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칼럼

순간에 숨어 있는 영원

사이언스타임즈 라운지

한 변의 길이가 1유순(由旬 ; 약 15㎞)의 입방체인 철로 만든 성에 겨자씨가 가득 들어 있다. 백년마다 그 철성에서 겨자씨 한 알씩을 꺼내면 그 안의 겨자씨를 모두 꺼내는 데 얼마나 걸릴까.

또 사방이 1유순이나 되는 큰 바위 위로 백년에 한 번씩 선녀가 내려온다. 그때마다 선녀가 입고 있는 부드러운 치맛단에 스쳐 그 큰 바위가 모두 닳아 없어지는 데는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릴까.

불교 경전 ‘잡아함경’을 보면 앞의 것은 ‘겨자겁’, 뒤의 것은 ‘반석겁’이라고 되어 있다. 이처럼 엄청난 시간을 묘사한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겁(劫)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겁이란 천지가 한 번 개벽한 후 존속하다가 파괴되어 모든 것이 사라지고, 다음 개벽할 때까지의 시간을 일컫는다.

즉, 우리 인간의 시각에서 보면 겁은 영원의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옛 사람들의 입장에서 영원을 설명하기가 힘들어, 상상할 수도 없는 상황을 실제처럼 이렇게 구체적으로 설명했던 것이다.

이와 반대되는 시간 개념으로는 ‘찰나(刹那)’가 있다. 불교에서 시간의 최소 단위를 나타내는 이 말은 지극히 짧고 빠른 시간을 뜻한다. 얼마만큼 짧은가 하면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한 번 튕겼을 때 나는 소리 안에 65찰나가 들어 있다.

또 2명의 젊은 남자가 여러 가닥의 명주실 양쪽 끝을 붙잡고 잡아당기는 사이 칼로 단숨에 내려쳐 명주실 한 가닥이 끊어지는 데 64찰나라는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찰나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짧은 시간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이렇게 짧은 찰나도 요즘 시간으로 환산하면 0.013초에 지나지 않는다. ‘아비달마대비바사론’에 의하면, 하루는 30모호율라이고 1모호율라는 30납박, 1납박은 60달찰나, 1달찰나는 120찰나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현재의 1일 24시간으로 환산해 보면, 1찰나는 75분의 1초, 즉 0.013초에 해당한다.

흔히 눈을 한 번 깜박이는 데 0.1초가 걸린다고 한다. 또 인간의 뇌에서 근육까지 명령이 전달되는 시간은 0.2초다. 이렇게 볼 때 찰나는 우리가 순간적으로 반응하고 눈 깜짝할 새보다 훨씬 짧은 시간이다.

하지만 과학의 개념에서 보면 그렇지도 않다. 원자폭탄에서 원자핵의 핵분열 연쇄반응이 일어나는 시간은 0.000001초에 불과하다. 식물이 엽록소 사이의 에너지를 전달하는 시간은 350펨토초다. 또 수소 원자에서 전자가 원자핵을 한 바퀴 도는 데는 150아토초가 걸린다. 여기서 펨토는 1천조분의 1을 가리키며, 아토는 100경분의 1을 가리키는 단위다. 1펨토초는 빛조차도 0.3마이크로미터밖에 이동할 수 없는 아주 짧은 시간이다.

19세기 말, 프랑스에서는 ‘달리는 말의 네 발굽이 모두 땅에서 떨어지는 순간이 있을까’라는 문제를 둘러싸고 열띤 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그 궁금증은 때마침 개발된 사진기를 통해서 풀렸다.

말이 달리는 길옆에 여러 대의 사진기를 설치하고 줄을 연결한 다음, 말이 줄을 차고 지나갈 때마다 셔터가 눌러지도록 했다. 그 결과 불과 몇 초 동안 수십 장의 사진을 찍을 수 있었고, 마침내 달리는 말의 네 발굽은 어느 순간 모두 땅에서 떨어진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인간의 눈으로는 16분의 1초보다 짧은 순간에 일어나는 현상을 인식하지 못하기에 그처럼 사진을 통해서야 확인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럼 식물의 광합성 작용과 수소원자의 전자운동 같은 자연계 현상도 과연 사진으로 촬영할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시간보다 더 빨리 깜빡이는 빛이 필요하다.

최근 한국과학기술원 연구팀이 200아토초 간격의 빛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현재 세계 기록은 130아토초의 빛을 만드는 정도라고 하니 거의 세계 최고 수준에 다가섰다.

그러고 보면 옛 사람들은 겁이라는 긴 시간 개념보다 찰나라는 짧은 시간 개념이 현대에 비해 부족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찰나의 개념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찰나에 900번의 생멸이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생멸이란 우주 만물의 생성과 소멸을 뜻한다. 즉, 찰나 안에는 900번의 또 다른 겁이 들어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보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의 찰나가 영겁이니, 영겁과 찰나가 다르지 않다.

세밑을 앞두고 시간의 의미를 한번쯤 되새겨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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