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자체가 한 편의 드라마, 장영실

장영실 재조명(1) 관노에서 종3품, 다시 나락으로

‘장영실’이 다시 뜨고 있다. 새해 들어 시작된 KBS 역사·과학 드라마 ‘장영실’ 때문이다. 4회까지 방영된 이 드라마의 시청률이 계속 10%를 넘기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사이트에서는 요즘 인기검색어 1위가 ‘장영실’이다.

매주 토일 방영하는 KBS 역사·과학 드라마 '장영실'.

매주 토일 방영하는 KBS 역사·과학 드라마 ‘장영실’. ⓒ KBS

그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오래전에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고, 그보다 더 쉽게 쓴 동화 위인전 식의 아동 서적은 50~60권이나 시중에 나와 있다. 어른들을 위한 대중서적도 만만치 않다. 장영실을 다룬 소설, 드라마, 뮤지컬 등도 생각나는 대로만 꼽아봐도 10여편이나 된다. 600년 전 인물인데도 그에 대한 관심은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더 뜨거워지고 있다.

600년 역사를 뛰어넘어 뜨거운 관심

역사 기록에 나타난 장영실은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다. ‘과학선현’이라고 불리는 그는 ‘과학적 재능’으로 조선 초기 신분 제도로 숨이 막혔던 사회에서 ‘관노(官奴)’라는 한계를 뛰어넘었다. 관청의 노비가 임금의 어여쁨 속에 재능을 맘껏 발휘하며 높은 관직에까지 올랐다가 우연찮은 사건 하나로 삭탈 파직된 뒤 역사의 장막 뒤로 사라졌다.

그 자체가 바로 극적인 삶이었다. 한편의 소설이요 드라마다. 기록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의 생애 중 많은 부분은 상상으로 채울 여지도 있다. 그에 대한 식을 줄 모르는 관심은 그의 비상한 재능도 재능이지만 생애 자체가 이런 극적인 요소를 함께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한  장영실의 표준영정. 호서대에 전시되어 있다. ⓒ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한 장영실의 표준영정. 호서대에 전시되어 있다. ⓒ 문화체육관광부

장영실 신분 둘러싼 왕조실록과 종친회의 다른 해석

장영실, 그는 조선 초 15세기 초반의 인물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언제 태어났는지 언제 죽었는지 분명치 않다. 일부 자료에는 생몰연도가 1390~1450으로 표기돼 있지만 실제는 1390?~ 1450?으로 표기해야 한다. 일부에서는 1383년생이라는 주장도 있다.

장영실의 출생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을 찾아 볼 수 없다. 다만, 세종실록에 그의 부모와 신분에 대한 언급이 나오므로 이를 근거로 유추해볼 수 있다.

1433년(세종 15년) 9월 16일 세종실록(61권)에 장영실의 관직을 높여주기 위한 논의 과정을 설명을 하면서 “행사직(行司直) 장영실(蔣英實)은 그 아비가 본래 원(元)나라의 소항주(蘇杭州) 사람이고, 어미는 기생이었는데…”라는 표현이 나온다. 즉, 실록에 따르면 장영실은 원나라 출신 아버지와 기생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이 날짜 실록은 또 “장영실(蔣英實)은 … 공교(工巧)한 솜씨가 보통 사람에 뛰어나므로 태종께서 보호하시었고, 나(세종)도 역시 이를 아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신분과 출생지를 추론해 볼 수 있는 기록은 그 다음해에 나온다.

1434년(세종 16년) 7월 1일자의 세종실록(65권)에서는 “영실(英實)은 동래현(東萊縣) 관노(官奴)인데, 성품이 정교(精巧)하여 항상 궐내의 공장(工匠) 일을 맡았었다.”라고 쓰고 있다.

이 같은 실록의 내용을 종합하면 장영실은 동래현 관노였지만 공교한 솜씨 때문에 태종에게 발탁됐고, 이어 세종도 장영실을 중히 쓰면서 궁궐내의 공장 일을 맡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장영실의 본관인 아산 장씨 대종회에서는 이와 조금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 실록에서 거론한 원나라가 1368년에 이미 망했기 때문에 장영실의 아버지가 고려에 입국해 장영실이 태어났다면 1434년에는 장영실이 이미 나이가 60이 넘어야 해서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종회에 따르면 장영실은 아산 장씨의 시조인 장서의 9세손이다. 장영실의 아버지는 시조가 고려 예종 때 송나라에서 충남 아산으로 망명한 뒤 고려에서 대를 이어 살고 있던 귀화인이었다. 장서는 중국 송나라의 대장군 출신으로 금나라 정벌을 주장하다 뜻이 맞지 않자 망명길에 올랐다. 예종은 아산군 인주면 문방리에 자리잡은 장서를 아산군에 봉했으며, 이후 그 후손들은 본관을 아산으로 삼고 집안을 일으켰다. 장서는 망명할 때 역법과 천문, 군사 기술을 갖고 왔고, 때문에 그 자손들은 고려에서 대대로 천문지리학과 무기 관련 고위 관직을 지냈다.

