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칼럼

인간과 로봇의 공진화?

[과학명저 읽기] 과학명저 읽기 46

초등학교 시절 <강철 도시(원제: The Caves of Steel), 1954>라는 책에 매혹된 기억이 있다. 당시에는 저자인 아이작 아시모프가 과학소설계에서 엄청난 거장이라는 사실을 몰랐고, 그냥 로봇이 등장하는 엄청 재미난 추리 소설이라 생각하며 읽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작품은 아시모프가 또 다른 과학소설계 거장인 존 F. 캠벨의 도발적 주장, 즉 과학소설과 추리소설은 그 특성상 서로 양립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반론을 제기하려 쓴 것이었다.

작가가 자유로운 상상을 통해 독자가 모르는 미래 세계에 대한 사실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과학소설의 장르적 특징이 개연성 높은 추론이 가능할 것을 요구하는 추리소설과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 캠벨의 논리였다. 이에 아시모프는 과학적 소재와 추리적 전개를 훌륭하게 결합한 소설로 응답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내 마음을 빼앗았던 부분은 이런 복잡한 뒷이야기가 물론 아니었다. 합리적인 로봇 형사 대닐과 감정적인 인간 형사 일라이저가 서로 협력해서 살인 사건을 해결해 나간다는 설정 자체가 매혹적이었다. 특히 거의 모든 면에서 (일라이저가 드물게 발휘하는 ‘인간적’ 직관을 제외하면) 인간보다 더 똑똑해 보이는 대닐이 로봇공학 3원칙에 제한을 받아 인간의 명령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상황 설정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인간이 구체적으로 지시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로봇이라면 모를까 왜 차분하게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로봇이 (게다가 공정하고 선하기까지 하다!) 쇳덩어리 취급을 받아야 하는가?

소설은 로봇에 대해 극단적인 혐오가 일반화된 지구 거주민과 로봇, 특히 인간과 닮은 로봇에 의존하는 삶이 일상화된 우주 식민지인 사이의 대조를 설정하고 있는데 이 점도 생각거리를 많이 제시했다. 내게 <강철 도시>는 인간과 로봇의 관계맺음이 미래에 어떻게 서로 다른 문화와 제도로 구체화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인간과 로봇 공진화의 ‘두 도시 이야기’라고나 할까?

당시 내가 느꼈던 이상함, 혹은 불편함은 나중에 돌이켜 보니 일종의 ‘윤리적’ 불편함이었던 것 같다. 로봇은 인간이 자신의 편리함을 위한 도구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인류역사의 불편한 진실 중 하나인 인간 노예와 유사하다. 하지만 로봇과 인간 노예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인간 노예는 부당한 대우에 저항하거나 극단적인 경우 스파르타쿠스처럼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지만 로봇은 그럴 가능성이 원리적으로 차단된 ‘안전한’ 노예인 것이다.

게다가 물론 아무리 플라톤을 비롯한 여러 고대 사상가들이 노예와 자유민 사이의 ‘본질적’ 차이를 강조했더라도, 둘 모두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은 적어도 우리에게는 너무도 자명하다. 당시에도 자유민과 노예의 본질적 차이를 믿는 사람들조차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 순식간에 노예로 신분이 바뀐 자유민이 갑작스럽게 ‘노예에게’ 합당한 본성을 획득하게 되었다고 주장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도덕적 직관은 ‘존엄성’을 가진다고 전제되는 인간과 평가대상이 얼마나 유사한 존재인지에 따라 달라지곤 한다. 그러므로 공장에서 사용되는 기계장치에 가까운 로봇과 달리 대닐처럼 너무도 ‘인간스러운’ 로봇이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을 불편하게 느끼는 것은 자연스럽다. 우리의 본성에 자리잡은 공감능력이나 도덕 판단능력이 자연스럽게 ‘뛰어난’ 로봇에까지 확장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확장은 단순한 오류로 간주될 수 있다. 일찍이 데카르트는 다리를 다쳐 슬프게 우는 개를 보고 동정심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복잡한 기계에 불과한 동물인 개의 울음소리는 단지 기름칠이 제대로 안 된 바퀴가 내는 끼익거리는 소리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강철도시 거주인들은 로봇에 대해 정확히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며 자신들의 로봇 차별을 정당화한다.

하지만 대닐처럼 고도로 발달한 로봇에게 일종의 ‘권리’를 부여하지 않는 것이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도대체 권리라는 개념 자체는 어떤 근거에서 부여되거나 획득될 수 있는 것일까?

이런 심오한 정치철학적 질문에 대한 보다 체계적인 탐색의 과정이 <아이, 로봇(1950)>에 제시되어 있다. 원래 이 작품은 아시모프가 1940년부터 단편으로 발표해 온 작품을 한 데 모아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서사 구조를 부여한 것이다. 로봇공학 3원칙이 처음으로 등장한 책으로도 유명하다. 책의 얼개는 ‘U.S. 로보틱스’라는 로봇 제작회사에서 오랫동안 로봇심리학자로 근무한 수잔 캘리 박사가 자신을 취재하러 온 리포터에게 근무 과정에서 만난 인상적이었던 로봇에 대해 회고하는 형식을 취한다.

여기서 로봇심리학이라는 분야가 독자에게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다. 마음은 인간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로봇심리학이란 애초 불가능한 개념이 된다.

