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칼럼

영국 공군의 당근과 비타민 A

[이름들의 오디세이] 이름들의 오디세이(100)

겨우내 귤을 많이 먹고 손끝이 노랗게 변한 경험이 한번쯤은 있을 것이다. 이는 카로틴 혈증(carotenemia)이라 부르는데, 귤을 적게 먹으면 자연스레 좋아진다.

카로틴(carotene)은 식물성 색소의 이름이다. 당근(唐根)를 뜻하는 라틴어 카로타(carota), 영어 캐롯(carrot)과 관련이 있고 당근에 많은 성분이라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당근 혹은 홍당무. ⓒ 박지욱

당근은 눈에 좋은 식물로 알려져 있다. 많이 먹으면 밤눈도 밝아지고 시력도 좋아진다는 속설이 있다. 하지만 틀린 이야기다. 비타민 A 가 부족해 야맹증(夜盲症)이 생긴 경우라면 당근이 눈에 도움이 되지만, 정상인은 당근을 아무리 많이 먹어도 눈이 좋아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당근을 먹으면 눈이 좋아진다는 이야기의 근원은 무엇일까?

지금으로부터 80년 전인 1940년 7월 10일, 나치 독일이 영국 본토를 공격하는 ‘영국 전투(The Battle of Britain)’가 시작됐다. 이 전투는 특이하게도 독일 공군만이 영국 본토를 공격하고, 이에 맞서 영국 공군이 출격하여 영국 영공에서만 치러진 전투였다. 영국 공군은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살려가며 파도처럼 밀려드는 나치 공군의 공격을 막아냈고 8월 31일 영국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나치 독일은 전략을 바꾸어 9월 7일부터 폭격기로 영국을 공습하기 시작한다. ‘블리츠(The Blitz)’라 불린 대공습이 이듬해인 1941년 5월 11일까지 이어졌다. 영국의 전쟁 수행 능력을 뒷받침하는 산업 시설과 주요 도시들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전의를 말려버리는 것이 대공습의 목표였다.

상상조차 어려운 엄청난 폭탄이 영국의 하늘에서 쏟아졌다. 처음에는 밤낮을 가리지 않던 나치 공군의 공습은 점차 야간 공습으로 자리 잡았다. 아무래도 낮에는 영국 공군 전투기들이 발진하여 몸놀림이 둔한 독일 폭격기들을 요격하기 쉬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밤이라고 해서 영국 전투기들이 날개를 접은 것은 아니었다. 밤에도 전투기들이 날아올라 적기를 상대했다. 이상하게도 독일 폭격기들은 캄캄한 밤하늘을 날다가 적이 슬며시 등 뒤로 다가와 비수를 꽂고 달아나는 패턴의 공격을 번번이 당했다.

나중에 영국 정부는 영국 공군의 전투기 조종사인 존 커닝햄(John Cunningham)이 ‘밤눈이 유난히 밝아서’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적기를 때려잡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발표를 했다. 더욱이 영국 정부는 커닝햄이 평소에 당근을 많이 먹어 고양이만큼이나 밤눈이 밝다고 밝혔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지만 커닝햄은 정말 캄캄한 밤하늘에서 고양이처럼 적기를 괴롭혔다. 1941년 4월에는 적기 5대를 격추시킨 조종사에게 붙은 호칭인 ‘에이스(ace)’의 반열에 등극했다. 이후로도 그는 19대의 적기를 격추 목록에 올렸는데 1기만 빼면 모두 야간 전투에서 얻은 값진 승리였다. 그에겐 ‘고양이 눈(Cat’s Eye)’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고양이 눈’이란 별명이 붙은 영국 공군 파일럿 존 커닝햄. ⓒ 위키백과

고양이 눈 커닝햄의 활약은 대공습으로 지쳐가던 영국 국민들에겐 희망의 메시지가 되었다. 정부는 때맞추어 ‘당근 먹고 건강해지고, 밤눈도 밝아지자’라는 캠페인까지 벌이기 시작했다.

영국은 주요 먹거리를 해외에서 수입해온 나라였다. 하지만 전쟁이 터지자 독일 해군은 영국 수송선단을 공격해서 식량 보급선을 끊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보내주는 잉여 농산물로 간신히 숨통을 틔웠지만 설탕이나 버터 같은 먹거리는 식탁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이때 당근이 등장했다.

