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만 전염병에 걸려 사라진다면?

[허구에서 바라본 전염병] (5) 스티븐 킹 ‘잠자는 미녀들’

“네가 부자이든 가난하든 똑똑하든 멍청하든 상관없어. 이 낡은 세상에서 여자는 어차피 남자에게 쥐어 사니까. 네가 여자로 태어났다면 상처받고, 짓밟히고, 거짓말에 휘둘리고, 사기당하고, 먼지처럼 취급받을 테니까.”

국내에는 ‘잠자는 미녀들’이라는 제목을 달고 출판된 스티븐 킹(Stephen King)의 신작 ‘Sleeping Beauty(도서출판 황금가지)’는 ‘여자들만 전염병에 걸려 사라지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라는 의문에서 출발한다.

남자라는 한 가지 성만 존재하는 세상에서 남성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작가는 ‘여자만 걸리는 전염병’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통해 21세기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성차별과 사회적 폭력을 고발한다.

스티븐 킹이 아들 오언과 공동작업한 장편소설 ‘잠자는 미녀들(황금가지 펴냄)’은 여자들이 잠자는 전염병으로 인해 사라지는 세상을 그린다. ⓒ 김은영/ ScienceTimes

숲속의 오로라 공주처럼 잠드는 여자들

전염병은 어느 날 무심코 찾아왔다. 전염병이라고 유행한다고 해도 그것은 그저 지구촌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뉴스일 뿐이었다.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모두들 일상 속에서 뉴스를 소비하듯 오스트레일리아와 아시아 어딘가에서부터 일어나고 있는 ‘실신병’ 내지는 ‘수면병’이라고 이름 붙은 전염병에 무심했다. 자기 아내와 딸, 어머니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소설은 프랑스 동화 작가 샤를 페로의 ‘잠자는 숲속의 미녀(Sleeping Beauty)’에서 영감을 얻었다. 모든 이들이 알고 있듯이 샤를 페로의 소설에는 마녀의 저주를 받아 잠드는 오로라 공주가 등장한다. 샤를 페로의 소설보다 더 유명한 것은 월트 디즈니가 만든 애니메이션이다.

샤를 페로의 소설처럼 물렛가락에 찔려 백 년간 잠을 자게 되는 오로라 공주와 같이 세상의 모든 여자들이 잠에 빠진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작가는 저주에 빠진 공주를 왕자가 구해내는 동화식 결말에는 찬성하지 않는다.

샤를 페로의 소설처럼 물렛가락에 찔려 백 년간 잠을 자게 되는 오로라 공주와 같이 세상의 모든 여자들이 잠에 빠진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 게티이미지뱅크

전염병은 여자들에게만 돌았다. 여자들의 머리카락 사이사이에는 막처럼 생긴 하얀 물질이 촘촘히 붙어 있었다. 여자들의 눈과 코에서는 하얀색 거미줄 같은 줄이 분출됐다. 성긴 실로 감은 고치 같은 것들이 여자들의 머리를 완전히 감쌌다. 턱에서 벌집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뉴스 캐스터는 “왜 여자들에게만 이런 일이 생겼나”며 광분했다. 병은 노인과 어린이를 가리지 않고 연령에 상관없이 여성에게만 발생했다. 마구 자라나는 성긴 실을 건드리거나 잘랐을 때는 더 큰 문제가 발생했다. 고치 속에서 잠자는 미녀와 같았던 여자들은 마치 마귀와 같이 변해서 공격했기 때문이다.

소설의 배경인 둘링 카운티에 이 기괴한 전염병이 돌기 시작한 건 ‘이비 블랙’이라는 여자가 ‘트루먼 메이웨더’의 트레일러를 찾아가 트레일러를 방화한 날부터 시작된다. 이 날은 어느 날과 다를 것 없는 평범한 하루였다.

연일 뉴스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 수면병’에서 ‘여성 수면 독감’으로 다시 ‘오로라 병’으로 불리기 된 전염병이 화제였다. 언론에서는 여자들만 잠에 빠지는 이 전염병을 월트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잠자는 숲 속의 미녀’에 나오는 오로라 공주의 이름을 따와 ‘오로라 병’이라고 명명했다.