장영실의 아버지 장성휘는 다섯 형제와 함께 장관급 직위인 ‘전서’라는 고위직을 지냈다. 이 때문에 이들 형제의 출생지인 경북 의성군 점곡면 교동은 5전서의 마을로 불리기도 했다는 것이다. 형제 중 넷째의 딸은 당대의 최고 천문학자였던 김담에게 시집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장영실이 원래 노비 출신일 것이라는 추론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장영실이 동래현의 관노가 된 것은 고위 군사기술자로 동래현에 파견된 장성휘가 이 지역의 기생과 인연을 맺어 장영실을 낳았기 때문일 것으로 추론해볼 수 있다. 고려 때라면 상관 없었지만 조선 들어 태종 때 엄격한 신분제도가 만들어지자 기생에게서 태어난 장영실은 아버지의 신분에 관계없이 천인 계급으로 떨어져 성장 도중에 동래현의 관노가 된 것이라는 설명이다.

관노에서 종3품으로, 돌연 삭탈관직…역사의 장막 뒤로 사라져

장영실이 임금에게 발탁된 것은 앞서의 세종실록에서 밝혀졌듯이 태종 때였다. 다만 그 시기가 언제인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적어도 태종의 아들 세종이 즉위한 1418년 이전인 것만은 확실하다.

국립고궁박물관 11전시실 천문과 과학Ⅱ실에 설치된 복원된 자격루. 사진 왼쪽 부분에 설치돼 있다. ⓒ 국립고궁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11전시실 천문과 과학Ⅱ실에 설치된 복원된 자격루. 사진 왼쪽 부분에 설치돼 있다. ⓒ 국립고궁박물관

그래도 그가 과학기술사에 남는 중요한 일을 하게 된 것은 1421년(세종 3년) 이후의 일이다. 세종은 이 해에 윤사웅, 최천구, 장영실 등을 불러 천문기구에 관해 상의한 뒤 이들을 중국에 유학을 보냈고, 장영실은 귀국한 지 다음해인 1423년(세종 5년) 종5품인 상의원 별좌에 임명되면서 면천된다. 상의원은 임금의 의복과 궁궐의 금은보화를 맡아보는 관청이다. 장영실이 금속기술에 능했기 때문에 이 관청에 임명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장영실은 1442년(세종 24년) 우연치 않은 사안으로 삭탈 파직되어 물러나기 전까지 행사직(정5품, 1424년), 호군(정4품, 1433년), 대호군(종3품, 1438년) 등으로 승진해가며 과학기술 분야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장영실 연보> 

1418년 세종 즉위 이전에 태종에게 장영실이 발탁되어 궁중기술자로 첫 발

1421년 세종3년. 세종이 장영실을 중국에 유학 보냄. 1년 뒤 귀국 – 연려실기술

1423년 세종5년. 장영실 공조의 종5품 상의원 별좌로 임명, 천민의 신분에서 벗어남

1424년 세종6년. 병조 오위의 정5품인 행사직으로 승진

1432년 세종14년. 세종, 천문의기 사업팀 조직

1433년 세종15년. 혼천의, 간의, 보루각 자격루 완성. 장영실 정4품 호군으로 승진

1434년 세종16년. 7월 1일 보루각 자격루 시간을 국가표준시간으로 채택

간의대(조선의 종합 왕립천문대) 건립

1437년 세종19년. 일성정시의(주야겸용 천체시계) 완성

1438년 세종20년. 흠경각 자격루 완공, 천문관측기구 모두 완성. 장영실 종3품 대호군 승진

1442년 세종24년. 3월 16일 안여(安輿‧임금이 타는 가마)가 부숴지는 사건 발생, 장영실 의금부 국문

4월 27일. 장영실 직첩을 거두고 곤장 80대. 이후 활동 기록이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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