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칼럼

우리가 바라는 바들을 두려워하다.

[과학명저 읽기] 과학명저 읽기 41

어린 시절 그저 멋진 세계를 이야기하는 책이겠거니 여기며 <멋진 신세계>를 들었다가 충격을 받았다. 무엇이 가장 충격적이었는지는 이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작은 문고본의 마지막 쪽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던 기억은 뚜렷하다. 짐짓 어른인체 하고 싶은 시절이라 울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성공은 한 듯하다. 그 덕분인지 1980년대에 미국에서 만들어진 미니시리즈가 TV에서 방영되었을 때는 어느 정도는 마음에 대비를 하고 빠져 들 수 있었다. 아무래도 공중파 방송용이었으니,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방송국에서 나름 순화했던 덕분도 있을 것이다.

▲ <멋진 신세계> 초판(1932)의 표지. ⓒ위키피디아

대공황 초기에 출판된 이 소설은 2차 대전 직후에 발표된 조지 오웰의 <1984>와 함께 자주 거론된다. (실은 예쁘게니 자먀친이 적백내전이 마무리될 무렵 쓴 <우리들>도 같이 언급될 만한데, 오웰에게 많은 영향을 준 <우리들>은 인지도는 좀 떨어진다). <멋진 신세계>와 <1984>의 비교 중에서는 10년 전쯤에 작고한 뉴욕대학의 인문주의자 겸 기술비평가인 닐 포스트먼의 대조가 자주 되풀이된다.

그것을 고쳐 요약하자면 올더스 헉슬리는 우리가 선호하는 바—쾌감과 안정—가 지배하는 사회를 두려워했고 오웰은 우리가 피하려는 바—박탈과 억압—가 지배하는 사회를 걱정했다. 하지만 과학과 사회체제의 관계를 기준으로 보면 이 두 작품의 대칭은 <멋진 신세계>로 기운다. 오웰의 소설에서는 체제가 기술을 동원하지만, 올더스 헉슬리는 기술이 가능하게 한 체제를 그려내었다.

올더스 헉슬리의 비전을 단순히 소설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영국과학소설의 전통과 그의 가계의 무게가 가볍지 않다. 과학소설이라고 하면 미국식 펄프픽션 계열을 떠올리기 쉽지만 H. G. 웰즈 이래 영국에서는 지식인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고급’ 과학소설이 꾸준히 이어져왔다.

웰즈는 쥘 베른에 비해 세부적인 과학기술적 정합성은 덜 증시하면서도 과학과 기술이 인간과 사회에 의미하는 바는 더 깊게 파고들었다. 이는 과학 지식이 부족해서 벌어진 일이 아닌 것이, 웰즈는 유명한 생물학자 토머스 헉슬리에게 훈련받은 과학교사 출신의 문필가이기 때문이다.

웰즈처럼 여러 분야에 걸쳐 문필가로 활약한 올더스는 토머스의 손자이다. 그의 동복형이 초대 유네스코 사무총장을 지낸 생물학자 줄리안임은 자주 언급되지만, 20년 연하인 이복 막내동생 앤드류가 왕립학회장을 역임한 노벨상 수상 신경생물학자임은 덜 알려져 있다. (사실 스노의 <두 문화>를 낳은 영국의 지성계는 소위 인문적인 것과 과학적인 것의 간극이 다른 나라에 비해 좀 더 좁았다. 모계로는 저명한 시인 매튜 아놀드의 영향을 받은 올더스 형제들은 이를 잘 보여준다. <두 문화>도 예전에 비해 두 문화의 간극이 벌어지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젊은 학생들에게 <멋진 신세계>를 읽히면 생명공학 또는 유전공학이 가져올 암울한 미래를 그렸다는 감상들이 돌아온다. 인큐베이터에서 인공 배양되면서 첫 울음을 터트리기 전에 이미 계획된 계급에 맞추어 조건 지워져 생산된 인간들의 사회를 그리고 있으니 당연한 반응이다. 그리고는 유전공학은 위험하다거나 작가가 기술을 너무 폄하한다는 즉자적인 반응들을 보인다. 그렇게만 읽어 내는 것은 불편한데, 올더스는 후속작격인 Island(1962) <멋진 신세계>에서 등장한 상상의 기술과 같은 부류의 기술들로 구성된 이상사회를 그려내었다.

오히려 <멋진 신세계> 곳곳에 등장하는 포드의 이름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포드식 생산방식이 사회적 자원으로서의 인간을 대량생산할 정도로 관철된 암울한 사회를 그리고 있다. 그래서 시대의 한계에 제약당한 채로 올더스가 상상한 생명공학보다는, 사람이 컨베이어 벨트에서 생산된다는 점이 더 상징적이다.

사실 대량생산은 나름대로는 민주적 가치에 기여하기도 한다. 더 많은 사람이 더 많은 물질을 누릴 수 있는 것은, 결핍의 만연에 비해서는 분명 더 민주적이다. 하지만 고전적인 포드식 생산방식은 차등이 없이는 지속되지 않는다. ‘멋진 신세계’를 새로운 계급사회로 그려낸 올더스는 이 점의 함의를 누구보다도 먼저 그리고 가장 멀리까지 내다보았다.

하지만 불안정을 추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닐까? 내면을 엿볼 수 없는 빅브라더가 지배하는 <1984>의 세계보다 한계와 모순을 누구보다도 더 절감하는 무스타파 몬드가 이끄는 <멋진 신세계>의 문명세계가 더 암울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멋진 신세계>는 바야흐로 소품종 대량 생산의 시대가 다품종 소량 생산의 시대로 넘어간다는 이 시대에 적실성을 잃은 것일까? 꾸준히 3D 프린터를 발전하고 있는 이 시대에 말이다. 올더스 본인도 Island의 이상사회를 대량생산이 관철되지 않은 분권회된 사회로 그렸으니 언뜻 일리 있어 보이는 지적이다. 소설 속의 사회상을 수능준비 하듯이 즉자적으로만 받아들이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수능 고득점용 훈련으로만 책을 읽는다는 것이 얼마나 빈곤한 것인지는 두 말할 필요 없다.

올더스는 약물을 이용해 자신의 마음을 조절하는 것 자체를 혐오하지 않았다. 스스로 종종 실행했다고 한다. 일단 시대의 한계라고 너그러이 보아 주어도, <멋진 신세계>에서 등장한 ‘소마’를 떠올린 독자들은 기겁할 노릇이다. 하지만 포스트만의 지적을, 올더스는 우리가 바라는 바가 우리를 지배하는 것을 두려워했다고 풀이하면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

파인만과 데카르트의 권고를 자신이 입증하고픈 바를 최선을 다해 부정해보라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올더스의 태도야 말로 근대적이고 과학적이다. 내가 3D 프린터에게서 바라는 바가 나와 우리를 좌우하는 상태는 무엇일까? 그런 상상은 문학적인 동시에 과학적일 것이다. 그렇기에 <멋진 신세계>는 언제나 삶과 과학을 이어주는 소설이다.

이렇게 읽는다면 좋은 과학소설만큼 기술과 사회에 대한 스스로의 숙고를 자극하는 경우를 찾기는 쉽지 않다. 번역된 소설 중에서는 르귄의 <빼앗긴 자들>을 빼놓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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