하지만 로봇심리학이 로봇과 인간과 정확히 동일한 마음을 가졌다고 전제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동물심리학은 인간의 심리를 연구하는 방법론, 즉 주의깊은 비교 관찰과 실험적 접근 등을 활용하여 외부적으로 관찰되는 동물의 행태와 그 행태와 연관되어 있다고 추정되는 동물의 ‘내면 세계’를 탐색한다.

이런 ‘내면 세계’는 꿀벌이 어떻게 꿀의 위치를 춤을 통해 표상할 수 있는 지처럼 인지적인 것일 수도 있고, 어미 침팬지가 죽은 어린 자식을 계속 데리고 다니며 보살피는 고착적 행동을 보일 때와 관련되는 감정적인 것일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로봇심리학은 로봇에게도 영혼이 있는지와 같은 존재론적 질문은 우회하면서, 대신 로봇의 행동으로부터 추론되는 ‘내면 세계’를 기능적으로 탐색한다.

캘리 박사는 로봇심리학자로서 로봇제작 기술의 가상적 발전을 따라가며 다양한 인지적, 감정적 복합성을 지닌 로봇들을 경험한다. 자신이 돌보던 소녀에게 애착을 느끼게 된 로리로 시작해서, 유희를 즐길 줄 아는 스피디, 성찰하고 따져보는 큐티, 리더십을 발휘하는 데이브, 상황에 따라 거짓말을 할 수 있는 허비, 자존심 때문에 비합리적 행동을 하는 네스터 10호, 딜레마적 상황에서 장난을 칠 수 있는 브레인, 인지적 능력만이 아니라 사회적 지능이나 도덕적 지능에서도 대부분의 인간보다 우월해서 대도시의 시장이 된 바이어리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흥미로운 점은 캘리 박사가 만난 로봇은 그 시점에서 ‘비정상적’으로 행동한다고 판단된 로봇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정상성’은 인간만이 향유한다고 여겨지는 애정이나 유희, 거짓말 등을 특이 행동을 보이는 ‘로봇답지 않은’ 로봇에게 부여된다. 하지만 점점 로봇의 지능이나 설계된 기능 수준이 높아질수록, 이전 로봇에서는 특이 행동으로 간주되던 특징 중 상당 부분이 신제품에서는 향상된 기능‘으로 구현된다. 하지만 여기서도 여전히 설게 단계에서 의도되지 않았던 ’인간적인‘ 로봇의 모습이 다시 나타나면서 로봇심리학자를 비롯한 ’사용자‘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결국 인간과 로봇을 구별하는 일은 항상 가능하지만 그 구별의 경계는 로봇 기술의 발전에 따라 항상 변화하며 지속적으로 미묘해진다는 점을 읽어낼 수 있다. 역사적으로 동일한 현상이 인간과 동물의 구별 과정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인간과 로봇 사이의 경계짓기에 대한 아시모프의 상상력은 복합적으로 의미심장하다.

비록 각 단편들은 독립적으로 출판되었지만 단편들을 이렇게 이어 놓으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가 드러난다. 그것은 바로 점점 더 ‘인간에게 고유한 능력’이라고 생각되던 일을 로봇이 하게 되고 나중에는 그 일을 훨씬 더 잘하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는 설정이다. 그렇다고 로봇이 인간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점점 진보하고 더 나은 상태로 가는 로봇에게 소설 후반부로 갈수록 인간은 더 이상 모방의 대상이기보다는 그저 ‘다른 종류의 지적 생명체’일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로봇공학 3원칙이 설계적으로 어떻게 구현가능할지는 그다지 분명해 보이지 않는다. 이쯤되면 인간과 로봇 사이의 공진화 과정이 더 이상 인간 주도로 이루어지기 어려운 상황이 되지 않을까?

<아이, 로봇>은 21세기를 기준으로 쓰여진 일종의 가상 로봇공학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가상역사이므로 로봇과 인간의 관계가 아시모프가 상상한 궤적을 정확히 그대로 따라갈 가능성은 낮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아이, 로봇>에 등장하는 여러 근원적 물음들, 즉 인간과 로봇, 특히 지성적이고 기능적으로 뛰어난 로봇의 본질적 차이점은 무엇인가? 그 차이점은 인간과 로봇의 사회적 차별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로봇이 독자적인 판단 능력을 갖는 것을 어디까지 허용해야 할까? 인간과 로봇이 함께 사는 바람직한 방식은 무엇인가? 그런 방식은 유일한가? 등은 이론적으로 흠미로운 동시에 실천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런 복잡한 문제를 고민하지 않더라도, 이 책은 읽기 시작한 순간 너무도 자연스럽게 빨려 들어가게 되는 장점이 있다. 과학명저로 서슴없이 추천하기에 충분한 자격을 두루 갖춘 셈이다.

주의사항 한 가지. 2004년 개봉된 윌 스미스 주연 영화 <아이 로봇>은 오늘 소개한 책의 내용 중 오직 네스터 10호의 이야기와만 느슨한 연결점이 있다. 그러므로 영화를 본 분들도 안심하고(?) 이 책을 읽기 바란다. 영화보다 훨씬 더 깊이 있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의 향연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소개도서: 아이작 아시모프 지음, 김옥수 옮김, <아이, 로봇>, 우리교육,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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