 대원들이 심한 결막 출혈, 두통, 고열, 폐출혈 등 남자와 비슷한 증세를 보였다.

현장에 있던 경찰 둘과 개를 사육하던 남자가 사는 화양 맨션 관리인 노인과 주민들도 모두 같은 증세를 보였다. 이들을 치료했던 병원 의사와 간호사들도 모두 같은 증세로 인공호흡기를 찼다.

환자 수는 갈수록 늘어갔다. 하지만 더 무서운 건 이게 무슨 병인지 아무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의사들의 처방전은 무용지물이었다. 화양시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붙은 공고문에는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감염병 예방에 대한 안전 수칙이 나붙었다.

“손 씻기를 잘하고 모임에 나가지 말 것.”

119 구급대에도 안전 수칙이 붙었다. 구급 대원들에게 고글과 마스크, 라텍스 장갑 착용 지침이 내려졌다. 환자를 발견하면 일괄 종합의료원으로 후송하고, 후송 후 모든 이동 침대와 차내를 소독할 것과 대원들은 귀서 후 소독제로 손과 얼굴을 닦아야 할 것 등이다.

인간의 악, 전염병 속에서 바이러스처럼 번져

저녁 5시에는 소설 속 대통령의 담화문이 발표됐다. 대통령은 ‘빨간 눈병 괴질’이 2000만 수도권 인구는 물론 전국으로 퍼져 전 국민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다고 보고 국가 위기 단계를 최고 단계인 ‘심각’으로 격상시켰다.

화양은 봉쇄됐다. 군인들이 서울로 향하는 길을 막아섰다. 전경 버스 대신 장갑차 군단이, 경찰 병력이 아닌 거총 보병이 봉쇄선을 구축했다. 바리케이드 안쪽에선 물대포를 앞세운 병력이 확성기로 경고 방송을 내보내고 있었다. 고글과 마스크 같은 방역물품과 기본 생필품은 순식간에 동나버렸다. 사람들은 라면 한 상자를 두고 주먹다짐을 하고 사람들은 쇠파이프로 상점 유리창을 깨고 들어갔다.

‘빨간 눈’의 원흉이 개라는 말이 돌았다. 재형은 개들과 사람의 증세가 비슷하다는 점에서 개와 사람이 같이 병에 걸리는 광견병이나 에볼라 같은 인수공통 전염병이라고 추정했다. 하지만 잠복기는 짧고 경과는 몇 배 빠르고 개가 개한테, 개가 사람한테, 사람이 사람한테, 사람이 개에게 전염시키는 게 모두 가능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정체를 짐작하기 어려운 신종 전염병임이 분명했다.

인수공통 전염병은 사람에게도 그렇지만 병원균으로 지목되는 동물들에게는 더욱 가혹하다. 구제역이 돌면 수백만 마리의 소와 돼지가 살처분되었듯이 개들도 몰살당할 운명에 놓여있었다.

반려견들도 줄줄이 버려졌다. 하나같이 사랑을 듬뿍 받고 소중하게 대우받으며 살아왔을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주인들은 병이 걸리는 것을 두려워하며 개들을 버렸다.

군인들은 ‘유기견 소탕’이라는 명분으로 개를 향해 총을 쏴댔다. 개들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어떤 전염병이든 인간에게 위해가 된다면 그 원인으로 지목된 종은 살아남을 수 없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개들을 죽였다. 그저 놀이로 죽이기도 했다. 인간에게 그런 권리가 있는 걸까. 작가는 ‘생때같은 생명들을 차떼기로 쓸어다가 생매장할 권리를 누가 인간에게 주었을까’  허공에 되묻는다.

치안이 부재한 무간지옥이 되어버린 도시에서 전염되는 것은 바이러스뿐만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광기에 전염됐다.

누군가는 아침나절 음식쓰레기를 버리러 나온 여성을 집단 강간했다. 누군가는 부모를 살해하고 방화를 저질렀다. 봉쇄된 도시를 탈출하겠다는 시민들에게 총을 쏜 것도 모두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였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어디까지 악랄해질 수 있을까. 병이 발병한 후 28일간 인간과 개, 모두에게 지옥이었던 도시 속에서 정말 무서운 것은 바이러스가 아니라 인간이 생존을 위해 퍼뜨리는 ‘악(惡)’이었다. 작가는 인간이 없는 세상, 모든 생명이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세계가 바로 ‘꿈의 나라’ 라고 씁쓸하게 읊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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