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인

“연구실 자료,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과학자 이야기 / 김종득 카이스트 교수

융합기초학부 추진단장을 맡고 있는 김종득 카이스트 초빙교수는 14일 오후 카이스트 캠퍼스 안의 터만홀(Terman Hall)로 향했다. 학부 1학년 학생들에게 융합기초학부를 설명하기 위해서다.

카이스트는 학생들이 원하는 학과를 선택하는 제도를 오래전부터 운영하고 있다. 학과 선택 시기는 1학년 신입생들이 2학년에 올라갈 때다.

때문에 각 학과는 이맘때 쯤 1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자기 학과를 소개하는 학과설명회를 열고, 지망생들을 모집한다.

이날 융합기초학부 뿐 아니라, 바이오및뇌공학과도 비슷한 시간에 학과설명회를 열었다.

연구실을 어떻게 처리하지? ⓒ 심재율 / ScienceTimes

KAIST 김종득 교수에게 연구실 자료 처리는 골치 아픈 문제다. ⓒ 심재율 / ScienceTimes

그런데 김 교수가 담당하고 있는 융합기초학부는 내년부터 처음 시작하는 전혀 새로운 지망분야이다. 때문에 이날 학과설명회는 그에게 아주 중요한 자리였다.

융합기초학부 학생 모집 설명회

김 교수는 설명회에서 카이스트가 추진하는 융합기초학부가 다른 대학에서 하는 자유융합전공과 무엇이 다른지, 왜 융합연구가 필요한지, 공대생들이 왜 현대물리의 기초를 배워야 하는지 등을 설명했다.

카이스트는 신생학부인 융합기초학부의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 진로설계 세미나, 교수 충원 등 다양한 보완책을 마련하고 학생들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카이스트는 이렇게 매년 학생들의 선택을 통해 끊임없이 현실에 부합하는 적응력을 높이고 있다.

학생들을 유혹하는 플래카드 ⓒ 심재율 / ScienceTimes

학생들을 유혹하는 플래카드 ⓒ 심재율 / ScienceTimes

카이스트 2회 졸업생인 김 교수는 모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 매우 다양한 분야의 일을 해 왔다. 국제협력, 영재교육, 입시제도 개선, 벤처기업 육성 등 학교 행정에 다양하게 참여했다.

이렇게 많은 보직을 오래 맡다 보니 석박사 과정 학생들의 세미나는 의례히 밤중에 시간을 잡아야했다.

세미나를 밤중에 하는 것이 미안했던 김 교수는 두 가지 독특한 방법으로 실험실을 운영했다. 우선 학생들이 세미나하면서 만들었던 자료들을 거의 버리지 않고 모아뒀다.

그의 연구실 한 쪽에는 94개의 자료더미들이 쌓여 있다. 이중 1개 더미가 한 학생이 졸업 할 때까지 발표한 세미나 자료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김 교수에 따르면 94명 학생들의 세미나 자료가 거의 2000개가 모였다고 한다. 졸업할 때까지 가장 많이 세미나를 한 학생은 40번 정도나 된다.

그 옆 연구실 바닥에는 김 교수가 썼던 다양한 보고서와 논문과 발표자료들이 두 줄로 길게 쌓여 있다.

2016년에 은퇴했다가 지난해 다시 융합기초학부 설립을 위해 초빙교수로 돌아온 김 교수는 이 자료들은 어떤 식으로든지 처리를 해야 한다.

이미 상당수 자료는 처리했지만, 남은 자료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큰 고민이다.

제자 94명이 남긴 2000건의 세미나 자료

물론 책장 한쪽면은 석박사 과정 학생들이 남기고 한 논문들이 들어 있다. 김 교수가 일생동안 일한 흔적은 94명의 제자와 2000건의 세미나 자료, 사람 키보다 높은 각종 보고서와 논문 그리고 책들이다.

김 교수는 이들 자료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큰 고민에 빠졌다. 이미 은퇴한 어떤 선배 교수들은 자신이 쓴 논문과 보고서를 폐기하면서 책자 표지에 새겨진 자기 이름만 칼로 도려내고 폐기한다는 이야기도 꺼냈다.

김 교수에게는 아주 특이한 또 다른 자료도 있다. 실험실에서 발행했던 실험실 소식지이다.

그가 연가를 가면서 실험실 소식지를 만들어보라고 한 것이 1987년이다. 그때부터 시작해서 2016년까지 무려 52회를 발간했다.

소식지에는 누가 결혼을 하거나, 아기를 낳거나, 학위를 취득하거나 하는 소소한 실험실 이야기가 담겨있다. 학생들이 쓴 자작시나 단상문, 실험실을 떠나면서 남긴 글 등도 담겨 있다.

김 교수는 가족신문을 만들기도 했다. 그는 자녀들에게 가족신문 기사꺼리를 마련하기 위해서 주말에 일부러 대전 주변 여행을 떠나기도 했을 정도로 가족신문에 정성을 기울였다.

가족신문은 99회까지 발행됐다. 모든 자녀가 결혼하면 100호를 내기로 했는데 아직 미혼인 자녀가 있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2년 전에는 900쪽 짜리 ‘에멀전과 분산’이라는 전공서적을 만들어 지인들에게 무료로 나눠주고 2000년에도 ‘계면현상론’을 써서 교재로 사용하기도 했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자료들이 이제 갈 곳이 없다는 점이다.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내면서, 밤샘하면서 씨름했던 자료들은 이제 사라져야 한다.

94명 제자들이 남긴 세미나 자료들 ⓒ 심재율 / ScienceTimes

94명 제자들이 남긴 세미나 자료들 ⓒ 심재율 / ScienceTimes

우리나라의 연구실이나 실험실은 교수가 은퇴하는 순간 공중으로 사라진다.

김 교수가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는 세미나 자료와 논문집 및 보고서 등은 김 교수만의 고민이 아니다. 이제 막 축적되기 시작한 우리나라 현대과학의 유산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진지한 성찰이 필요하다.

카이스트는 이런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젊은 교수와 원로 교수들이 함께 연구업적을 계승하는 ‘초세대협업연구실’을 지정하는 등 대책을 마련했다. 카이스트는 지금까지 4개의 초세대협업연구실을 지정했다.

그러나 이 정도의 숫자로는 학문의 세대융합이나 대를 이은 연구가 얼마나 진행될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때문에 은퇴하는 과학자들의 업적과 연구내용을 계승할 ‘사이버 실험실’의 설립이 필요하다는 의견에 공감대가 마련되고 있다.

은퇴를 앞둔 교수가 남긴 자료, 연구업적 등을 요약 정리해서 사이버 공간에 남겨놓자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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