누가 이 여자들을 괴물로 만들었을까

한 남자는 엄마에게 자신의 주스를 안 갈아놨다며 엄마를 ‘바보 같다’고 농담을 청했다. 엄마 주변에 수북이 쌓여가던 마시멜로 같은 솜털을 가위로 제거한 후에 말이다. 고치 상태에서 벗어난 엄마는 제일 먼저 옆에 있는 믹서 컵을 들어 아들의 머리를 박살  냈다. 두툼한 플라스틱 컵이 뼈에 부딪치면서 둔탁하게 딱 소리를 냈다. 주스 속으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고치 상태에서 강제로 벗어난 여자들은 괴력을 가진 괴물이 됐다. 한 손으로 남자를 들어 벽에 내리꽂는 것은 너무 쉬웠다. 남자들의 물리적인 힘에 인생을 포기할 정도로 나약하기 짝이 없었던 여자들은 남자의 머리를 짓이겨 뇌를 스펀지처럼 흘러내리게 할 수 있었다.

자고 있을 때는 공주와 같이 평화로운 여자들이 강제로 깨우면 괴물로 변했다. ⓒ 게티이미지뱅크

잠든 여성과 그 여성을 깨우려 했던 다른 성인 간에 발생한 폭력사태만 해도 수백만 건에 이르렀다. 신고되지 않은 것은 더 많았다. 하지만 잠든 여성들이 사춘기 이전의 자녀에게 공격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신고는 거의 접수되지 않았다. 잠든 여성은 어린 남자 아기나 어린이를 제일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인계하거나 집 밖에 내놓은 뒤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와 잠을 자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람들은 이내 이 기이한 현상을 수긍했다. 모성애가 담긴 여자들의 행동에 무언가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믿고 강제로 여자를 깨우려는 것을 멈추기 시작했다. 대신 불속에 집어넣었다.

이 전염병은 왜 시작된 것일까. 소설은 계속 학대받고 살아가는 여성들을 비춘다. 70명이 수감되어 있는 둘링 카운티의 여자 교도소에는 낡은 사각형의 방에서 희망을 잃은 채 살아가고 있는 여성들이 가득하다. 범죄를 저질렀지만 전부 그들의 잘못 때문만은 아니었다.

교도소에는 가정폭력으로 한평생을 살아온 주부가 살기 위해 남편의 사타구니를 찔러 죽이고 들어온 ‘저넷’이나 약물에 심각하게 중독된 남편과 아들을 위해 교회에서 거액의 돈을 횡령해 잡혀 들어온 ‘클로디아’와 같은 여성들이 많았다. 모두 잘못된 남자들과 엮여 인생이 망가진 여자들이다.

데오드란트를 훔친 것을 눈감아주는 대가(代價)로 마트 직원에게 유사 성행위를 해주며 마약에 취해 하루하루를 살아온 ‘티파니’와 같은 여자도 마찬가지다. 평범하게 직장을 다니며 살던 티파니가 마약중독자가 되어 폐인으로 전락하게 된 건 애인 ‘트루먼’ 때문이다.

고치처럼 덮인 노숙자 할머니를 향해 외설적인 농담을 주고받으며 강간을 꿈꾸는 남자들의 모습도 낯설지 않다. 이들은 고치 상태의 여성들이 있다면 여자들의 비위를 맞출 필요 없이 성교할 수 있어 좋겠다며 시시덕거렸다.

작가는 시종일관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남성 중심의 눈으로 바라본 사회상을 고발한다. 하지만 이 모든 문제들이 남자 때문에 생긴 일은 아니라고 항변한다. 여자도, 남자도 일부가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어느 한쪽의 성이 또 다른 성을 억압하거나 차별하고 지배하려는 것은 멈춰야 한다고 경고한다. “양성이 함께 평화로운 방법으로 살 길을 모색해라, 그렇지 않으면 여성들은 ‘고치’ 속으로 들어가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현실에 남겨진 남성은 아비규환의 지옥을 맛볼 것”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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