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칼럼

소나무가 산불을 유발한다?

[과학기술 넘나들기] (168) 산불의 과학 (2)

최근 들어 전 세계적으로 규모와 강도가 점점 커지고 있는 산불은 특정 지역을 가리지 않고 발생하는 경향이 있으나, 그동안 극심한 산불 피해가 자주 발생했던 미국 캘리포니아, 그리스, 오스트레일리아 등지는 공통점이 있다. 즉 지중해식 기후를 띠는 곳이 많기 때문에, 고온건조한 날씨가 지속되는 여름철에 산불이 발생률이 높다.

특히 자연 발생적인 산불이 자주 일어나는 지역은 독특한 생태계를 이루고 있는 곳도 적지 않은데, 상당수의 과학자들은 식물의 생태계가 산불을 유발한다고 생각해왔다. 산불의 발생 원인과 식물계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이러한 가설은 그동안 확실한 증거가 부족하여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지만, 최근의 연구에 의해 산불과 식물이 상호작용하는 작동 원리가 속속 밝혀지고 있다.

산불이 자주 발생하는 곳 중 하나인 핀보스(Fynbos)의 관목지대 ⓒ GNU Free Documentation License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남부 역시 지중해성 기후대에 속하며 산불이 자주 발생하는 지역 중 하나로 꼽힌다. 특히 이곳은 핀보스(Fynbos)라 불리는 독특한 생태계를 형성하는데, 건조하면서 척박한 곳이지만 여러 관목을 비롯해서 다양한 식물군으로 이루어져 있다. 핀보스 생태계의 식물 군집은 약 7000종으로 구성되는데, 그중 일부는 산불을 활용하여 자신들을 번성하게 하는 놀라운 능력을 지니고 있다.

산불로 인하여 폐허가 된 지역에서는 ‘화재 후 단명식물(Fire Ephemerals)’들이 갑자기 늘어나기도 한다. 이들은 몇 년 이상 땅속에서 묻혀 있던 씨앗들이 산불을 계기로 하여 피어나는 것인데, 카리킨(karrikin)이라는 독특한 화학물질이 잠들어 있던 씨앗을 깨워서 발아시키는 역할을 한다.

카리킨은 산불로 식물이 타는 연기에서 나오는 물질 중 하나인데, 부테놀리드(butenolide) 계열의 화합물에 속한다. 역시 자연적인 산불이 자주 발생하는 지역인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이 ‘연기’를 지칭하는 그들의 언어에서 비롯된 용어이다. 카리킨은 산불이 나서 섬유소 계열의 탄수화물이 불에 타는 과정에서만 만들어지며, 식물의 잎에서 평상시에 자연적으로는 전혀 생성되지 않는다.

종자발아를 촉진하는 물질인 카리킨의 구조 ⓒ 위키미디어

현재 6종의 카리킨이 확인되고 있는데 식물에 따라 활성은 약간씩 다르며, 인공적인 합성도 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산불로 인한 연기가 땅속에 스며들어 씨앗과 만나서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면, 발아한 씨앗은 땅 위에서 꽃을 피우고 다시 그 씨앗은 땅속에서 잠자면서 다음번 산불을 기다리게 된다.

핀보스에는 잎에 가연성 오일을 포함하는 식물들이 많은데, 사람에게는 좋은 냄새를 풍기기도 한다. 즉 달콤한 향이 나는 제라늄과 부쿠나무 등은 불에 쉽게 타도록 진화했기 때문에 산불이 나면 무섭게 타오른다. 불탄 이후에는 씨앗의 발아를 촉진하거나 땅속의 구근이 자랄 자리를 마련한다.

소나무는 침엽수로서 잎이 두꺼운 활엽수 종에 비해 산불에 취약한 나무로 알려져 있다. 또한 불에 타기 쉬운 송진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봄철에 빈발하는 동해안 산불로 인하여 수백 년 이상 된 아름드리 소나무 숲이 불탔다는 안타까운 소식도 자주 접한다.

그런데 소나무 역시 미국에서는 산불을 유발하는 식물로도 꼽힌다. 캘리포니아 지역 등 초대형 화재가 잦은 미국에서 지난 10년 사이에 산불로 인한 피해액은 약 10억 달러 정도로 추산되는데, 소나무가 큰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다. 즉 불을 통하여 더욱 번성하게끔 진화해온 소나무 숲으로 인하여, 산불이 더욱 맹렬해지는 환경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소나무가 불을 이용하여 증식하는 요소 중 하나로 먼저 솔방울을 들 수 있다. 솔방울은 안에 들어 있는 씨앗을 보호하기 위하여 두꺼운 방어벽을 형성하고 있는데, 산불은 솔방울을 열어서 씨앗이 땅에 떨어지도록 돕는다. 또한 산불은 소나무와 경쟁이 될만한 다른 나무들까지 모두 태워서 없애주기 때문에, 산불 후 발아한 어린 소나무는 다른 식물의 방해를 받지 않고 충분한 햇빛을 받으며 잘 자랄 수 있게 된다.

산불에 대응하여 잎을 꼭대기에 보존하는 방식으로 진화한 우산소나무 ⓒ GNU Free Documentation License

또한 소나무 중에서 남아프리카의 핀보스 지역이나 유럽 등지에서 자라는 우산 소나무(Stone pine, Pinus pinea)는 잎을 불이 닿지 않도록 꼭대기 부근에 보존하여 살아남는 방법으로 화재에 맞춰서 진화하였다.

코알라의 먹이로도 잘 알려진 유칼립투스 나무 역시 번식을 위해 산불을 유발하는 식물로 알려져 있다. 오스트레일리아가 원산지인 유칼립투스의 나뭇잎과 수액은 불에 잘 타기 때문에, 연료를 제공받은 불길은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간다. 산불로 주변이 황무지가 된 후에야 불에 탄 유칼립투스의 씨주머니(seed capsule)가 열리고, 새로운 생명은 다시 자라나게 된다.

물론 식물이 산불을 유발한다고 해서, 사람의 방화나 실화처럼 직접 산불을 낼 수는 없다. 자연적으로 발화하는 산불은 번개로 인한 불꽃, 또는 극도로 메마른 환경에서 마찰열 등에 의해 일어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산불에 함께 번성하도록 진화해 온 많은 식물들로서는 산불 자체가 생태계의 하나로서, 인간에게는 큰 재앙인 대형 산불이 더 잘 일어나고 맹렬히 번지도록 촉진해왔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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