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과 항공기 수출 밑거름 역할

과학기술 50년 (11) 원자력-국방과학연구소

우리나라에는 지금 24개의 원자력발전소가 가동하고 있다. 2009년에는 한국에서 개발한 원자력발전소를 해외에 판매까지 했다. 국산 기본훈련기(KT-1)와 고등훈련기(T-50)는 이미 인도네시아로 수출하는 성과를 냈으며, 미국 고등훈련기 사업 참여를 위한 국산 고등훈련기(T-50A) 개발사업도 착착 진행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원자력발전과 군용 항공기 산업이 여기까지 온 것은 일찍부터 원자력연구원과 국방과학연구소를 세워 연구개발을 벌였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 오늘날과 같은 원자력 발전의 강소국(强小國)이 된 것은 과학자들의 헌신적이며 적극적인 노력과 지도자의 강력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 후 원자력 스터디 그룹 자발적으로 생겨

우리나라의 ‘원자력 1세대’로 분류되는 이창건 (88) 한국원자력문화진흥원 원장은 자발적으로 생긴 원자력 스터디그룹의 산 증인이다. 이 원장은 1954년 서울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한 후 62년 동안 원자력법 제정, 원자력 행정조직과 연구소 설립, 전력산업기술 기준 제정 등을 주도하며 한국 원자력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

원자력 1세대의 탄생은 일본의 패전과 연결되어 있다. 일본이 원자폭탄으로 항복 선언을 하자, 강대국들은 공포의 대상이 된 원자폭탄 개발경쟁이 일어났다. 이런 분위기를 바꿔보자고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1953년 유엔총회에서 ‘평화를 위한 원자력’을 주장하면서 ‘원자력은 에너지원으로 인류에게 큰 이익이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연구용 원자로인 '하나로'의 노심

연구용 원자로인 ‘하나로’의 노심 ⓒ 원자력연구원

이 원장은 “1954년부터 문교부 창고에서 윤세원, 현경호 등 이공계 공군출신이 주축을 이룬 ‘스터디 그룹’ 모임에서 ‘핵공학입문’을 비롯해 국제원자력기구(IAEA) 자료 등을 교재삼아 4년 정도 공부를 했다”고 말했다.

이 원장을 비롯해서 스터디 그룹을 결성한 과학자들은 ‘일본을 단 한 방으로 항복을 이끌어 낸 원자력이야말로 대한민국이 살 길이며 강대국으로 발돋움하는 유일무일한 길’이라고 확신을 가졌다.

지도자도 장단을 맞췄다. 국민소득 80달러 시절인 1958년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 과학고문 워커 시슬러 박사부터 ‘원자력을 하라’는 말을 듣고 이듬해 원자력연구소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가난했던 시절에 237명을 국비유학까지 보냈다.

뒤를 이어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 1년 예산의 25%를 투입해 미국 웨스팅하우스(WH)사에 고리 1호기 원전을 발주해 1978년 마침내 완공시킨다.

그러나 원자력 자립까지는 또 험난한 길이 남아 있었다. 원자력연구소는 대덕연구단지로 옮겨 새 둥지를 틀었지만, 원전 국산화까지는 긴 여정이 남아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8년 150명의 재미과학자들을 불러 세미나를 하도록 했다. 그 중 한 명인 장인순 전 원자력연구소장이다. 장 박사가 발표한 불소화학은 원자력연구의 핵심분야였다. 이듬해 한국으로 들어온 장 박사는 “아무 것도 없는 실험실을 보고 너무나 실망됐지만, 같이 일 할 연구원들의 눈빛을 보고 희망을 보았다.”고 회상했다.

유치과학자로서는 처음으로 대덕연구단지에 세워진 ‘공동관리 아파트’에 입주한 장 박사는 일주일에 80시간씩 일에 몰입했다. 장 박사는 원자력연구원장을 2번 하고 2005년에서 물러 난 뒤 2009년 고문을 끝으로 연구원을 떠났다. 그때까지 한 번도 휴가를 가지 않아 자녀들에게 원망을 들을 정도이다.

연구원들을 가장 힘들게 한 것은 오히려 우리나라 안에서 나왔다. 연구원을 향해서 무슨 기술자립이냐는 비판이 나왔으며, 한국표준원전이 있느냐 없느냐는 시비도 연구원들을 힘들게 했다.

이같은 논란은 “2009년 우리나라의 원자력발전소가 아랍에미레이트에 수출되면서 종식됐다”고 장 박사는 평가했다.

