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칼럼

실패한 걸작, B-70 발키리 폭격기

[밀리터리 과학상식] 마하 3급 전략폭격기... 미국 항공우주기술의 위엄은 확실히 선보여

XB-70A 1호기 출고식 모습 ⓒ미 공군

 

때는 1950년대, 미국은 불타버린 유럽을 대신해 세계 최강국으로 부상하고, 사상 최대의 경기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소련과의 핵전쟁 위험성도 날로 높아가고 있었다. 이를 막기 위해 미국은 두둑해진 주머니로 여러 가지 황당하기까지 한 첨단 병기 개발에 나서는데, 이번에 다룰 B-70 발키리(북유럽 신화의 여신 이름을 땄다)도 그런 배경에서 개발된 물건이다.

 

소련과의 핵전쟁에서 이길 비행기를 달라

1948년부터 1957년까지 미국 전략공군 사령부의 사령관을 지냈던 커티스 르메이 장군은, 하루가 다르게 핵 전력과 방공 전력을 강화하는 소련에 대해 보복 공격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B-52 폭격기의 항속거리와 폭장량, B-58 폭격기의 초음속 비행성능을 갖춘 폭격기가 필요하다고 결론지었다. 이에 따라 미 공군은 1955년 11월 보잉 사 및 노스 아메리칸 사와 해당 폭격기 개발 경쟁 계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공군은 이 항공기의 작전요구성능으로 20,000파운드(9톤)의 고위력 핵무기를 탑재하고 대륙간 비행 가능한 항속 거리, 1,000마일(1,600km) 거리의 침투 능력, 마하 0.9의 순항 속도, ‘최대한 빠른(사실상 마하 3급)’ 최고 속도를 제시했다. 미 공군은 1964년까지는 이 폭격기 1개 비행단을 전력화하고자 했다. 초기에는 원자력 추진도 검토했으나, 원자력 추진안은 1961년에 기각되었다.

보잉 사와 노스 아메리칸 사가 제출한 설계안을 비교 검토한 결과, 노스 아메리칸 사의 설계안이 더 우수한 것으로 판단, 1957년 12월 23일에 이를 채택했다. 노스 아메리칸 사는 압축 양력이라는 효과를 이용하여 항력을 높이지 않고도 양력을 30% 더 높일 수 있었다. 압축 양력이란 초음속 항공기의 날개가, 동체가 일으킨 충격파 뒤쪽의 압력장을 이용해 항력의 증가 없이도 양력을 발생시키는 현상이다. 이 항공기의 전방동체가 주익 앞으로 유독 길게 튀어나온 것이 이 때문이다. 또한 노스 아메리칸이 이 항공기에 자사의 장거리 마하 3급 전투기인 XF-108용 J-93 터보제트 엔진(후기연소기 사용 시 최대추력 28,000파운드)을 사용할 수 있다고 발표한 점도 군수 측면에서는 매력이었다. 그 외에 조종실 바로 뒤에 플랩이 달린 카나드를 설치해 기체의 균형을 잡고자 했고, 날개는 고속비행에 알맞은 델타익이었다. 엔진은 J-93이 6개 탑재되었다. 기체 외피도 비행 시 340도가 넘는 공기 마찰열에 견디기 위해 일반적인 알루미늄 대신 허니컴 샌드위치 구조 스테인리스 강이 사용되었다.

원래 높은 공기저항을 견뎌야 하는 마하 3급 항공기를 만들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일단 본격적인 개발이 진행되면서 공군의 작전요구성능은 더욱 까다로워져만 갔다. 최대이륙중량은 537,000파운드(약 243톤) 이상으로 늘었고, 폭탄창도 1개 더 증설, 항속거리는 6,500마일(10,500km) 이상으로 늘었다.

혁신적인데다가 비용마저 저렴한 무인 신무기 ICBM(대륙간 탄도탄)을 더 선호한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1959년 B-70 프로그램을 일시 취소시켰으나 공군의 반발로 인해 그 이듬해에 재개되었다. 이후에도 생산 대수를 놓고 행정부와 공군 간의 줄다리기는 계속되었다. 마하 3급 미국형 초음속 여객기(SST) 개발을 위한 데이터 확보가 필요했던 NASA(미 항공우주국)가 공군 편을 든 끝에, 결국 시제기 XB-70A 2대의 생산이 승인되었고 1964년에 시제 1호기가 출고되기에 이른다. 동체 길이 56.39m, 날개 너비 32m의 거대한 기체였다. 시제기 두 대의 단가는 오늘날 화폐 가치로 7억 달러가 넘었다.