당근은 이런저런 식재료와 혼합하면 설탕처럼 단 맛을 냈다. 당근은 텃밭에서 키울수도 있었다. 더구나 ‘고양이 눈’ 조종사의 등장과 함께 영국에서는 너 나 할 것 없이 당근을 많이 키우고 먹는 ‘당근 붐’이 일었다.

텃밭을 가꾸어 먹거리 생산을 늘이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빅토리 가든’ 캠페인 포스터. ⓒ 위키백과

한편, 미국의 매컬럼(Elmer McCollum, 1879~1967)은 아주 소량이지만 음식으로 보충해 주지 않으면 시력에 이상이 생기는 필수적인 ‘지용성’ 물질이 자연에 존재하는 것을 알았다. 1920년 영국의 드럼먼드(Sir Jack Cecil Drummond, 1891~1952)는 자신이 발견한 항-괴혈병 물질을 비타민 C로 명명하면서, 매컬럼와 풍크(Kazimierz Funk, 1884~1967)가 각각 발견한 필수 물질을 비타민 A, 비타민 B로 부를 것을 제안했다. 드럼먼드는 1925년에 비타민 A를 분리해냈다.

비타민 A는 물고기의 간에 풍부했다. 이 무렵 스위스의 카러(Paul Karrer, 1889~1971)는 노란색이 나는 카로틴 성분들(carotenoids)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1930년에 베타-카로틴(β-carotene)의 구조를 밝혔다. 1931년에는 우리 몸속에 들어온 베타-카로틴이 비타민 A로 변하는 것을 밝혔다. 이렇게 비타민은 아니지만 몸속에서 비타민으로 변신하는 것을 프로비타민(provitamin)이라 부른다. 이렇게 비타민 A는 맨 처음 그 구조가 밝혀진 비타민이 되었다.

한편, 미국의 월드(George Wald, 1906~1997)는 1933년에 망막(retina)에서 비타민 A를 분리해냈다. 망막에서 빛을 잡아채는 막대 모양의 세포(간상세포)가 있고 거기에는 색소이자 단백질인 로돕신이 있다. 그리스어로 ‘장미(rhodon)’와 ‘시력(opsis)’의 합성어인 로돕신(rhodopsin)은 옵신(opsin)과 레티날(retinal)이 결합된 상태인데 빛을 받으면 레티날이 떨어져 나온다. 이때 발생하는 에너지가 옵신을 활성화시켜 막대 모양의 세포를 흥분시킨다. 레티날은 망막을 뜻하는 retina(레티나)에서 온 이름이다.

떨어져 나온 레티날은 일부만 흡수되어 재활용되지만 대부분은 사라지므로 보충을 해주어야 한다. 하지만 사람은 레티날을 합성하지 못하므로 몸속에서 비타민 A로 변하는 식물성 카로틴을 먹어서 보충할 수 있다. 로돕신은 어두운 곳에서는 더 많이 필요하므로 비타민A 부족은 야맹증을 일으키는 것이다.

정리하면 당근, 호박, 귤 등에 풍부한 카로틴은 우리 몸속에 들어와 비타민 A, 즉 레티날이 되고 이것은 우리가 빛을 받아들이는데 쓰인다.

 

레이더(붉은 원)를 장착한 영국 공군 전투기. ⓒ 위키백과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에이스 커님햄은 유난히 밤눈이 밝지 않았고, 당근을 유난히 많이 먹지도 않았다. 그가 고양이 눈으로 불리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영국이 비밀리에 개발한 레이더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 레이더의 존재를 적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영국 정부는 일종의 연막작전을 편 것이다.

아울러 식량 부족에 허덕이는 국민들에게 당근 농사와 섭취을 장려하기 위해 캠페인을 전개한 것뿐이다. 그것이 오늘날까지 전승되면서 당근을 먹으면 눈이 좋아진다는 속설이 남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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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댓글 (1)

  • 박한얼 2020년 8월 3일12:09 오전

    레이더의 존재를 적이 모르도록 당근을 먹어서 눈이 좋다고…영국 정부의 재미 있는 연막작전입니다. 비타민에 관한 이야기는 역사 속에서 매우 다양한 소재로 나오는 이야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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