국방과학연구소 역시 ‘국방과학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절대 명제앞에서 항상 위기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달려왔다. 이렇게 시작한 연구결과는 국방과학 뿐 아니라, 민간 부분 연구에도 영향을 미쳤다.

군사용 무전기 개발 경험이 TDX-CDMA 개발로 이어져

군사 부분 연구에서 시작해서 민간부문으로 영향을 미친 대표적인 분야가 바로 무선통신이다. 우리나라가 현재와 같은 무선통신 강국이 된 요인 중 대표적인 것으로 관계자들은 TDX 개발과 CDMA 상용화 기술을 꼽는다. 이 두 가지 기술을 상용화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서정욱 전 과기부장관이다.

서정욱 박사가 상용화 기술개발의 다양한 실전경험은 국방과학기술연구소 시절에 다 닦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 박사가 초창기 국방과학연구소에서 군사용 무전기를 개발한 일화는 당시 연구원의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우리 실력에 무전기를 손 대느냐’는 만류를 뿌리치고 서 박사를 비롯한 젊은 과학자들은 휴대용 무전기 시제품을 개발했다. 이 소식을 듣고 너무나 놀란 박정희 대통령은 “국산 무전기로 직접 전화를 걸어 통화를 했다”고 서 박사는 회고했다.

20회 과학 창의축전에서 서정욱 박사가 과학기술 주요 성과 전시판에 서 있다. 서 박사는 "국방과학연구소에서 닦은 실력과 경험이 TDX개발과 CDMA 개발에 밑바탕이 됐다"고 말했다.

20회 과학 창의축전에서 서정욱 박사가 과학기술 주요 성과 전시판에 서 있다. 서 박사는 “국방과학연구소에서 닦은 실력과 경험이 TDX개발과 CDMA 개발에 밑바탕이 됐다”고 말했다. ⓒ 심재율 / ScienceTimes

1970년 초 박정희 대통령은 국방부 연두순시에서 방위산업을 전담할 부서설치를 지시, 그 해 8월 6일 국방과학연구소가 창설됐다. 연구소는 1971년 말 방위산업을 촉진하고 예비군 무장화를 조기에 달성하기 위한 ‘번개사업’을 시작으로 소화기, 발칸포, 로켓, 탄약 등 기본적인 무기체계와 장비, 물자 등의 개발능력을 확보했다.

1972년 11월 서울 홍릉에 신축 청사를 마련하였으며, 1974년 2월에는 유도탄 개발을 목적으로 대전기계창을, 1976년 5월에는 해군 장비개발을 위한 진해 기계창을 세웠다. 1980년 9월 2일에는 지역개념 조직체계를 무기체계별 임무개념으로 전환, 지상병기(서울), 해상병기(진해), 항공기 및 유도무기(대전), 통신전자(대전), 화공기재(대전) 등 5개 사업단과 시험평가단(안흥) 등 6개 사업단으로 편성했다. 연구소 본부는 1983년 1월 서울 홍릉에서 대전으로 옮겼다.

1998년 민군겸용기술센터를 설립하고, 2008년 9월 해미 항공시험장을 건설했다.

1990년대에는 신형 155미리 자주포, 중어뢰, 기본훈련기(KT-1) 등 고도정밀무기를 개발하였으며, 2000년대에는 항공기 및 함정 탑재 전자전 장비와 함대함유도탄을 비롯한 복합무기체계 능력을 갖췄다.

이제 우리나라의 국방기술은 고등훈련기를 해외에 수출하고, 전차를 직접 개발하며, 다양한 신무기를 자급하는 단계에 올라왔다.

미국 수출이 논의되고 있는 T-50a 고등훈련기. 국방과학연구소에서 처음 개발한 훈련기 KT-1이 밑바탕이 됐다. ⓒ 연합뉴스

미국 수출이 논의되고 있는 T-50a 고등훈련기. 국방과학연구소에서 처음 개발한 훈련기 KT-1이 밑바탕이 됐다. ⓒ 연합뉴스

그러나 원자력이나 국방과학 분야에서 우리나라가 겪는 도전은 과거와는 매우 다르다. 원자력은 깨끗하고 값싼 에너지의 지위는 유지하고 있으나, 태양열 발전 등 대체에너지의 도전은 거세고 셰일가스 등 기존 에너지의 경제성도 계속 좋아지고 있다. 원자력 발전소의 안전성과 경제성을 더욱 개선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군수무기 역시 마찬가지이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과 중국 군사력의 팽창에 대응하는능력을 키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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