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칼럼

에세이 영화의 선구자 ‘크리스 마커’

[전승일의 과학융합예술] 성찰과 사유를 보여주는 에세이 영화

문학에서 에세이는 ‘거의 모든 것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말하는 문학적 장치’라고 얘기한 영국 출신의 작가이자 문학평론가인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의 말을 빌리면, ‘에세이 영화(Essay Film)’는 ‘거의 모든 것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영화적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에세이 영화’의 주요한 특징은 성찰과 사유의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며, 사회성과 정치성의 강조, 이미지와 텍스트의 결합, 주관성과 객관성을 넘나드는 구성 방식, 과거와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역동적인 시점의 변화, 픽션과 기록 영상, 그리고 실험적 영상을 복합적으로 혼용하여 활용한다.

La Jetee Ⓒ Chris Marker

프랑스 출신의 필름 에세이스트 크리스 마커(Chris Marker, 1921~2012) 감독이 1962년 제작한 28분 길이의 단편 SF 영화 ‘La Jetee’는 3차 세계대전 이후 문명의 붕괴와 인류 종말(post-apocalyptic)의 디스토피아 시대를 담은 작품으로, 1995년에 미국에서 제작된 테리 길리엄(Terry Gilliam) 감독의 장편 SF 영화 ‘12 몽키즈’와 1984년 시작된 ‘터미네이터’ 시리즈에 여러 가지 주요 모티브를 제시했다. <관련동영상>

핵전쟁 이후의 세계와 시간 여행을 시적(詩的) 에세이 영화 형식으로 표현한 ‘La Jetee’는 1963년에 프랑스 영화 감독 장 비고(Jean Vigo, 1905~1934)를 기리는 ‘Prix Jean Vigo’에서 단편영화상을 수상했고, 타임지의 ‘Top 10 Time-travel Movies’에 선정되었으며, Sigue Sigue Sputnik 밴드의 1989년 싱글 ‘Dancerama’와 뮤지션 데이비드 보위의 1993년 노래 ‘Jump They Say’의 뮤직비디오에 영향을 주었다. ‘La Jetee’의 음악은 영국의 저명한 작곡가 트레버 던컨(Trevor Duncan)이 맡았다.

‘La Jetee’는 동영상은 사용하지 않고 영화 전체가 ‘Pentax Spotmatic’ 카메라로 촬영한 흑백의 스틸 사진과 배우 장 네그로니(Jean Negroni)의 내레이션 만으로 구성된 독특한 실험적 형식의 SF 영화이다. 2007년 멕시코의 조나스 쿠아론(Jonas Cuaron) 감독은 ‘La Jetee’의 흑백 스틸 사진 구성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장편 영화 ‘Year of the Nail’을 제작했다. ‘La Jetee’는 3차 세계대전의 생존자들이 식량과 보급품을 구하고, 자신들이 처한 끔찍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쟁 이전의 과거 시대로 주인공을 보내는 이야기이다.

A Grin Without a Cat Ⓒ Chris Marker

크리스 마커의 1977년 작품 ‘A Grin Without a Cat’은 60~70년대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을 휩쓴 신좌파(New Left) 운동의 부상과 중남미 사회주의 혁명 등에 초점을 맞춘 2시간 길이의 장편 다큐멘터리 에세이 영화로서 원제인 ‘Le Fond de L’air est Rouge’는 ‘공기의 본질은 빨강색이다’라는 뜻이 있다. 미국의 영화 평론가 데이비드 스테릿(David Sterritt)은 크리스 마커에 대하여 “열성적인 마르크스주의자이며, 세련된 사회주의자이다”라고 하였다. <관련동영상>

크리스 마커는 프랑소와 트뤼포(Francois Truffaut),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 클로드 샤브롤(Claude Chabrol) 등과 함께 프랑스 ‘누벨바그(nouvelle vague)’ 영화 운동의 일원으로 활동했는데, 특히 정치적 · 미학적으로 급진적인 입장을 취한 크리스 마커는 ‘좌안파(Rive Gauche)’의 주요 멤버로 아녜스 바르다(Agnes Varda), 알랭 레네(Alain Resnais), 자크 드미(Jacques Demy), 마르그리트 뒤라스(Marguerite Duras) 감독 등과 함께 ‘Left Bank Group’ 계열의 감독으로 불린다.

Sans Soleil Ⓒ Chris Marker

크리스 마커 감독이 1983년 제작한 또 다른 장편 다큐멘터리 ‘Sans Soleil’은 다큐멘터리 장르를 ‘실험적 에세이 영화’로 확장한 작품으로 일본과 서아프리카의 기니비사우(Guinea-Bissau) 공화국의 상반된 사람들 모습과 카보베르데(Cape Verde), 아이슬란드, 파리, 샌프란시스코 등에서 촬영한 영상 클립들이 삽입되었다.

시적인 이미지로 구성된 에세이 영화 ‘Sans Soleil’은 2014년 영국영화협회(British Film Institute)가 발행하는 영화 잡지 사이트 앤 사운드(Sight and Sound) 여론 조사에서, 영화 비평가들이 뽑은 역대 최고의 다큐멘터리 영화 3위로 선정되기도 했다. <관련동영상>

Level Five Ⓒ Chris Marker

또한 크리스 마커는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1997년에 제작한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 ‘Level Five’와 ‘Immemory’를 상호대화형 CD-ROM 버전으로 만들기도 했다. ‘Level Five’는 2차 세계대전 중 오키나와 전투를 컴퓨터 게임으로 만드는 프로그래머 로라(Laura)에 대한 몽상적 기록이다. <관련동영상>

그 후 크리스 마커는 2005년 뉴욕 현대 미술관 전시를 위해 T. S.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의 시 ‘황무지(The Waste Land)’로부터 영감을 받은 ‘Owls at Noon Prelude: The Hollow Men’이라는 제목의 19분 길이의 멀티미디어 비디오 설치미술을 제작하는 등 평생 수많은 작품을 만들었으며, 국내에는 그가 한국전쟁 직후 북한을 여행하며 촬영한 사진집 ‘북녘 사람들(Coreennes)’이 출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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