 

여러 악재가 겹친 끝에 프로그램 취소

시제 1호기의 첫 비행은 1964년 9월 21일 실시되었다. 이후 진행된 여러 차례의 시험 비행에서 두 대의 시제기는 꽤 인상적인 기록을 보여주었다. 시제 1호기는 같은 해 10월 12일에는 처음으로 초음속 비행에 성공했고 10월 24일에는 초음속으로 40분간 비행했다. 이듬해인 1965년 10월 14일에는 고도 7만 피트(21km)에서 마하 3.02의 속도를 냈다.

시제 1호기 운용 중 드러난 여러 결함을 개량한 시제 2호기는 1965년 7월 17일 첫 비행을 했다. 2호기는 1966년 1월 3일 고도 72,000피트(22km)에서 마하 3.05의 속도를 냈다. 4월 12일에는 마하 3.08의 속도를 20분간 냈다. 5월 19일에는 91분간의 비행 중 3,900km를 비행했다. 이 중 마하 3 이상의 속도로 비행한 시간이 32분이었다. 사실 제원상 B-70은 연료를 만재한 상태라면 마하 3 이상의 속도로 2시간 반도 비행할 수 있었다. 또한 미국형 SST 개발을 위한 NASA와 미 공군의 합동 연구에도 투입되었다.

그러나 1966년 6월 8일, 시제 2호기는 불의의 사고로 추락하고 만다. B-70의 엔진 제작사인 제네럴 일렉트릭 사의 홍보용 사진 촬영을 위해 다른 항공기들과 편대 비행 중, F-104와 충돌, 두 항공기 모두 추락하고 만 것이다. 이 사고로 항공기 2대가 모두 소실된 것은 물론, F-104 조종사 1명과 XB-70A 조종사 1명이 숨지고 말았다.

사고 사후 처리가 완료된 후 남은 1호기의 비행은 그 해 11월부터 재개되었다. 그러나 1호기도 사고 이후 34회만 더 비행하고 난 후, 1969년 B-70 프로그램 종료와 함께 미 공군 박물관에 보존 전시 처리되는 것으로 짧고 굵은 생을 마감하고 만다. 이미 베트남에 엄청난 전비를 쏟아붓고 있던 당시의 미국에게 이런 값비싼 폭격기 개발 프로그램을 유지할 사치는 허용되지 않았다. B-70 프로그램에 들어간 예산은 현재 화폐가치로 무려 약 15억 달러에 달한다. 이것도 항공기 기체 개발비용이었을 뿐, 폭격 체계나 전자전 대응 체계 등 전투 체계 개발은 손도 안 댄 상태의 금액이었다. 또한 소련의 방공망은 B-70조차도 생존성을 장담할 수 없을만큼 강력해졌다. 이 강력한 방공망을 돌파하려면 공기밀도가 높은 저공으로 침투 비행을 해야 하는데, 그러면 속도를 마하 1이상 낼 수 없다. 결국 B-70의 빠른 성능을 써먹을 수 없는 것이었다. 높은 속도를 내기 위해 개발된 붕소 함유 전용 연료가 너무 독성이 강하다는 문제도 제기되었다.

일각에서는 B-70의 뛰어난 비행 특성을 응용해 초고속 여객기, 수송기, 공중 급유기, 무인기 모기 등으로의 활용 방안을 수십 가지나 제시하기도 했지만, 양산된다 해도 대당 단가가 현재 화폐가치로 2억 4천만 달러짜리 비행기에게 맡기기에는 너무 시시한 임무들이었다. 즉 비용 대 효과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B-70 프로그램은 당시의 미국 항공 기술이 세계 최고임을 입증하는 이정표이자, 그 기술을 더욱 발전시키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이 프로그램은 현대적인 첨단 전자식 비행제어 및 엔진 제어 컴퓨터가 없던 시절에 이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 프로그램으로 인해 티타늄 등 고급 소재의 항공기 활용도 더욱 활성화 되었고, 장거리 초음속 항공기의 안전 비행을 위한 더욱 정확한 기상 예보 기술도 발전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B-70은 마하 3 이상으로 안전하게 비행한 후 착륙까지 한 가장 무거운 항공기로 인류 항공 역사에 남아 있다. 이 어려운 공학적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 개발진이 투입한 노력과 이뤄낸 성과는 반세기가 넘게 지난 지금 봐도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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